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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빨래를 널고 개어요

아빠단 네 번째 이벤트

by 라미루이





밖의 공기를 잠깐만 들이마셔도 뜨거운 기운에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이 시간 즈음, 어슬렁대며 낮잠 기댈 자리를 알아보던 누런 얼룩 길냥이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대나무 평상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수런수런 대화를 나누던 할머니들은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기셨다.

거실 베란다의 건조대 살에 널어놓은 빨래들은 겉으로 보기에 빳빳하게 마른 것처럼 보이지만, 코를 가까이 대보면 꿉꿉한 냄새가 세제 향기와 섞여 있다. 바람이라도 선선하게 불었으면 여름 빨래가 잘 마를 텐데, 하늘에 흩어진 새털구름은 태양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못 내고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있다.

건조대를 살피면서 포개어진 양말과 귀퉁이가 접힌 수건을 바로 잡아 널어주고, 바닥으로 떨어져 구겨진 아이들 속옷을 바짝 당기고 탈탈 털어 정리한다.




며칠 전에 아이들과 함께 빨래를 널었다. 종종 아이들과 빨래를 나누어 널거나, 개어서 정리하는 걸 온전히 아이들 손에 맡기곤 한다. 공교롭게도 서울시 아빠단 네 번째 이벤트는 '아이들과 함께 빨래 널고 개기'였다.

드럼 세탁기에서 신나게 돌아가던 빨래 더미가 회전을 멈추고는 빨리 꺼내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새로운 빨래를 널기 위해 다 마른 묵은 빨래는 걷어서 빈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법.

건조대에서 걷은 잘 마른 옷가지며 수건들을 한 무더기 모아 반쯤 열린 통유리창 너머 거실로 던진다.

"얘들아, 빨래 널어야지."

"네, 아빠."

세탁조에 엉기고 설킨 빨래 더미를 풀어내 플라스틱 통에 담아 건조대 위에 통째로 쏟아붓는다.

하나하나 빨래를 널기보다는, 이렇게 한꺼번에 쏟아부어 여럿이 달려들어 너는 편이 일의 속도가 붙고 효율적이다. 'Y 자'를 닮은 건조대의 한쪽 팔 위에 수북이 쌓인 빨래 더미에서 양말이나 속옷 같은 자잘한 것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허리를 낮춘 아이들은 하나둘씩 떨어지는 자질구레한 빨래들을 건조대 아래에 널기 시작한다. 난 티셔츠나 하의, 수건 등 큼지막한 빨래들을 옷걸이에 걸어 정리하거나, 세탁기 위에 별도로 설치된 붙박이 건조대에 너는 식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얘들아, 빨래 탈탈 털어서 너는 거 알지?"

"네, 알아요."

"겹쳐서 널면 잘 안 마르니까 서로 거리를 두어서 여유 있게 널어야 한다."

자신의 핑크색 양말을 널던 둘째 연의 눈이 동그래진다.

"빨래도 너무 붙어 있으면 코로나 걸리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런 건 아니고. 너무 붙어 있으면 잘 안 마르거든."

"연, 다 알면서 왜 물어. 코로나는 사람만 걸린다고."

언니 솔이 까만 츄리닝 바지를 널다가 한 마디 톡 쏘아붙인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혹시나 해서.."

분위기가 서먹해지고 연의 부루퉁한 표정이 가시질 앉자, 난 둘을 떼어 놓기로 한다.

"솔, 너는 거실로 들어가서 마른 옷들 먼저 개고 있어. 이거 다 널고 개는 거 도와주마."

"응, 난 축축하고 젖은 빨래보다는 바삭하게 잘 마른 빨래가 더 좋아."

솔은 거실로 들어가 겹겹이 포개어진 옷가지 옆에 앉아 흰 양말 한 짝을 찾아 가지런히 겹친다.

양말을 돌돌 말아 올려 한쪽 끝을 뒤집어 동그랗게 감싸는 것이 어리바리하지 않고 제법 능숙하다.

(그동안 아빠가 옆에서 보여주고 가르친 보람이 있다.)


한편, 연은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빨래를 집어 올려 널고 있다.

양말은 양말끼리, 속옷은 속옷끼리, 두꺼운 빨래는 탈탈 털어서 두 칸에 연이어 널기까지,

연 또한 제법 숙련된 빨래 널기 기술을 선보인다.

"우리 연이, 빨래 너는 선수네. 선수."

언니와의 소소한 시비로 시무룩하던 연의 표정이 삽시에 밝아진다.

