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의 스포츠 페이지마다 도쿄 올림픽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아쉽게도 무릎을 꿇었거나, 악전고투 끝에 메달을 거머쥔 선수들의 프로필과 영상이 넘친다.
화면 최상단 좌측 헤드라인에 화제를 끌만한 오늘의 경기가 표시된다. 다행히 아직 경기 중이다.
터치하니 동접자 현황이 눈에 들어온다. 우와, 꼬리 달린 0이 몇이야. 자그마치 100만 명이 넘었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상사의 눈을 피해 요령껏 눈치껏 몰래 시청하는 직장인들이 태반이겠지.
어차피 팀원들 손에 일이 잡히지 않으리라는 걸 인정한 상사 몇몇은 티 나지 않게 응원하라고 너그러이 월급 루팡질을 허락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비어있는 화장실 칸에 숨어들어, 불 꺼진 회의실에 모여 앉아, 외근 다녀온다고 시동 끈 차 안에서 폰을 켜고 경기를 지켜보는 수많은 눈빛, 눈빛들.
나도 망설임 없이 그 무리에 동참한다.
올림픽 여자 배구 8강전이 펼쳐지는 살구빛 코트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대한민국 대 터키의 물러설 수 없는 결전.
세계 랭킹으로 따지면 14위와 4위의 대결이다. 희뿌연 막이 씌운 듯한 두 눈을 연신 비비며 점수판을 보니 세트 스코어 1:1이다. 어느 한쪽으로 승부의 추가 확 기울지 않은 박빙이란 얘기.
3 세트 후반, 양 팀이 번갈아 20 포인트에 턱걸이로 도달한 시점에서, 가로막은 네트를 사이에 둔 선수들의 눈빛이 한층 매섭다. 그 눈빛에 스치는 것만으로 질긴 네트 그물이 끊어질 것만 같다.
코트에 뚝뚝 떨어진 선수들의 피와 같은 땀을 닦아 내기 위한 도우미들의 발걸음마저 분주하다. 두 팀의 감독들은 상대가 엿들을까 싶어 작전 지시판을 세워 입을 가리고 코트를 향해 뭔가를 외치느라 바쁘다.
설사 감독의 말이 상대의 귓가에 들린다 해도 승부에 영향은 그다지 없으리라. 시속 300킬로를 넘나드는 스매싱 서브와 스파이크는 서로의 빈 틈을 여지없이 파고든다. 때로는 뒤로 물러서거나 바짝 긴장한 수비수 사이에 떨구는 드롭샷 페인트가 난무하는 이 게임에서 이미 발설한 작전 플랜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그저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 판단과 야수를 닮은 날랜 감각에 의지해 움직여야만 한다. 그래야 우뢰처럼 꽂히는 직선타에 손끝이라도 치닿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급전직하하는 공의 낙하점을 찾아 온 몸을 날릴 수 있으니까.
민소매 끝과 목엣부리만 빨간 실로 두른, 나머지는 진청과 하얀색으로 물든 태극 유니폼을 걸친 우리나라 선수들. 그중에 유독 한 선수를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따라다닌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키가 한 뼘은 더 솟은 그녀는 흑발을 한 올 한 올 그러모아 뒤로 질끈 동여맨 채, 코트를 매서운 눈길로 내려보는 독수리를 닮았다.
등번호 10번, 김연경 선수.. 누군가는 그녀를 배구의 여신, '갓연경'이라 부른다.
여러 대의 카메라 못지않게 상대 팀, 터키 또한 그녀를 시종일관 주시한다.
네트 건너편의 여섯 명의 선수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혹시나 약점을 드러내며 물러서거나 절룩이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김연경 선수가 후위에 설 때면 그들은 기다란 팔을 풍차 돌아가듯 휘두른 강서브를 그녀를 향해 날린다.
그들과 한때나마 한솥밥을 먹은, 옛 동료를 향한 시샘과 약간의 애정이 묻어나는, 강력한 회전을 머금은 공을 안정적으로 받아 올리는 그녀의 쭉 뻗은 두 손이 믿음직스럽다.
상대인 터키 팀의 면면을 살펴보면 절대 만만한 팀이 아니다. 터키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아시아의 기술적인 우위와 유럽의 피지컬한 강점이 조화를 이룬 선수들이 돌아가며 우리 팀의 블로킹 라인을 뚫어낸다.
세계 랭킹 4위라지만 눈에 도드라지는 에이스가 보이지를 않는다. 달리 말해 무시하고 지나칠 선수가 한 명 없이, 모두가 평균 이상인 최상급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짜인 팀을 상대하는 것이다.
딱히 약점이 보이지 않는 터키 팀을 상대로 태극 여전사들은 한치도 물러서지를 않는다.
음속을 돌파하는 전투기처럼 직선으로 파고드는 스파이크에 순간 휘청이는 동료를 대신해, 몸을 날려 디깅에 성공한 선수가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곧바로 일어선다.
