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이 젤리 만들기 키트와 8282 보드 게임이 포함된 첫 집콕 박스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하나의 꾸러미를 선물 받은 것이다.
재차 변이되어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델타 바이러스로 인해 집에 틀어박힌 아이들을 잠시라도 배고프거나 심심하게 놔두지 말라는 서울시의 사려 깊은 배려라 여기며 박스를 개봉한다.
간단한 메모와 함께 동봉된 초코 브라우니 믹스와 슬리핑 퀸즈 보드 게임이 모습을 드러낸다.
슬리핑 퀸즈는 이미 아이들이 즐겨 플레이하는, 소장하고 있는 보드 게임이지만 기존 카드가 많이 구겨지고 낡아서 여분으로 교체할 요량으로 남겨 두기로 한다.
"아빠, 우리 배고픈데.."
"이거 지금 만들면 안 될까?"
솔과 연이 또릿또릿한 눈빛으로 다가오더니, 고픈 입을 한껏 벌려 재잘댄다.
마침 오후 5시를 향해가는, 뭔가 애매하게 허기가 지는 '점저' 타임이 다가오는 지라 간식 삼아 브라우니를 만들기로 한다.
만드는 법은 박스 뒤에 적힌 레시피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대로 따라 하면 재미가 없으니 기존 조리법을 약간 비틀어 응용해 본다.
우선 브라우니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죽이 기본이다. 널찍한 스텐볼에 개별 포장된 브라우니 믹스와 코코비트 초콜릿을 한데 풀어 넣고 반 컵 정도의 물을 부어 준다. 아이들에게 고무 주걱이나 거품기를 쥐어 주고 밖으로 튀지 않게 저어 주라고 말하니, 알아서 일사천리로 반죽 만들기가 진행된다.
아이들은 비슷한 베이킹 작업을 몇 번이나 해봤는지라 믹싱볼을 한 손으로 단단히 맞잡고는, 서로의 손이 겹치지 않게 영역을 반으로 나누어 고무 주걱으로 휘젓는다. 예전에 집에서 베이킹을 할 때는 아이들의 휘젓는 힘이 균형이 맞지 않아 덜 섞인 반죽이 이리저리 튀거나, 믹싱볼이 한쪽으로 기울거나(심하면 엎을 때도 있었다), 손이 엉켜 꼬이는 바람에 자매간에 어이없는 다툼으로 번지는 경우가 잦았다.
이제는 제법 능숙한 솜씨로 되직되직하게 반죽을 매만지고 돌리더니, 그릇 가장자리에 묻은 부스러기까지 가운데로 쓱쓱 모아 동그란 볼 형태로 다져 놓았다.
"아빠, 다 된 거 같아."
"오, 꽤 잘하는데. 뒷정리도 말끔하게 하고 말이지."
어찌나 얌전히, 신중을 기하여 반죽을 주물렀는지 식탁 위에 반죽 찌끄러기 하나 떨어지지 않고 주변이 깨끗하다.
"이렇게만 구우면 뭔가 심심하니까 이것저것 섞어 볼까?"
"좋아요!"
얼마 전에 마트에서 지른 믹싱 넛이 떠올라 싱크대 아래 숨겨둔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꺼내 온다.
통 안에서 호두와 아몬드, 캐슈너트, 커피 땅콩 그리고 말린 바나나까지 한 줌 덜어내 완성된 반죽에 아낌없이 고루고루 뿌려준다.
"얘들아, 한데 뭉치지 않게 골고루 섞어줘."
"응, 바나나 과자 들어가면 더 맛날 거 같아."
무더운 날씨 탓에 크림이 녹을까 봐 냉장고 깊숙이 쟁여 놓은 오레오 쿠키까지 꺼내 잘게 부수어 넣어 볼까 했지만, 단 맛이 과할까 싶어 그만 두기로 한다.
솔과 연이 번갈아 휘젓는 고무 패스출러 한 쌍이 연거푸 큰 원을 그리자, 거뭇한 초콜릿 반죽은 좀 더 꾸덕한 질감으로 뭉쳐진다.
"그만하면 반죽은 완성된 거 같은데.."
브라우니 반죽을 구워 낼 차례다. 레시피대로 하면 전자레인지에 넣어야 하지만, 수분을 날려 바삭한 식감을 내기 위해 에어 프라이어를 이용하기로 한다.
베이킹 용기에 종이 포일을 깔고 만들어진 브라우니 반죽을 고무 주걱으로 덜어 모양을 잡아 준다.
이제 시간을 두고 천천히 구워 내면 끝.
