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에 노출된 페트병에 담긴 생수는 부글부글 끓어오를 지경이고, 자리가 부족해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한 우유 팩은 팽팽히 부풀어 건드리기만 하면 펑하고 터질 것만 같다. 빨래 널기엔 최상의 날씨다. 젖은 빨래를 널면 불판 위에 올린 생고기처럼 지글지글, 실시간으로 달구어지고 마르는 걸 지켜볼 수 있다. 하루에 세 번 세탁기를 돌려도 빨래 걷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다.
무더위에 질려 혼미한 정신을 깨우려 찬물 세수를 하려 해도, 개수대에서 쏟아지는 물은 어딘가에서 데워진 것처럼 미지근하다. 인적이 드문 아스팔트 도로를 잠시 걷다 보면 중앙아프리카와 예멘, 오만 같은 중동 끝자락의 이글거리는 사막을 걷는 듯한 황량한 기분마저 든다.
비 한 방울이라도 흩날릴, 일말의 여지도 없이 오직 붉은 태양만이, 실낱 같은 구름마저 삽시에 증발시키고 푸른 하늘 위에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체감 상으로는 깨어있는 대낮보다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야간이 더 견디기 힘들다. 24시간 오픈하는 한증막 안에 자리를 펴고 누운 것처럼 답답하고 숨 막힐 지경이니..
그나마 하루 종일 돌아가는 에어컨이 적정한 실내 온도를 유지시켜 주기에, 살인적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2021년의 여름 한복판을 어떻게든 정면 돌파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실내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거나, 불행하게도 고장이 난 상황이라면 이번 주 내내 지속되는 불볕더위에 백기를 들고 냉방이 잘 되는 호텔이나 숙소를 찾아 온 가족이 도피했을 것이다.
5번째 서울시 아빠단 이벤트는 '가족애'를 느꼈던 경험에 대해 아이들과 함께 글을 써보는 것이다.
최근에 서로의 사랑과 관심을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 거창하지 않은 사소한 경험이라도 짧은 글로 일단 옮겨 본다. 솔과 연에게 이면지와 펜을 건네 주니 잠시 고민하다가 한 문장 한 문장 덧붙여 적는다. 연은 중간에 뭔가 아니다 싶었는지, 공들여 쓴 문장 하나를 통째로 지우고 지면을 다시 채우기도 한다.
나 또한 최근 아내와 아이들의 사랑과 보살핌을 경험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기록해 본다.
식탁에 마주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이면지를 채워 나가던 아이들은 "다 했어요." 하고 고개를 번쩍 든다.
"얘들아, 그냥 적기만 하면 의미가 없으니, 간단히 발표하는 건 어떨까?"
"음, 부끄러운데.."
"가족들도 다 알고 있는 경험일 듯한데.. 아빠도 너희들 발표 마치면 짧게 발표하려 하거든."
"알겠어요."
쭈삣대고 망설이던 솔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면지를 들고 첫 문장을 읽는다
"난 얼마 전에 엄마가 손가락을 다쳐 피가 나는데도 음식을 만들어줄 때, 가족의 사랑을 느꼈어요."
"어, 나도 그거 적으려다 말았는데.."
연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 빛내며 맞장구를 친다.
"아빠도 똑같이 적은 거 아니에요? 어디 봐요."
아이들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내가 적은 이면지를 들여다본다.
애써 확인할 필요도 없다.
"우리 셋이 마음이 통했나 보네."
며칠 전, 소파에 주저앉은 아내가 피가 흐르는 왼손 엄지를 움켜쥐고, 멍하니 전원이 꺼진 티비 화면을 바라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내는 얼마 전에 음식을 자동으로 다져주는 전동 기구를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아이들이 꺼려하는 오이, 양파, 당근 같은 야채들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갈아주고, 여름철에 즐겨 먹는 얼음 빙수를 손쉽게 만들어 준다는 만능 요리 머신을 지른 것이다.
지금껏 전자레인지와 에어 프라이어로 온 가족의 먹을거리를 충분히 감당하고 있었는데, 어떤 연유로 새로운 기기를 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또 한 번의 코로나 전파로 인해 아이들이 오래 집 안에 머무르게 되자, 위기 상황에 하루 몇 끼니라도 몸에 좋은 걸 먹이겠다는 모성애가 발동한 것이리라. 그 다지기 머신은 곱게 갈린 야채와 과일을 넣어 아이들이 즐겨 먹는 오픈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고, 굴 소스가 들어간 볶음밥도 해주는 등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했지만..
문제는 원통형 용기 안에 장착되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아가는 칼날이었다.
난 날카롭게 벼린 맹수의 발톱이 달린 듯한 그 칼날을 탈착하여 조심스레 씻어낼 때마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피를 볼 것만 같은 섬뜩한 예감이 들어,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수납장 깊이 숨겨두곤 했다.
