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추억을 되새김하기 위해 굳이 번거롭게, 곳곳에 흩어진 과거 사진을 뒤적거리지 않아도 된다. 때에 맞춰 시의적절하게, 찾을 법한 사진을 갈무리해 척하니 보여주는 스마트한 세상이 되었으니.
2016년 6월 25일. 오늘만큼 무더운 날. 가까운 공원에 솔이 친구의 엄마가 카트를 끌고 나타났다. 그 카트에는 묵직한 전분 한 포대가 실려 있었다. 그걸 뜯어서는 원형 간이 풀장 두엇에 나누어 흩어 놓았다. 거기에 근처 수돗가에서 공수한 물을 적당히 투입한다. 손으로 감싸 쥐어 올챙이 꼬리처럼 방울방울, 뚝뚝 흘러내릴 정도로 되직하게 전분 더미를 개어 놓으면 신나는 아이들 진탕 놀이터 오픈이다! 어린 솔과 연을 비롯한 아이들이 와아! 소리치며 풀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얼마 안가 아이들은 온몸에 전분 반죽을 뒤집어썼다. 흡사 목욕 후 바르는 베이비파우더 통을 실수로 터뜨린 것처럼, 거꾸로 뒤엎은 것처럼. 금세 아이들의 얼굴은 허예졌다. 세 살배기 연은 쭈그려 앉아 전분 범벅을 발바닥에 덕지덕지 바르더니 그 냄새를 맡기까지 했다. 솔은 아끼는 토끼 인형 '토토'를 가져와 진득거리는 풀장에서 함께 헤엄치고 물놀이하는 장난을 쳤다. 다른 친구들도 형형색색의 소꿉놀이 그릇에 모종삽, 양푼, 채반이며 거름망 등을 가져와서는 주변에 늘어놓았다. 아이들은 내 것, 니 것 따지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하얀 반죽을 쓸어 담고, 조물딱 거리고 정성스레 다듬었다. 짓궂은 누군가는 자신의 얼굴에 묻히는 것도 모자라, 곁의 친구들 뺨에 허연 그림을 그리고 손가락 자욱을 남겼다. 아이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 놀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중했다. 한낮의 무더위가 제법 선선해질 때까지 '전분 떡칠 놀이'를 마음껏 즐겼던 듯하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은 어렸고, 엄마 아빠들은 열정이 끓어 넘쳤다. 어찌하면 아이들을 즐겁게 해 줄까, 함께 어울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다 주저 없이 실행에 옮기던 시절이었다. 그날 저 놀이를 마치고도 몇몇 아빠들은 허옇게 들뜬 아이들을 쫓고, 반대로 쫓기는 '잡기 놀이'를 즐겼다. 흥분한 아이들은 친구 아빠의 셔츠 자락을 늘어져라, 끌어당기고 줄지어 매달렸다. 공원의 맨바닥에 눕다시피 뒹굴다시피, 끈덕지게 아빠들의 꽁무니를 뒤잡았다. 그들을 잡도리할 것처럼 사력을 다해 따라다녔다. 솔과 연도 마찬가지였다.
대호 아빠 잡아라! 미끄덩 빠져나가는 뱀꼬리를 잡듯, 뱅글뱅글 돌아가는 아이들의 떠들썩한 외침이 공원을 가득 채웠다. 기진맥진한 아빠들이 털썩, 나동그라진 후에도 아이들은 지치지 않았다. 지켜보는 우리들이 없었다면, 순백의 망토를 두른 아이들은 지상을 박차고 올라 그대로 저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들은 티 없이 맑음, 그 자체였다.
이후엔 근처 개울물로 달려가 도롱뇽 알을 찾는다고 법석을 떨었다. 졸졸 흐르는 물가에 뛰어들어 큼직한 돌을 들어 올리면 깜짝이야, 올챙이 몇 마리가 쏜살같이 달아나기도 하고 그랬다. 운이 좋으면 말캉한 점액질에 둘러싸인 줄줄이 도롱뇽 알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엄마, 이거 집에 가져가서 기르면 안 돼? 도롱뇽 키우고 싶어. 위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못내 아쉬워하는 아이들. 여간 실망한 눈치가 아니다. 도롱뇽 엄마가 애지중지했을, 무엇보다 소중했을 그 알들은 아이들의 손을 떠나 원래 은신처로 돌아갔다. 날이 어둑해졌다. 밤새 이어질 것 같던 아이들의 초여름 축제도 어느새 끝이 다가왔다. 몇몇 아이들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도 그럴 듯이 맨살이 훤히 드러난 아이들은 배곯은 사나운 산모기의 주 목표였으니까..
팔뚝에 목덜미며 넓적다리를 긁적이며 울상인 아이들이 속출했다. 이내 아이들의 피부가 벌겋게 부어오르고 단단해졌다. 인정사정없는, 독기 오른 산모기의 물어뜯음은 버물러 같은 약발도 통하지 않았다. 그네들은 어찌 철 모르는 애기들 여린 살만 노린단 말인가? 일체의 자비를 모르는 모기들도 한 점 양심은 있는지, 아이들의 얼굴이며 눈두덩이 근처는 건들지 않았다.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이미 엄마 아빠들은 난장판이 된 공원 바닥을 물청소하고 뒷정리를 마친 후였다. 그들은 엄청 배고파, 무지 졸려, 내일은 뭐하고 놀 거야?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나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솔과 연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에 허연 발자국을 연이어 남기는 아이들을 보고 기겁했다. 당장 욕조로 들어가지 못할까, 한바탕 잔소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솔과 연은 허여멀건 서로의 얼굴을 보고, 투명한 거울에 비친 우스꽝스러운 둘의 모습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엄마, 아빠. 우리 피에로 닮지 않았어? 아니, 너희들은 천사야. 하늘에서 막 내려온 날개 돋은 천사라고.. 아내와 난 노곤했지만 따라 웃었다. 우리 또한 낯짝이며 머리칼에 두껍 분칠 한 것처럼, 희뿌연 녹말가루가 띄엄띄엄 내려앉아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