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돌보느니 차라리 파밭을 매겠다 #2

by 라미루이










솔은 아빠가 앞서 걸어가자 길가로 붙어서는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심은 수목들을 어루만지며 걸었다.

아직 물이 오르지 않은 성마른 나뭇가지는 힘을 주면 부러질 듯했지만, 새로이 돋아난 잎새는 촉촉하기 그지없어 아이의 부드러운 손과 다를 바 없었다.

아이는 길가에 피어난 핑크빛 진달래며 철쭉의 여린 꽃잎을 만져보다가는, 코를 내밀어 향기를 맡다가 이내 주변에 꿀벌들이 어른대며 윙윙거린다는 걸 알아챘다.

"무, 무서버!"

솔은 기겁하며 머리 위로 두 손을 올려 감싸고는 걸음을 빨리하여 아빠를 뒤쫓는다.

아빠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더니 손짓을 하여 따라오라고 재촉한다.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그렇지."

아빠가 시선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순간, 아이는 땅바닥에 동그란 검붉은 열매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음을 알아채고 가까이 다가가 줍기 시작했다. 주변에 버찌 나무 아니면 '개동청 나무'가 심어져 있던 걸까.

(귀여워. 빨간 초콜릿 볼처럼 생겼네. 맛보면 아빠한테 혼나겠지.)

너 알을 손에 쥔 솔은 망설이다가 아빠가 안 보는 틈을 타 재빨리 입에 한 알을 넣어본다.

(으음.)

즐겨 먹는 해바라기 씨앗 초콜릿과 매끈한 질감은 비슷하지만 이건 혀끝에서 녹아들어 달콤한 맛이 스며들 기미가 안 보인다. 아무리 입안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공굴려봐도 여전히 딱딱할 뿐.

(한번 깨물어 볼까.)

아이는 어금니 사이에 열매를 두고 앙 힘을 주려다가 마음을 돌려 손바닥에 도로 뱉어낸다.

그때 몇 발치 앞서가던 아빠가 자신을 뒤돌아보더니 손바닥 위의 열매에 시선이 머무르는 게 아닌가.

(이걸 먹었다는 걸 알면 아빠가 혼낼지도 몰라.)

솔은 황급히 침이 잔뜩 묻은 열매를 숨긴다는 게 그만,

자신도 모르게 왼쪽 콧구멍을 쑤시고 있는 걸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아빠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성큼성큼 아이에게 다가왔다.




난 겁에 잔뜩 질린 아이의 손바닥에 놓인 산수유와 비슷한 열매 몇 알을 바라보았다.

"방금 주운 거니? 아빠 눈엔 안 보이던데."

솔은 단순히 땅에 떨어진 열매를 주웠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이가 두려워하는 뭔가가 더 있다. 이 열매로 대체 무슨 장난을 친 거니.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봐.

"아빠가 야단 안 칠 테니 숨기지 말고 얘기해 봐. 솔아."

낯빛이 하얘진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부답. 당차게 묵비권 수행 중이다.

하산하는 인파 속에 까무잡잡한 사내아이가 날 바라보며 헤벌쭉 웃으며 지나간다.

당당하게 덕지덕지 때가 묻은 애끼손가락으로 자신의 콧구녕을 깊이 쑤시면서..

불길한 예감이 나와 아이 사이를 스쳐간다. 이런 느낌은 매번 틀리지를 않는데. 어쩌지.

"너 혹시, 그 열매를 콧구멍에 넣었니?"

아이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동그란 눈이 글썽 해지며 금방이라도 폭포처럼 쏟아질 듯하다.

"아빠 말대로 그런 거니? 정말로."

솔은 손바닥에 담긴 열매를 와락 버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난 재빨리 아이의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양쪽 콧구멍을 번갈아 살핀다. 빛이 통하지 않는 깊은 동굴 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고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갓난아기 때부터 (누굴 빼닮았는지) 유난히 콧구멍 쑤시는 걸 좋아하더니 기어코 이런 사달이 터지는구나.

어이구, 속 터져. 신나게 놀고 와서 집에 돌아가는 중에, 이게 무슨 지랄 염병할 마무리란 말인가.

난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켜고는 다시 한번 아이의 벌름한 콧구멍을 들여다본다.

길가에 멈춰 선 우리를 사이에 두고 홍해처럼 갈라져 내려가는 등산객들이 뭔 일인가 하고 쳐다보며 수군거린다. 하지만 오가는 세간의 이목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쪽이니. 아니면 오른쪽? 열매 넣은 구멍이 어느 쪽이니? 손으로 가리켜 볼래."

솔은 망설이다가 한 손을 들어 왼쪽을 가리킨다.