한 이틀 전이었나. 아내가 토막 낸 야채를 다지다가 생각대로 잘 안 갈리는지 분쇄기 내부를 살피는 중이었다.
"아앗!"
갑자기 그녀는 자신의 왼손 엄지를 움켜쥐고는 사색이 된 얼굴로 거실로 물러나서는 소파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엄마, 어디 다쳤어?"
말없이 고개를 흔드는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솔과 연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한숨 돌린 아이들이 식탁으로 돌아가자 난 소리를 낮춰 조용히 물었다.
"어디 봐봐. 응급실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아. 일단 지혈해 보고.."
"연고라도 발라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그녀는 안방을 턱으로 가리키며 입을 연다.
"옷장 서랍에 밴드나 갖다 줘. 아이들 다쳤을 때 붙이는 그 밴드 알지?"
알다마다. 얼마 전에 연이 밖에서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도 그 밴드를 잘라서 붙였었지. 아마도..
주방 가위로 말랑한 질감의 밴드를 적당한 사이즈로 잘라 아내에게 건네준다.
"그 칼날.. 언젠가 사고칠 거 같더라니. 보기만 해도 뒷골이 섬찟하더니만.."
아내는 별다른 대꾸 없이 창백한 낯빛으로 거실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본다.
주방 한켠에 작동을 멈춘 믹서기가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수그린 채,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그 내부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주문처럼 들려온다.
위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 송곳니 여럿은 기어코 아내의 피를 묻히고는, 자신은 파괴와 절단을 일삼는 본분에 충실했을 뿐,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며 본 사건에서 결백함을 주장한다.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찢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멈추었다.
그녀는 자신의 엄지 끝을 네모나게 자른 밴드로 꼼꼼히 감싸고는 주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다시금 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분쇄기의 뚜껑을 힘껏 누르고는, 가족의 한 끼니를 식탁에 올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코로나가 휩쓰는 한반도를 기록적인 폭염이 연이어 덮치는 가운데, 결국 온 가족을 버티게 하는 건 식탁 위에 올려진 한 끼니라는 걸 알기에..
그 끼니를 차리기 위해 필요한 건,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녀는 자신의 피를 머금은 칼날의 회전을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날, 엄마가 만들어준 감자 샐러드에 내가 싫어하는 오이랑 양파 들어간 거 알고 있었거든."
"언니, 빨갛고 노란 파프리카도 조그맣게 숨어 있었어."
아이들은 식탁에 그날의 샐러드가 다시 차려진 것처럼 말한다.
"아빠 기억으로는 그 샐러드, 너희들 남기지 않고 다 먹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 전엔 절대 안 먹었거든. 근데.." "맛있더라고. 토할 거 같은 역한 맛도 안 나고.."
"그럼 엄마가 손가락을 다쳐가면서 만들어준 건데.. 야채를 가린다고, 낯익은 맛이 아니라고 꺼려하면 엄마가 얼마나 서운하겠어. 안 그래?"
"응, 앞으로는 잘 먹을 거야."
"그나저나 이면지에 몇 가지 더 적은 거 같던데.. 가족의 사랑을 느낀 경험 더 없을까?"
"아빠는 그런 경험 없어요?"
아이들의 반문에 말문이 턱 하고 막힌다. 가족의 사랑을 느낀 적은 많지만, 이를 글로 옮기고 아이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건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낯설면서도 멋쩍은 경험.
손발이 오그라드는 어색함이 온몸을 휘감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우리 아이들이, 가족들이 내 의견을 궁금해하는데 체면을 따지고 권위를 내세우고 무뚝뚝한 자세로 대화의 흐름을 끊을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든 용기를 내봐야지.
"많지. 너무 많아서 이면지에 적어 내려가다가는 넘칠 지경인 걸. 엄마가 손가락 다쳐가면서 식사 준비한 것부터 해서.. 너희들이 아끼는 과자나 아이스크림 먹기 전에 아빠도 먹으라고 권할 때도 가족애를 느낀단다. 또 번갈아 다가와서 아빠 힘들지 않냐고 어깨나 목덜미를 주물러 줄 때도 고맙고.. 누군가 밖에서 들어올 때 어지럽지 말라고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너희들을 볼 때도 사랑을 느낀단다. 그밖에도 말이지.."
아이들은 그렇게나 많이?라는 표정으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미처 이면지에 적지 않은, 소소한 경험까지 떠올리다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듯하여 다음 기회에 정리하기로 한다. 다음에는 또 어떤 따뜻하면서 포근한 경험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가족 간의 우애를 더 끈끈하게 만들어 줄지 기대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