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은 내 오랜 고질병인 편두통을 제공한 원흉이다. 카페에서 남들이 희희낙락 즐긴다 해서 멋모르고 진한 커피 한잔을 들이켰다가는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어김없이 위장이 떨리고 뒤틀리고 꿈틀대면서 과도하게 움직인다. 속에 연쇄적으로 터지는 폭탄이 투하된 듯하다.
오전에 커피가 들어가면 십중팔구 복통이 엄습한 아랫배를 감싸 쥐고 화장실로 달려가기 일쑤다. 기름진 점심을 먹은 후 라테 한잔은 그나마 버틸 만 한데, 이후에 과다하게 분비된 위산 역류로 인한 잦은 트림과 헛구역질에 속 쓰림 크리가 터지면서 달달한 커피 한잔을 즐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한다.
심장이 터보 모드로 요동을 치고, 수전증 걸린 것 마냥 손 끝이 가볍게 떨리는 건 참을 만하지만, 가뜩이나 뻣뻣한 온몸의 근육이 돌처럼 굳어지고, 온 신경이 쭈뼛 곤두서는 것만은 세월이 흘러도 좀체 적응되지를 않는다.
전신에 퍼진 카페인 탓에 교감 신경이 바짝 긴장하고, 혈관이 수축한 탓에 지난날의 아픔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왼쪽 목덜미의 근육이 점점 긴장되어 통증이 올라오고 얼마 안 있어 귓가를 타고 올라와 관자놀이를 망치로 톡톡 두드리는 듯한 두통이 오후의 일상을 헤집어 놓는다. 심장 박동을 따라 점차 강도를 더해가는 망치질은 카페인의 여운이 산산이 흩어질 때까지 이어지다 뜬 눈으로 지새운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잠해진다.
진통제를 먹어봐도 별 효과가 없더라. 남들은 잘만 듣는 타이** 같은 진통제도 내 빈 속에만 들어가면 속을 더 쓰리게 하고 손망치가 아닌 막노동판에서 쓰이는 무지막지한 해머로 머리통을 갈기는 듯한 통증이 더해지니 그냥 맨 정신으로 버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밤새 뒤척거리며 침대와 거실, 키친을 몇 번을 오가다 보면 새벽 4시가 성큼 다가온다.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옴폭 들어간 관자놀이를 검지와 중지로 동그랗게 눌러가며 후회와 안도로 가득 찬 한숨과 함께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이다.
"빌어먹을.. 망할 카페인 같으니. 내가 다시는 커피 마시나 봐라."
하지만 회사 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다 보면 하루에도 몇 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 커피다.
지난날의 끔찍한 고통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즈음, 별다방으로 날 불러낸 거래처 직원이 달달한 캐러멜 마끼아또나 모카커피를 대접하면 좋다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이키곤 하는 것이 내 고질적인 병폐다.
그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카페인이 들어간 커피를 대신할 몇 가지 음료를 찾아냈다.
최근에는 주로 따뜻한 보리차를 수시로 마신다. 식수 대용으로 부담 없이 마시기에는 역시 보리차가 최고다.
부담스러운 식사를 하고, 몸속을 닦아 내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싶을 때는 연하게 우려낸 녹차를 가까이한다. 뭉근하게 우려낸 녹차는 카페인이 적다지만 빈속에 마시거나 해가 진후에도 상시로 마시면 위험하다.
과다한 카페인 또는 맵거나 자극적인 음식을 먹었거나, 번잡한 마음으로 밤에 속이 쓰릴 때는 시원한(혹은 미지근한) 생수로 속을 달래준다. 감자에 양배추에 천마에 연근, 브로콜리, 갑오징어 뼛가루, 누룽지차 등등 속 쓰림에 좋다는 수많은 음식을 접했건만 효과가 없었다.(오히려 증상이 악화된 경우도 많았다.) 속이 아릴 때에는 굳이 좋다는 음식을 더하여 먹기보다는, 평소 식습관을 돌아보고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를 과감히 줄이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다. 미니멀리즘은 식사에도 적용해 볼만한 것이다. 극단적인 단식은 오히려 속 쓰림을 악화시킬 수 있으니 소식으로 허기를 다스리고 깨끗한 물 섭취를 통해 속을 달래면 몸은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내는 나와 반대로 카페인과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절친이라 할 수 있다. 밤 9시에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입 안에 털어 넣는다 해도 서너 시간 후에 베개맡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곤한 잠에 빠지는, 카페인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단련된 타입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치사량의 사약에 가까운 에스프레소를 감히 거들떠 보지도 않는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는 체질이 아닐 수 없다.
종종 아내가 맛보는 커피를 조심스레 한두 모금 마셔보기도 하지만 내 몸은 일정 양 이상의 카페인을 한사코 거부한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던데? 슬슬 무던해질 때가 됐는데..
이따위 대범한 척, 안도하는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내 몸에 각인된 카페인의 임계치를 넘을 때마다,
(부글부글, 두근두근..)
불룩이는 위장의 경련이 전해지고, 템포를 빨리하는 심장 박동을 따라 누군가 관자놀이를 툭툭 잽으로 건드린다.
"안녕! 친구. 간만에 얼굴 보는군. 낄낄."
"..."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내 곁에 홀연히 나타난 어릿광대의 눈동자가 크레마가 사라진 새까만 에스프레소처럼 아득하다.
그의 손에는 우스꽝스럽게도 예전 두더지 잡기 게임기에 매달려 있을 만한 뿅망치가 들려 있는 게 아닌가.
"뿅, 뿅!"
장난 삼아 내 관자놀이를 뿅망치로 두드리는 '그것'의 등장과 함께 역시나 하는 후회와 고통으로 가득 찬 비극의 막이 서서히 올려진다.
이 섬뜩한 경고를 무시하고 식탐에 굴복하여 아내의 커피를 빼앗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하면..
"끌끌, 어리석기 그지없어. 수없이 불에 데이고도 매번 달려드는 나방과 같다니.."
입꼬리를 실룩인 어릿광대는 한쪽 어깨에 걸친 뿅망치를 휙 뒤로 던져버리고는
(페니 와이즈처럼) 무시무시한 이빨을 활짝 펼치고 달려들어 내 머리통을 조금씩 물어뜯고,
기다란 혀로 핥아 올리고, 깔끄러운 손톱으로 긁어 대면서 밤새 내 곁에 머무른다.
(잠깐 떠오른 상상만으로도 이리 섬찟할 수 있다니..)
아무튼 내게 있어 카페인은..
불나방의 곁을 맴도는 도깨비불처럼, 일견 따스해 보이고 알 수 없는 매력에 끌리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무심코 혀를 내밀었다가는 흔적도 없이 타 버릴 수 있는
비밀스러운 침대 위에 누워 날 유혹하는, 긴 흑발을 드리운 팜므파탈의 묘한 눈빛을 닮은 그런 존재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