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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by 라미루이


아파트 놀이터에 솔과 연을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고 놀고 있다. 그 놀이터는 차 서너 대 들어올 수 있는 비좁은 주차장과 접해 있다.


한낮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깨뜨리고 털털털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부서진 앞 범퍼가 내려앉아 투명 테이프로 칭칭 동여맨 동네 마트 조그만 배달 트럭 한 대가 등장한다. 트럭은 속도도 줄이지 않고 냅다 엑셀 밟으며 노는 아이들을 구석으로 몰아붙인다.

(여기가 무슨 F1 트랙도 아니고. 여기서 드리프트라도 할 셈인가.)

기가 막혀 혀를 끌끌 차는 와중에 놀이터 쪽으로 후진하는데 뒤도 보지 않고 일체의 망설임이 없다.

덕분에 아이들은 놀이를 멈추고 바짝 얼어붙은 채 담벼락에 붙어 서있다.


운전대 잡은 놈, 여기서 노는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구나. 오로지 배달 빨리 마치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는 거야. 저러다 언젠가는 아이들이나 노인들 들이받고 큰 사고 치겠구나 싶어 다가가 한 마디 한다.

"여보쇼, 여기 놀이터이고 어린이 보호구역인데 천천히 좀 다닙시다."

최근 들어 머리숱이 줄었는지 보글보글 파마에 갈색으로 물들인 그 사내, 땀으로 번들거리는 벌게진 얼굴을 구기며 대꾸한다.

"전 그런 적 없는데요. 천천히 다녔어요."

이대로 물러서면 안 되겠다 싶어 한 발짝 다가서며 몰아붙인다.

"제가 여기서 다 보고 있었어요. 위험해 보여서 영상도 남겼네요."

(폰만 들었을 뿐 미처 영상은 찍지 못했다. 그가 발뺌을 하길래 둘러댄 것이다. 다음에 또 그런 운전 습관을 보여준다면 증거 영상을 남길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


폰을 들어 보여주자 그제야 그는 마지못해 죄송합니다 한마디 하고는 대파에 양파며 반찬거리 메들고는 툴툴거리며 갈길 가 버린다. 곰곰이 생각하니 괘씸한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여기는 학교 주변이라 어린이 보호구역인데 저렇게 난폭하게 운전해도 되는 건가? 한 마디 했더니 적반하장으로 시치미를 뚝 떼고 대드는 사내의 행동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럼 이 상황에서 성인군자처럼 묵묵히 참고 있어야 하나? 나도 한 댓가락하던, 호랑이를 닮은 성정을 지닌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놈이다. 솔과 연 그리고 아이들이 노는 곳에서 저런 무법천지와 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지. 암, 안되고 말고.

배달을 마친 그 사내가 트럭 몰고 나가는 길, 뒤통수에다 대고 큰 소리로 한 마디 더 날린다.

"운전 살살 좀 하고 다닙시다."

트럭이 잠깐 덜컥이며 서더니 백미러로 날 노려보는 그 사내, 옆모습이 실룩이더니 이내 사라진다.

반성의 기미가 안 보이길래 가끔 장 보러 들리는 그 마트에 전화하여 사장님을 찾는다.

"여기 xx 아파트인데요. 오늘 보니까 배달하시는 분이 운전 너무 험하게 하시네요. 아이들 노는데 속도도 안 줄이고 마구 밀어붙입디다. 이거원 불안불안, 위험해서 살겠습니까."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여러 군데 배달 가야 하니 조급해지는 건 이해는 하지만, 놀이터에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그렇게 속도 높이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그렇게 난폭 운전하면 영상으로 남겨서 경찰서에 민원 넣을 겁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할 때는 되도록이면 강하게,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좋다. 그야말로 일침을 가하듯이 따끔하게 호되게 꾸짖어야 하는 것이다. 미적 지끈하게 여러 번 잔소리를 하다 보면 상대방도 그런가 보다 하고 같은 잘못을 연거푸 저지를 수도 있으니까.

다소 격앙된 내 목소리에 얼굴도 모르는 마트 사장님은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한다.


그렇게 좋지 않은 인연으로 맞닥뜨린 배달 트럭을 모는 그 사내는 더 이상 주차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얼굴을 익힌 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종종 마주치기 시작했다.

