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100인의 아빠단과 서울시 아빠단 이벤트를 수행하면서 아이들과 보다 가까워지고, 소소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솔과 연이 어릴 때부터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다면 육아에 참여하는 아빠들과의 연도 넓어지고,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경험을 선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후회도 듭니다.
세 번째 서울시 아빠단 이벤트는 아빠와 아이들에게 '가족'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주제로 질문을 던져 봅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 )입니다. 왜냐하면 ( ) 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질문에 대해
각자 자유로이 한 단어 또는 여러 문장으로 써보고 가족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사랑'입니다." 처럼 단어 형태로 정의해도 되고,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매일 함께 식사하는 것'입니다." 와 같이 가족의 조건이나 상태에 대해 문장으로 적어도 됩니다.
"얘들아, 아빠단 이벤트 할까?"
"네엥."
금요일 밤, 할 일을 마무리하고 식탁에 아이들을 불러 모아 앉습니다. 아이들은 아빠단 이벤트도 재미있지만, 그보다는 이벤트에 열심히 참여하면 제공되는 빙수나 케이크, 도넛 같은 디저트 기프티콘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염불에 마음이 가기보다는 잿밥에 자꾸만 눈이 돌아가는 동자승과 같다고나 할까요.
아이들에게 일종의 동기 부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는 과정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하는 것 또한 다음 작업을 위한 에너지를 모으고 동기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이들에게 질문이 적힌 이면지를 나누어주고, 다른 가족이 먼저 수행한 예시글을 보여줍니다.
"아하, 뭔지 알겠어."
"길게 써도 되는 거죠, 아빠?"
연은 가족의 의미에 대해 적어 내릴 글이 짧지 않은가 봅니다.
"여러 문장으로 써도 돼. 너희들이 그동안 생각해 온 가족의 참뜻에 대해 쓰면 된다."
솔이 먼저 진청색 네임펜을 들고 뭔가를 써내려 갑니다. 잠시 생각을 고르더니 한숨에 써내리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마음속에 생각해 둔 것이 있나 봅니다. 슬쩍 훔쳐보니 이면지 아래에 다람쥐를 그리고, 앙증맞은 인형 드레스를 끄적입니다.
"훔쳐보지 마. 아빠, 연이 자꾸 베껴 쓰려고 해."
언니가 한 팔로 자신의 이면지를 가리고는 동생을 노려봅니다.
"아니거든. 뭐 그리나 궁금해서 본 거라구."
"얘들아, 어차피 이따 발표할 거니까 애써 숨길 필요는 없어. 다만 질문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쓰면 되는 거야."
아이들이 고개를 파묻고 각자의 의견을 정리해서 쓰느라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중에 나 또한 휑한 이면지를 보고 고민합니다.
(뭐라 쓸까? 은근히 어렵네.)
이벤트를 마친 부지런한 아빠들이 카페에 먼저 올린 기발한 의견들이 떠오릅니다. 남과는 다른 의견을 써야지 하는 욕심이 커질수록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갑니다. 일단 손에 힘을 풀고 가쁜 숨을 내쉬고 내 의견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 봅니다. 대신에 그동안 내가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쉴 틈 없이 돌아가는 바깥세상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고, 지친 몸을 이끌고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숨이 차는 마스크를 벗고 환한 미소를 짓습니다.
"이제야 쉴 수 있겠구나. 휴우."
퍼뜩 떠오른 단어 하나를 이면지에 적습니다. '왜냐하면'이라 시작되는 이유까지 적고 나니 아이들은 이미 이면지를 채워 넣고 소곤거리고 있습니다.
"자, 이제 발표해 볼까? 먼저 언니부터."
솔은 자신 있다는 듯이 이면지를 들고는 씩씩하게 읽어 내립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고양이'입니다."
"왜냐하면 '보드라운 털같이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솔은 예전부터 고양이를 좋아했습니다. 골목길에서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의 꽁무니를 쫓아 어떻게든 쓰다듬으려 했지요. 아이의 품에 안겨 복슬거리는 몸을 부비대는 고양이처럼, 가족은 누군가 헐벗어 떨지 않도록 외롭지 않도록 따스하게 감싸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아이는 말합니다.
"언니 발표 잘하지? 이번에 연 차례야."
연이 따로 마련한 식탁 의자에 앉더니 목소리를 높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행복한 가족'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은 슬픔보다는 웃음이, 잿빛 우울보다는 화목이, 어색한 침묵보다는 떠들썩함이 넘치는 그런 가족이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아빠 또한 그런 가족이 되었으면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노력할 거라고 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발표할 차례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입을 떼려니 많이 어색하군요. 흠흠.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휴게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쉼터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의 품 안에서도 쉬지 못하고, 편히 잠들지 못하고, 숨 막히는 일상이 지속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바깥세상이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통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상황이어도, 가족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편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먼지 쌓인 갑갑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환한 미소를 짓는 아이들과 가식 없는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한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그날의 밥과 찬거리를 나눠 먹으며 허기를 채우는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티비를 보며 담소를 나누다가 편안히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힘을 잃을 것입니다.
각자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긴 장마가 지나가면 여름휴가철이 다가옵니다. 기나긴 피서 행렬을 따라 서울에서 양양, 부산 또는 목포까지 내려가는 동안 휴게소에서 한숨 쉬지도 못하고, 내내 운전만 해야 한다면 그보다 더한 중노동이 없을 겁니다. 정체 구간에서 쌓인 짜증이 폭발할 수도 있고, 피로를 견디다 못해 꾸벅 졸음운전을 할 수도 있습니다.
크고 작은 사고 위험에 노출되겠지요.
가족은 '휴게소'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걷고 달리는 동안, 가족이라는 휴게소에 들러 차오르는 숨을 고르고, 더운밥 한술 뜨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가벼운 스트레칭도 하고, 밤에는 눈을 붙입니다.
가족이라는 쉼 없이는 우리는 긴 여정의 반도 못 가서 지쳐 쓰러지고 말 겁니다.
오늘도 한 가족, 아내와 아이들이라는 보드랍고 따스한 품으로 돌아와 그 안에서 편히 잠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