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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곳을 떠올리다
그날 Dream Cafe를 찾아온 불청객은 누구?
by
라미루이
Dec 18. 2020
골목 어귀의 전봇대를 끼고돌자마자
금방이라도 지상에 떨어질 것처럼
허름한 간판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깜박인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여,
어서 들어오라 손짓하는 듯
비틀거리며 전봇대를 감싸 안은 그의
벌겋게 핏줄이 선 탁한 눈동자에 비친
군데군데 이가 빠진 '
Dream Cafe
' 네온사인
채플린 풍의 까만 보울러 모자를 눈썹 아래까지 눌러쓴
그가 지하로 길게 뻗은 계단을 내려가
카페의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서자
별천지처럼 쏟아지는 조명에 눈이 부셔 움찔한다.
대낮처럼 환한 실내에서 수다를 떨고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은 잠시 어색한 침묵에 빠졌다가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의 그를 바라보며 히죽거린다.
- 저런 모자는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 밤새 술 처먹고 갈 데가 없어 여기로 왔나 보군. 끌끌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은 탁자에 손을 번갈아 짚어 가며 카운터로 나아간다.
- 뭘 드릴까요? (당장 주문하지 않으면 밖으로 내쫓을 줄 알아)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카페 주인의 양쪽 눈썹이 번갈아 실룩인다.
- 저, 저기.. 쿨럭, 커억
그의 목소리는 먼 산을 돌아온 메아리처럼 시차를 두고 실내를 울린다.
말을 맺지 못하고 연달아 터지는 마른기침에
주인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그의 얼굴을 가린 두터운 마스크는 덕지덕지 손때가 묻어 더러웠고,
기침이 터질 때마다 뽀얀 먼지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이방인 처지에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숙소에 돌아갈 차편이 끊어졌소.
동이 틀 때까지만 여기 머무르면 안 되겠소? 부탁합니다.
비록 그의 행색은 남루했지만 갈라진 목소리는 정중했고 위엄이 서려 있었다.
- 보시다시피.. 여긴 카페요. 노숙자들이 머무르는 길거리 여관이 아니라..
주인장의 팔짱 긴 손목에 힘줄이 툭 불거진다.
- 제발.. 잠시만이라도 저 비어있는 의자에 몸을 기대 쉬게 해 주시오.
마땅히 갈 데도 없고, 미로처럼 뻗은 골목길을 헤매다 겨우 찾은 곳이 여기요.
차갑게 그를 바라보는 주인장은 팔짱을 스르르 풀더니 출입구 쪽을 한 손으로 가리켰다.
- 당장 나가. 들어온 그대로 흔적도 남기지 말고.. 당신 발로 나가지 않는다면 개처럼 질질 끌려 나가는 수밖에..
그는 둥그런 곡선을 그린 모자챙을 슬쩍 들어 올려 주인을 응시한다.
핏발이 선 그의 두 눈 흰자위 가장자리로 기다란 벌레들이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걸 주인이 발견한 순간
눈꺼풀이 맥없이 닫힌다.
- 컬록, 커어 억. 하, 하는 수 없죠. 부디 멀지 않은 시기에 당신에게 누군가 자비를 베풀어 주길.
그가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리며 마스크를 코 아래로 내리자 누렇게 말라 붙은 콧물이 콧구멍을 빈틈없이 틀어막은 게 보인다.
(역겹군. 저 상태로 코로 숨 쉬는 건 글러먹었
네.)
- 개떡 같은 소리 그만하고 꺼져.
가시 돋친 말을 뱉은 주인장은 비틀거리며 출구 쪽을 향하는 그를 노려보다 커피잔의 물기를 닦아낸다.
탁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사람들은 그가 문 손잡이를 돌리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린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한 걸음 나갔다가 뭔가 잊었다는 듯 등을 돌려 카페 내부를 바라본다.
밖은 5분만 서 있어도 손발이 시려 버티기 힘들 정도의 칼바람이 불고 있다.
출구 쪽의
패브릭
소파에 눕다시피 부둥켜안은 커플이 몸을 동시에 일으키더니 빽 소리를 지른다.
- 아저씨, 꼬리가 너무 긴 거 아니에요? 어서 문 좀 닫고 나가요.
그는 여전히 꼼짝도 않는다. 문지방을 밟고 서서 가로막고는 수문장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아닌가.
- 에이, 씨
하는 수 없이 주인장은 카운터에서 나와 그에게 다가간다.
- 이봐, 이대로 꺼지지 않으면 영업 방해로 신고할 줄 알아.
한 덩치 하는 주인장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팍을 힘껏 밀어 보지만 꿈쩍도 않는다.
- 이 자식이..
갑자기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의 마스크를 내리려 하자 주인은 움찔한다.
- 그 망할 놈의 마스크 벗어 버리고 말 좀 해 보시지. 대체 왜 이러는지?
그가 마스크를 내려 턱 아래로 내리자 주인은 보았다.