솔과 연의 하교 시간이 되어 집을 나섰는데 맞은편 동으로 들어가는 그 자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틀림없어, 그 사내야. 알고 보니 이웃이구만.)

처음에는 닮은 사람인 줄 알았으나 뽀글하게 볶은 머리와 마트 이름이 새겨진 작업 조끼는 틀림없이 그 자일 거라고 내 직감은 주장했다. 마트 일로 온 거 같지는 않고 출입 비밀번호를 누르고 당당하게 들어가는 본새를 보니 일하다가 점심 먹으려고 자신의 집에 들른 듯하다. 오호,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뻔히 아는 놈이 아이들 킥보드 타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뛰노는 거기서 그 따위로 운전했단 말이냐?

이웃이라 반가운 마음보다는 단단히 밉보인 그가 더 괘씸해지고 얄밉기만 하다. 그가 맞은편 동의 복도로 사라지는 걸 곁눈질로 흘겨보고는 학교를 향해 바삐 걸어간다.


얼마 전에는 오후에 아이들 학교 교문으로 들어가다가 엉거주춤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사내를 목격했다. 분명히 눈길이 마주쳤지만 그는 황급히 자신의 폰을 내려다보았고, 난 이마에 힘을 주며 그를 쏘아보았다.

영락없이 아빠가 수업을 마친 자신의 아이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나 또한 일개 소인이기에 좋게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렇게 마음이 흘러가지 않는 걸 (독자 분들은)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아니, 자식이 있는 아버지가 어찌 그리 험하게 운전을 한 단 말이오?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배달을 하면서 혹시나 자신의 아이가 거기서 놀고 있으리라는 걸 염두에 두지 않는단 말인가? 남의 자식들은 지 부모가 없을까? 모두들 끔찍하게 공들이고 위하면서 낳아 소중히 키운 걸 뻔히 알면서 그리 무식하게 쇳덩이로 몰아붙인단 말이오? 그 아이들의 안전보다 남의 집에 반찬거리를 빨리 배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여기 동네 마트에서 누가누가 배달 빨리 하는지 순위 경쟁해서 1등은 웃돈이라도 얹어 준답니까. 다들 핸들만 잡았다 하면 눈이 벌게져서는 엑셀에서 발을 못 떼니 그런 미친 행동이 어디 있소?"


마음 같아서는 그 사내를 학교 운동장 한 켠의 벤치로 끌고 가 옆에 앉히고는 전후 사정을 들어보고 조용히 면담이라도 했으면 좋겠건만, 둘째 연이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채서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어 아이를 기르고 함께 걷다 보니 지상에 미미하게 움직이는 개미나 지렁이라도 무심코 밟을까 조심스럽다. 갈수록 발걸음이 무겁고 신중해진다. 하물며 사람의 몇 십배나 더 나가는 쇳덩이를 몰면서 비둘기나 개, 고양이 그리고 같은 인간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다닌다는 건, '나 자신은 미성숙하고 몰지각한, 핸들만 잡으면 폭주하는 인간이오'라고 사방팔방 소문내는 것과 다름없는 무책임한 행동인 것이다.


이 나라의 운전대를 잡은 이들이여.

제발 이면도로나 골목길, 주차장 그리고 어린이/노인보호구역에서는 엑셀에서 발을 떼고 속도를 줄입시다.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서면 뭐에 그리 쫓기는지 과속을 하거나, 교차로에서 차선을 지키지 않고 안쪽으로 파고드는 차량과 이륜차 때문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혹시나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마음 놓고 우리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어요.

더 이상 우리 집 앞의 골목길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무법천지'나 다름없습니다.

비둘기나 개, 고양이도 길 위에 오래 머무르거나 함부로 횡단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족, 친구들이 처참하게 로드킬 당하는걸 숱하게 봐왔거든요.

어린 시절부터 세뇌당하다시피 주입당한 "빨리빨리"라는 명命은 더 이상 이 사회를 지탱하는 미덕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빠르게 누군가를 추월하며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두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남보다 빨리 달리기보다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를 살피고, 타인과 노약자를 배려하는 "느린 마음"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두 아이를 돌보는 아빠로서,

그리고 모든 아이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어른으로서,

집이나 학교 주변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는 아이들을 뉴스에서 접하지 않는 안전한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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