170도로 예열한 상태에서 20분 정도 구워 주기로 한다.
앞면 LCD 패널 하단의 동그란 '시작' 버튼을 터치하자 위잉 소리를 내며 내부의 팬이 돌아가는 에어 프라이어.
아이들은 그 틈을 못 참고 반죽을 덜어낸 믹싱볼에 덕지덕지 묻은 초콜릿 반죽을 주걱으로 긁어 핥아먹느라 정신이 없다.
"얘들아, 설익은 밀가루 많이 먹으면 배 아프다. 적당히 먹었으면 하는데.."
아이들은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이 냠냠 쩝쩝, 혀를 날름대며 입가가 거메지도록 초코 브라우니 핥기 삼매경에 빠졌다.
"뚜우 뚜우 뛰이이!"
요란한 비프 멜로디와 함께, 에어 프라이어가 쉴 새 없이 열풍을 내뿜던 팬의 회전을 멈춘다.
"아빠, 막 구운 빵 냄새가 나."
빵집에서 막 구워낸 브라우니의 달짝지근하면서도 고소한 내음이 집 안을 가득 채운다.
에어 프라이어에서 베이킹 용기를 조심스레 꺼내어 브라우니를 살짝 뒤집어 보니 안에까지 잘 익었다.
"얘들아, 완성이야!"
"아빠, 한 조각만 먹어볼게."
"나도 나도, 한 입만.."
"곧 저녁 먹어야 하니까 조금만 덜어주마."
아이들에게 한 조각씩 덜어 주고, 나도 포크를 들어 한 조각 떠서 맛을 본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질감에, 입에 넣으면 달큼하고 쫀득한 맛이 퍼지는, 간혹 씹히는 다양한 견과류가 넘치는 단맛의 지루함을 잡아준다.
"음, 맛있네!"
브라우니만 먹기에는 입이 심심하여 아이들에게 흰 우유를 반 잔씩 따라준다. 난 점심 식후 졸음을 달래기 위해 진하게 우려낸 홍차를 곁들이니 딱이다.
"이렇게 직접 만들어 먹으니 더 맛있네."
"응, 아빠랑 함께 만드니까 더 달콤하고 맛있어."
애초에 한 조각만 덜어 먹기로 했건만, 아이들이 간절한 눈빛으로 조르다 보니 큼지막한 브라우니는 벌써 반토막이 나 버렸다. 아이들에게 배불리 저녁 먹이려던 계획은 진즉에 틀어졌다. 굵직한 인생사뿐만 아니라, 소소한 일상 또한 계획대로 착착 맞아떨어지는 건 좀체 드물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한 마디로 글러 먹은 거지.
밥솥 안의 묵은 밥이 슬슬 쉰내를 풍기고, 바닥에 눌린 밥알이 뭉근히 녹아내리는데 이를 어쩌나 싶다.
하는 수 없지. 이 더운 날씨에 그나마 오래 버티려면 밥알을 코팅하듯 볶는 수밖에..
냉장고에 볶음밥 재료로 넣을만한 게 뭐가 있더라. 냉동실에 얼려둔 비엔나소시지에 야채칸의 채 썰고 남은 양파, 조각난 파프리카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머릿속이 얽힌 타래실처럼 복잡해지는 가운데 아이들이 다가와 눈치 없이 말을 건다.
"아빠, 슬리핑 퀸즈는 언제 할 거야?"
"오늘 받은 새 거 뜯어서 플레이해도 될까?"
"새 보드 게임은 아직 뜯지 마. 슬리핑 퀸즈는 너희들 공부 다 마치고 나서 하는 거야. 알았지?"
아이들은 다소 실망한 눈치로 뒤돌아 자신의 책상에 앉아서는, 책이며 알림장, 받아쓰기 공책을 뒤적인다.
난 말없이 식탁에 털썩 주저앉아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브라우니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는다.
무거운 눈꺼풀이 저절로 스르륵 감기고, 온몸을 휘감은 긴장이 나른하게 풀린다.
머릿속을 채운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달콤한 초콜릿과 함께 사르르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저녁은 이걸로 패스. 오늘 먹을거리는 브라우니로 끝. 아내가 밤에 돌아오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음냐.)
끈덕하게 달콤하게 물고 늘어지는 한여름 오후의 꿈에 젖어 허우적대던 난, 더 이상의 부질없는 반항을 멈추고 식탁에 엎드려 이른 잠에 들었다. 온종일 맹렬한 기세로 불타오르던 태양이 마지막 불꽃을 사르는가 싶더니 짙은 보라색으로 물든 구름 아래로 천천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