좀처럼 줄어들 줄 모르던,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 더미는 아이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 건조대에

오와 열을 맞추어 착착 널린다.

"연이 덕분에 빨리 끝냈네. 이제 들어가서 언니 빨래 개는 거 도와주자."

"아빠, 언니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일부러 천천히 개는 거 같아."


집안일은 좀처럼 빈 틈을 주지 않고 우리를 몰아붙인다.

젖은 빨래를 다 널었으니 이제는 다 마른빨래를 개어야 한다.

홀로 옷을 개고 있던 솔은 심심했는지, 양말 몇 켤레만 동그랗게 말아 놓고는 빨래를 뒤적거리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수건과 양말은 주인 따라 나누어서, 옷도 마찬가지로 임자를 따져서 따로 모아둔다. 그래야 각자의 옷장이나 수납장에 들어갈 때 정리하기 편하니까.

"얘들아, 아빠 군대 가서 기억나는 첫 번째가 시냇물에 빨래하고, 너는 거랑 개는 거였어."

"군대에는 세탁기가 없어?"

철원 6사단 신병 훈련소에서 그날의 훈련을 마치고 시냇물로 몰려가 알몸으로 목욕을 하고, 땀에 젖은 빨래를 해치우던 기억이 떠오른다.

"응, 입대하고 두 달쯤 지나서는 세탁기가 생겼는데, 그 이전에는 없었어."

"우와, 고생했겠네. 아빠."


벌거벗은 훈련소 동기들과 각자가 해치운 빨래 더미의 양 끝단을 단단히 휘어잡고, 연거푸 비틀어 돌려가며 물기를 바짝 짜내던 그 여름날, 이름 모를 계곡은 아직도 맑은 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는지..

일렬로 늘어선 관물대에 정리하는 속옷과 양말은 모나미 볼펜 너비로 각을 잡아 일사불란하게 수납해야 한다고, 뭣도 모르는 훈련병들을 윽박지르던 눈빛 서늘한 그 조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휘날리는 진녹색 군용 이불 수십 장을 걷어 내려 마주 보는 양 귀퉁이를 잡고, 위에서 아래로 팡팡 소리가 나도록 먼지를 털어 내리던 그 연병장은 오늘 얼마나 달아오를지..

"아빠, 이제 다 갠 거 같은데.."

"그, 그래."

잠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던 난 주위에 보기 좋게 정리된 옷가지와 수건을 바라보며 미소를 띤다.

이들을 각자의 옷 칸에 나누어 차곡차곡 수납하는 건 아내의 몫이다.

"얘들아, 수고했다. 이걸로 아빠단 네 번째 이벤트도 끝!"

"아빠 그럼 또 선물 받는 거야?"

"언니야, 저번에 아빠단 이벤트로 인절미 빙수 먹은 거 엄청 맛있었는데. 그렇지?"

"또 먹고 싶다. 으흐흐."

"이벤트를 잘 끝내야 선물을 받는 거지. 다른 아빠랑 아이들 빨래 개는 거 영상 올린 거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

"우리도 이 정도면 열심히 한 거 같은데. 연, 안 그래?"

솔과 연은 서로 눈길을 맞추며 찡끗 웃는다.




시간이 흐른 후에, 아이들은 몰라보게 훌쩍 자란 자신의 빨래를 개키며, 아빠와 함께 빨래를 널고 개던 그날을 종종 떠올릴까? 아이들은 그날을 어떠한 분위기로, 어떤 느낌으로 기억을 할까?

엄마가 된 아이들은 아빠가 잔소리처럼 건넨 빨래 널기와 개기에 대한 ''를 잊지 않고,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넌지시 알려주는 건 아닐까?


"이렇게 탈탈 털어서, 팽팽하게 당겨서 널면 빨래가 구겨지지 않고 빨리 마른단다."

"티셔츠를 앞면이 보이도록 돌돌 말아서 개면, 옷장에서 고를 때 고민도 덜하고 꺼내기편할 거야."

"엄마는 빨래 이렇게 널고 개는 거 누구한테 배웠어?"

아이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빠와 나란히 앉아 빨래를 접어 층층이 쌓아 올리던 그날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답할 것이다.

"엄마의 아빠. 그러니까 너희들 할아버지한테 배운 거야."


방금 빨래를 뱉어낸 세탁기의 물기 어린 투명창에 비친,

누군가의 얼굴이 어른대더니 이내 사라진다.


아이들과 빨래를 널고 개면서 이런저런 대화도 나눌 수 있어요. 차곡차곡 쌓이는 빨래처럼 쉬이 사라지지 않는 추억 거리를 쌓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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