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몸을 숨긴 무언가가 손을 쭉 뻗어 날 어딘가로 잡아챌 것처럼 서둘러 뛰쳐나오던 겁에 질린 아이의 표정.
(아버지의 어이없어하던 표정도 떠오른다.)
이후에도 어둠에 홀로 갇히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빛을 향해 뛰쳐나오곤 했다.
초딩 시절, 멋모르고 따라나선 1박 2일 일정의 극기 훈련에서 벌어진 일이다. 훈련 과정 중에 야간 산행이 있었는데 20초 간격으로 아이들을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로 차례차례 출발시키는 것이었다. 모두들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잘 걸어가는데 내 차례에서 문제가 생겼다. 내가 포장된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어둑한 산길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발만 동동거리고 뒤를 돌아보며 망설였던 것이다. 겁에 질리긴 했지만 다행히 울음보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두고두고 놀림감이 됐을 것이고, 기나긴 내 흑역사 목차에 지워지지 않을 에피소드로 남았을 테니까. 결국 난 뒤따라오던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겨우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과거에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나 트라우마를 겪을 만한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갈수록 희미해지는 어린 시절 기억을 헤집어 봐도 어두움을 두려워할 만한 마땅히 떠오르는 응어리는 없다.
난 그저 태생적으로 어둠을 무서워하도록 태어난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전생에 질리도록 어둠을 즐기다 일생을 마친 눈먼 심해어나 박쥐 아니면 지렁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뿐일까?
예로부터 눈이 큰 사람은 겁도 많다는데 그건 날 두고 한정한다면 맞는 말인 셈이다.
누군가가 육교 위를 걷는 날 유심히 지켜본다면 가장자리 난간에 다가가지 않는 모습을 이내 알아차릴 것이다.
양 옆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가운데 통로로 바삐 걸어가는 내 발걸음.
그렇다. 난 공중에 10미터 이상 떠 있는 것을 무서워하는 고소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육교에만 올라가도 난간 아래를 당당히 내려다볼 수가 없다. 발이 후들거리고, 어지러운 데다 현기증이 나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저 까마득한 도로로 추락해 버릴 것만 같다.
당연히 최근에 유행하는 고층 빌딩의 발코니나 깎아지른 절벽 상단에 설치된 전망대(또는 잔도)의 바닥을 투명 강화 유리로 설치한 곳에는 몇 걸음 옮기지 못해 그 자리에 얼어붙거나 사색이 된 얼굴로 돌아오곤 한다.
예전 어느 미술관에서 관람한 전시 작품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족히 스무 명은 들어갈 만한 원통형 기둥 내부가 온통 투명한 유리 거울로 마감되어 있었다.
측벽뿐만 아니라 천장과 바닥마저도.
덕분에 안에 들어간 사람은 발을 딛고 선 바닥이 끝없이 투명한 허공으로 꺼지는 듯한 아득한 스릴감을 즐길 수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하며 바닥에 누워서는 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방방 뛰어다니고, 구르고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난 입구에서 조용히 바라보며 이 모습을 영상으로 남겼을 뿐이다.
이런 중증 고소 공포증을 타고 난 나로서는 버킷 리스트에서 지워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이를 테면 번지점프나 스카이 다이빙, 자이로드롭이라든지. 난이도 극상의 롤러코스터, 짚라인이나 패러글라이딩은 발아래를 내려보지 않고 멀리 본다면 가능할 듯도 한데 그리 자신은 없다. 평생 즐길 거리도 많은데 굳이 학을 떼고 버티기 힘든 것을 가까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타고난 두려움은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극복되지 않는 법이다. 나 혼자로 만족하지 못해 자식들에게까지 유전되어 피내림으로 전해지는 저 두려움을 보라. 그냥 포기하고 평생 옆집에 사는 이웃처럼 지내되 일부러 가까이 지내고자 집에 초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가능하면 내가 즐거워하고, 천성과 체질에 맞는 것을 찾아 애를 쓰고 반복하여 경험하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애초에 화두로 꺼낸 아이의 무서운 감정과 관련이 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이 지구 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누군가 준 자폐 성향의 극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더라도
혼자 동굴에 틀어박히는 걸 즐기는 타입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나오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두려움은 바로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과 단절되어 외따로 고립되고 잊힐 수 있다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이는 가족들이 바로 옆 식탁에 앉아 있음에도 홀로 떨어져 화장실에 잠시 머무르는 것마저 두려워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있쬬? 있죠오?" 연거푸 신호를 보내며 엄마와 언니가 곁에 머물러 있음을 주기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코로나는 인간이 얼굴을 마주치면서 악수를 하고, 볼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는 등 서로서로 직접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하며 외로움을 달래던 사회적인 행동을 멈추게 하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질병으로 역사에 기록될 거라고.
제한적인 폐쇄된 공간에서 메신저나 페북, 인스타, 유튜브, 게임 같은 온라인으로 간접 소통하면서 외로움을 해결하고 우울함을 떨치고 행복을 찾는 건 한계가 있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역사가 한참 짧은, 검증되지 않은 온라인을 통한 소통 방법이 유효하다면(우리들의 외로움을 성공적으로 달래주었다면) 미국과 유럽의 저 많은 사람들이 집을 뛰쳐나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공원에서 단체로 조깅을 하고, 식당에서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는 위험을 감수하진 않았을 테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한 번쯤은 제한된 공간에서 빠져나와 밝은 햇빛을 쐬고, 마스크를 쓴 이웃들과 눈인사라도 나눠야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이다.
어찌 보면 바이러스도 인간의 이러한 취약점을 마침내 꿰뚫어 보고 이 정도까지 진화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코로나 확산이 전 지구적인 재난으로 치닫게 된 데는 추운 날씨에 따른 실내 활동 증가, 무증상 발현과 전염성 증가라는 바이러스 변이 탓도 있겠다.
하지만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로 뛰어드는 현대인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끝내 끊어내고야 마는,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야수의 서늘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바이러스의 약삭빠른 잔인함에 있을지도 모른다.
***
아무튼 나에게 최악의 지옥은 이런 것이다.
한치의 빛도 새어들지 않는 완벽한 암흑에 휩싸인 독방에 갇힌 한 남자.
하루에 몇 시간은 빛이 허용되는데 하필이면 바닥을 통해서만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