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봄까지만 해도
아이가 동동거리는 발걸음으로 배꼽 움켜쥐고
응가 마렵다고 한 칸 화장실 틀어 박히면,
벽 너머 언니야 엄마 아빠까지
어엿한 가족들 멀쩡히 살아 숨 쉬는데
- 있지요, 있죠? 거기 있는 거 맞죠?
생사 확인 겸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온 집안 똥내 퍼진다고 문 좀 닫으라 잔소리를 해도
아이는 빼꼼, 열린 문 틈으로 콧구녕 내밀고는
킁킁, 냄새 안 나거든요 뱉고는 새침한 표정으로
양변기 앉아 두 다리 오락가락, 만화책을 읽는다
주위가 사뭇 조용해지면
점점 벌어지는 문틈 사이로 아이는 주문처럼
엄마 있죠? 아빠 잇쪼? 를 다시 외친다
한 집안에 옹기종기 모여 뭐가 그리 무섭고 두려운지,
눈치도 없이 백주대낮에
뱅뱅 도는 환풍기 날개 사이
거꾸로 낙하한 무당거미 허공에 낱줄 걸었는지,
아이의 뒤통수 비추는 거울 선뜻 돌아보니
긴 머리 풀어헤친 소복녀 흘기는 외눈깔 마주쳤는지,
아니면 변기 물 내리는 암굴 거슬러 올라온
우둘투둘한 두꺼비, 부리한 눈 떠올라 꾸룩 울었을까,
갑자기 아이는 겁에 질려 끄아악!
된소리를 내질렀다
- 무슨 일이야? 바퀴 벌레라도 나왔어? 아니면 모기..
부리나케 달려와 벌컥 문을 연 아빠의 눈에
앉은뱅이 아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손에 쥔 책을 팽개치듯 건넸다
- 이 책 엄청 무서워요 다시는 안 읽을래.
아빠는 그 책의 표지를 훑어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 또또 신비 아파트, 아빠가 읽지 말랬지.
저번에 읽고서 잠 설치다 깨서 울고불고 난리였잖아.
- 전에는 꿈에 마고할망이 나와서..
- 지금은 왜 그런 거야?
- 중간에 변소 귀신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그만..
- 당분간 신비 아파트 접근 금지, 변기에 앉아서는 독서도 금지야.
아이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빠를 올려본다
- 근데 아빠, 그리 마렵던 똥이 도로 쑥 들어갔나 봐요.
- 어이구야, 조금만 더 앉아 있어.
아이는 한참을 변기에 앉아 울그락불그락 달은 얼굴로
배배 몸을 똬리 틀고 끄응가 힘을 주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은 큼지막한 구렁이 똥을 풍덩,
수면 아래로 떨구었다
아빠는 초록 도깨비가 활개를 치는 그 책을 임시 금서로 정했고 집 어딘가에 고이 숨겨 두었다
2.
그러던 아이가 계절이 바뀌면서 글쎄..
화장실에 홀로 들어가도 있죠 있지요, 애타게 누구를
찾지도 부르지도 않고 냄새 새어 나오게
문을 열지도 않고 의젓하게
오래도록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빠는 뭔가 허전한 마음에 부러 문을 살짝 열고
- 우리 딸 잘 누고 있어? 뭐 필요한 건 없고?
- 없거든요, 아빠?
아이는 얼음 공주처럼 대꾸하더니 문을 꽝 닫아 버린다
그새 자랐나 싶어 꽁꽁 얼어붙은 문에서 멀어지던 아빠는
홱 몸을 돌려 살금살금, 까치발로 돌아간다
잠시 숨을 멈추고는 스위치를 딸깍,
화장실 불을 화악 꺼 버렸다
- 꺄아악, 누가 불 껐어? 아빠지? 다시 켜라고요!
- 어어, 잠깐만. 이거 정전된 거 같은데. 아파트가 왜 이래? 스위치가 어디 있더라..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가 이내 붉은빛이 감싸는 화장실, 아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사색이 되다시피 했다
얼음물을 벌컥이다 연신 터지는 딸꾹질처럼
있죠? 있지요? 아빠 있는 거 맞죠?
다시금 터지는 아이의 부름에
아빠는 회심의 미소를 뒤로 감추며 답한다
- 아빠, 여기 있어 걱정 마.
- 다시는 불 꺼지게 하면 안 돼.
- 알았어, 아빠가 여기서 지켜줄 테니까..
문도 이만큼 열어 둘까?
- 조금만 더 열어도 돼, 아빠.
당최 닫힐 줄 모르는 여닫이 문의 경첩은 점점 더 벌어진다. 끄응아,
진땀을 빼는 아이와 서성이는 아빠의 눈이 종종 마주치고, 집안을 메우는 구수한 메주 쑤는 냄새는 가실 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