플래시를 비춰보니 그쪽 콧구녕 중간쯤 오목한 위치에 빨간 열매의 일부분이 보인다. 깊이도 쑤셔 박았네. 어휴.

"아빠 따라서 한 번 숨을 내쉬어 볼까. 크응 하고 코로 숨을 내쉬는 거야. 알았지?"

자, 크응. 난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시고는 코로 숨을 크게 뱉어내는 시범을 보여준다.

곧이어 아이가 따라 한다. 하아, 흥, 흐응!

아아, 실패다. 아이는 코로 내쉬는 게 아니라 반대로 힘껏 들이마시는 게 아닌가.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열매는 들숨의 위력으로 어둡고 좁은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빨려 들어갔으리라.

"안 되겠다. 집에 일단 빨리 돌아가자."

관악산 입구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다. 하지만 겁에 질린 아이의 발걸음은 허둥대며 연신 꼬인다. 난 하는 수없이 아이를 번쩍 들어서는 목말을 태우고 집으로 내달렸다.

"헤헤헤, 큭큭."

내 머리 위에서 아이의 웃음이 들려온다.

"좋단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그래, 목놓아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게 낫지. 암, 그렇고말고.

기가 막힌 와중에 나도 슬며시 웃음이 터진다. 목말을 올라탄 아이가 내 덥수룩한 머리칼을 두 손으로 어루만진다. 그걸 용케도 콧구멍에 넣을 생각을 다 하다니. 대단하다. 그런데 한 알만 넣은 거 맞지. 설마..

어느새 집 근처에 다다랐다. 난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아파트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더 이상 불길한 생각은 하지 마. 항상 안 좋은 일은 엎친 데 덮치더라고. 안 그래?

허겁지겁 현관으로 들이닥친 우리를 보고 아내와 장모님이 나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내가 이런저런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아이의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눈가가 발개진다.

"어디 한번 보자. 할미가 한번 빼볼까?"

"아아, 아파."

장모님이 무릎을 꿇고 아이의 콧구멍을 잡아 늘여 들여다보지만 이미 열매는 저 안 깊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안 보여. 대체 얼마나 깊이 쑤셔 박았길래. 참나."

"오늘 동네 이비인후과 안 하나?"

"안 하지. 오늘 일요일이거든."

아내는 이마에 잠시 손을 대고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와 통화를 한다.

"거기, 중대 병원 응급실이죠? 혹시 아이의 코 안에 열매가 들어갔는데.."

잠시 후 통화를 마친 아내는 서둘러 소지품을 챙기더니 "가자, 중앙대 병원으로. 빼줄 수 있대." 하고는 신발을 신는다.

"엄마, 우리 응급실 다녀올 테니까 연이 좀 봐줘요."

"그려, 천천히 다녀와. 사고 나지 않게." 장모님은 둘째 연이 곤히 잠든 안방 쪽을 바라본다.

집에 들어와 신발도 벗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던 나와 솔은 아내를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차의 뒷좌석에 올라탄 솔은 옆에 나란히 앉은 엄마의 품에 안겨 눕다시피 한다.

"어, 엄마, 무서워. 병원 가면 주사 맞고 그런 거 아니지?"

"절대 아니거든. 엄마가 간호사 언니한테 주사 놓지 말라고 할 테니까 안심해. 알았지?"

"응."



잠시 후 중대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우리들은 서둘러 접수를 하고 대기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말을 맞은 응급실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몇몇 아이들이 자리 잡아 이미 치료를 받고 있다.

이 병원은 소아과 응급 진료를 받기 때문에 헬멧을 쓰지 않고 인라인을 타다가 넘어져 이마가 찢어진 아이, 집에서 동생이랑 장난치다가 서랍장 모서리에 찍혀 눈가가 째진 아이 등 다양한 케이스의 환자가 쉬지 않고 밀려든다.

"아빠, 여기 무서버. 집에 가고 싶어."

"그 열매는 빼고 가야지. 그거 계속 넣고 지낼 수는 없잖아. 눈 감고 기다려. 의사 선생님이 금방 꺼내 주실 거야."

"그래도.." 몸을 부르르 떠는 아이. 갑자기 자동 출입문이 활짝 열리며 어떤 아빠의 품에 안겨 들어오는 여자아이. 세게 넘어졌는지 양쪽 무르팍이 까져 벌건 피가 철철 흐르고 있다.

솔은 놀랐는지 시선을 돌리고 난 아이를 껴안아 등을 두드려 다독인다.

젊은 의사가 그 아이의 무릎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흉터 안 남게 아물려면 꿰매야 될 거 같아요. 마취는 할 테니 통증은 없을 겁니다. 이쪽 진료실에서 대기하세요."