그의 입은 밖을 향해 뚫려 있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위아래 입술을 벌건 명주 실로 빈틈없이 꿰매어 놓은 것이다.
이윽고 그는 양손으로 자신의 코와 아래턱을 부여잡고는 힘껏 위아래로 잡아당긴다.
카페 주인은 그의 끔찍한 모습에 경악했지만,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볼뿐이다.
후두둑! 드득.
우악스러운 손아귀 힘에 실밥은 터져 버리고, 마침내 그가 굳게 닫힌 아가리를 벌린 순간..
산 자의 세상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는 수많은 망자들의 아우성이 쏟아져 나온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주인이 활짝 열린 카페의 문을 닫으려 했지만, 문틀에 달린 경첩도 겁에 질려 얼어버린 듯 굽어질 줄을 몰랐다.
- 대, 대체 뭐야? 당신은..
그는 대답 대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카페 안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뜨거운 커피는 차디차게 식어갔다.
난데없이 불어닥친 혹독한 겨울의 입김이 카페 안의 온기를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주인은 벌벌 떨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입 안에서 쏟아지는 무언가를 목격하고는 힘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배꼽 언저리가 울룩불룩 솟아오르더니 식도를 타고 거슬러 오른다.
목젖이 튀어나오고, 턱관절이 한껏 벌어져 그의 턱 끝이 명치에 다다를 지경이 되었을 때..
오래도록 방치된 방구석에 굴러다니는 시꺼먼 먼지 뭉치 같은 것들이 늘어진 목구멍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단순한 먼지가 아니었다.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떠돌기만 하는 불청객의 저주를 머금은,
흡착판을 가지고 있어 사람의 피부에 달라붙어 수일간 생존하다가 기회가 되면 숙주의 코와 입을 통해 폐로 침투하여 치명적인 염증을 유발하는 새로운 형태의 '바이러스'였다.
주인은 점차 자신의 몸이 화끈거리고, 여기저기가 쑤시는 것을 깨달았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가 쪼그라들며 수축하다가 더 이상 원상태로 팽창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곤 자신의 가슴과 목을 움켜쥐었다.
- 켁, 커억.
주인은 벌게진 눈으로 그가 마스크를 벗어 멀리 던져 버리고는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 사, 살려 주시오.
제발.
그는 무릎을 굽혀
꿇어앉아
주인의 실핏줄이 터져 점점이 타오르는 흰자위를 바라본다.
- 안타깝게도..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는 내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오.
그대로 정신을 잃
고 옆으로 풀썩 쓰러지는 주인의 부릅뜬 눈을 감겨주는 불청객.
원래대로 돌아온 턱주가리를 닫은 그는 아까 그 커플이 널브러진 소파로 다가간다.
각자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다른 방향으로 쓰러진 남녀의 가운데 자리에 그는
턱 하니 앉더니
원형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맛을 본다.
- 으음, 달달하군. 매일 이런 스위트한 것만
접하다가 난데없이 고통을 맛보니 더 견디기 힘들었겠어.
끌끌거리며 혀를 차는 그의 롱 코트 자락 아래로 기다란 뱀의 꼬리가 슬그머니 내려오더니 소파 아래로 미끄러진다.
- 괜스레 남의 꼬리
는 왜 탓하는 거야. 참을성은 없는 데다 매너는 꽝, 오지랖만 넓어가지고..
그는 하얀 잔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혀로 핥아 지우고는 몸을 일으켜 카운터로 향한다.
카운터 안에 들어가 주인이 앉아 있던 원형 스툴에 걸터앉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자신의 희뿌연 입김 말고는 차가운 공기를 떨게 만드는 어떠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듯이,
자신의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벗고 입김을 내뿜은 자리에 있던 모든 산 자들은 누구도
살아서 카페 밖으로 나갈 수 없었
으니까.
- 루즈하고, 따분하고, 지루하기 그지없군. 아함.
그는 너덜한 입을 벌려 하품을 하고는 이곳으로 자신을 찾아올 일행이 있는 것처럼
,
열린 문 밖을 이따금씩 홀깃대며 무심히 잡지를 펼쳐 휘리릭 훑어본다.
***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2019년 12월 18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Dream Cafe'에서 벌어진 일들은 오직 꿈에서 벌어진 일일뿐.
만일 낡은 보울러 모자와 마스크를 눌러쓴 취객이 난데없이 당신의 거처를 찾아와
오밤중에 도움을 청한다면 기꺼이 도움의 손을 내밀기를 바란다.
누가 알겠는가?
모두가 역병으로 쓰러지는 최후의 순간에 누군가 나타나 자비로운 손길로
당신을 일으켜 주고는 축복의 신이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은 금빛 마스크를 씌워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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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두려 하는 딸둘아빠입니다. 무심히 흘러가는 일상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글감을 건지려 촉을 세웁니다. 상상을 버무려 잠시나마 현실을 잊는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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