절뚝이는 아이를 부축하고 옆에 선 아빠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무 말 없이 우리 쪽을 바라본다.

(우리는 저 정도 상처는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야. 아까 산에서 킁 하고 세게 숨을 뱉어냈으면 쏙 하고 그놈이 빠져나왔을 텐데. 반대로 들이마셨으니. 어휴, 이런 어이없는 일로 응급실 신세를 질 줄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어떤 의사가 다가오더니 따라오라 한다.

건물 2층에 위치한 어느 진료실 의자에 솔을 앉히더니 "어디 한번 볼까?" 하며 플래시를 비춰본다.

아이의 몸이 굳어지더니 금세 표정이 울먹해진다. "괜찮아. 그냥 보는 거뿐이야."

의사는 안심하라는 의미로 두 손을 펼쳐 보여주고는 살짝 웃어준다.

이윽고 아이의 머리를 뒤로 젖히고, 왼 콧구멍을 구석구석 살피는 그의 시선이 날카롭다.

"저어기 있네요. 빨간 열매."

그는 플래시를 끄더니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아빠는 아이 뒤로 와서 움직이지 않게 꼬옥 붙잡아 주세요. 잘못하면 다쳐요."

"네."

난 아이의 등 뒤에서 껴안듯이 양손을 뻗어 갈비뼈 아래에서 깍지를 끼고는 포박하듯 붙잡는다.

"자, 안 아프게 금방 끝낼 테니까 움직이지 마요. 눈 감고 편하게 있어요."

보아하니 그 의사는 이런 어이없는 응급 상황을 여러 차례 겪어본 듯 겁에 질린 아이를 다루는데 능숙했다.

아이가 눈을 감은 사이에 그는 뾰족한 침이 달린 시술 기구를 들더니 조심스럽게 코 안으로 향한다.

그의 손이 아이의 콧구멍으로 쑤욱, 들어가는가 싶더니 뭔가를 콕 찌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재빠른 손놀림이다. 은빛 철제 기구에 꽂힌 채 끌려 나오는 타원형 빨간색 열매가 콧물에 젖어 번들거린다.

"이놈이네요. 다행히 일찍 알아차려서 다행이네요. 어떤 아이들은 코 안에 이런 게 박힌지도 몰라서 며칠이나 지나서는, 염증이 생겨서 코가 땡땡 부어 올라서야 찾는 경우도 많아요. 허허."

"에고,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나와 아내는 십년감수했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연신 감사를 표한다.

아이도 그제야 딱딱하게 굳었던 눈매와 입가가 풀어지며 킁킁하고 콧숨을 연신 내뱉는다.

"엄마, 이제 숨쉬기 편해. 아까는 뭐가 꽉 막힌 것처럼 그랬거든."

"당연히 불편했겠지. 저 (망할) 놈이 숨구멍을 단단히 틀어막았으니. 쯧쯧."





밝게 웃는 솔의 손을 잡고 흡사 전쟁통과 같은 분위기의 응급실을 서둘러 벗어난다.

헤헤거리며 뒷좌석에 오르는 아이를 백미러를 통해 바라보며 나는 간절히 바란다.

부디 앞으로는 우리 가족들에게, 고통에 가득 차 이곳을 찾은 저들과 같은 불행한 일이 덮치지 않기를.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 품에 쓰러지듯 엎어져 잠든 솔을 곁눈질로 훑으며 오늘 벌어진 일을 언젠가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예감이 차오른다. 이왕이면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하지 않을까 하는 기시감 비슷한 이 느낌은 뭐지. 혹시나 그 글이 빛을 본다면 성인이 된 솔과 연 그리고 후에 태어날 손주들도 그날 벌어진 돌발적이면서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폭소를 터뜨릴지도 모르지.

돌이켜보면 실소를 머금을 가벼운 에피소드일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 그러니까 부모 입장에서는 두 번 다시 비슷한 상황을 겪어 보라 한다면 손사래를 치며 정색을 할 것이다. 더구나 삭신이 여기저기 쑤신 노년에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복장이 터질 수도 있겠다. 세월이 흘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여쁜 손주들의 재롱이 막을 내릴 즈음, 난 녹이 슨 호미를 거머쥐고 밖으로 나가 일할 채비를 마치겠지.

늘그막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사방팔방 날뛰는 아이들을 돌보느니, 차라리 끝이 보이지 않는 밭고랑을 돋우고 김을 매는 것이 무병장수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자고로 옛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게 하나 없다.

"외손주를 돌보느니 차라리 파밭을 매겠다"는 누군가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