곧이어 세터가 토스한 공이 상대 센터 블로커를 피해 건너편 레프트로 빠지고, 후방에 위치한 김연경 선수 대신 달려온 박정아 선수가 통렬한 스파이크를 날린다.
상대 블로커의 벽에 반사되다시피 곧장 튕겨진 공은 코트 밖에 떨어지고, 해설자의 긁어내리는 목소리가 '클러치 박'을 연이어 외친다. 긴박하게 이어지는 3세트 듀스 상황을 끝내는 세트 포인트 28점에 다다른 것이다.
둥글게 모여 서로의 머리와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하고 축하하는 선수들. 수고했다! 잘했다! 환하게 웃는 얼굴들의 중심에는 등번호 10번 선수가 자리하고, 카메라 또한 이를 놓치지 않는다.
4세트는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이전 세트에서 너무 힘을 빼고 긴장한 탓일까. 예선전 마지막 상대였던 일본과의 경기 흐름과 비슷하다. 난 잠시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빈틈없이 들어찬 일백만 온라인 관중 틈에 닥쳐올 불운의 씨앗이 숨어 있다면 혹시 내가 아닐까 싶어서.. 까칠하게 돋은 수염을 깎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찬 보리차를 들이켜고 돌아오니 4세트는 터키에게 내준 지 오래였다.
5세트 시작과 동시에 난 성호를 그으며 기도했다.
신이시여, 비잔틴 제국의 심장이자 요새도시 콘스탄티노플을 끝끝내 함락시키고, 폐허 위에 그들의 수도를 세운 저 강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부디 보살피소서.
간절한 바람에도 신은 우리를 향해 쉽사리 돌아서지 않고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지곤 한다.
4세트 패배의 여파가 남은 탓일까? 5세트 초반 기세가 오른 터키 선수들은 6 대 3으로 차이를 벌리며 우리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 악물고 파이팅을 외치는 우리 선수들은, 무릎 수술에도 불구하고 출전한 김희진 선수의 철벽 블로킹에 한숨을 돌리며 한 점 한 점 질기게 따라붙었다.
15점을 선취해야 하는 마지막 세트에서 8점 중마루에 누가 먼저 오르는지 지켜보는 것이 관전 포인트.
결정적인 순간마다 우리의 수비를 당황케 하는, 터키의 날카로운 속공 타이밍이 토스 이후에 어이없이 무너졌다. 네트를 넘기지도 못하고, 엇박자로 뛰어오른 공격수의 손에 닿지도 않고 맥없이 바닥에 떨어진 공.
누군가의 기도에 신이 응답한 것일까. 아니면 밀리언 동접자의 응원에 그림자를 흩날리며 돌아선 신이 망설이며 옆모습을 보인 걸까.
우리 선수들은 한데 모여 환호하고, 터키 선수들은 유니폼 앞섶을 앞니 사이에 깨문 선수를 둘러싸고 위로했다.
오락가락하던 기세는 다시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김희진 선수는 공격에서도 빅샷을 터뜨리며 상대 코트 수비진을 무너뜨렸다. 이후는 우리가 짜 놓은 판대로 흘러갔다. 감독의 의도대로, 적시에 투입한 박은진 선수는 회전이 걸리지 않은 서브를 선보이며 터키 수비수의 리시브가 다소 길어지는데 한몫을 했다.
네트를 살짝 넘긴 터키 후위의 리시브는 하필이면, 우리 코트의 레프트 전방을 향했다.
그 지점에 우뚝 선 채, 난데없이 날아온 먹이를 놓치지 않고 낚아채는 독수리의 날갯짓을 닮은 선수는,다름 아닌 김연경 선수.
그렇게 연거푸 두 번,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의 12점을 따내더니 상대의 공격 범실로 난데없이 몰려온 안개처럼 마가 낀 13점 능선에 먼저 올랐다.
때마침 전방에 자리 잡은 김연경 선수의 연속 공격 성공, 스크린에 마지막 매치 포인트 알림과 함께 코너에 몰린 터키 감독은 타임 아웃을 부른다.
태극 여전사들과 네트 건너편에 선 이국의 선수들, 세 시간 넘게 이 승부를 지켜보는 백만의 숨죽인 관중들 또한 우리 세터가 토스한 볼이 누구를 향할지 알고 있다. 괜스레 속임수를 쓸 필요도 없고, 잔머리 굴리는 속공이나 시간차를 애써 궁리할 필요도 없다. 멀리 이스탄불을 겹겹이 두른, 난공불락의 구 성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블로커 라인도 다른 선수를 쫓을 겨를이 없다.
오직 한 선수,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선수를 집중 마크하면 되니까..
레전드로 배구 역사에 남을, 누구의 반론 없이 배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세계 도처의 명문 팀 홈코트 천장에 걸린 그녀의 유니폼에 새긴 등번호는 영구 결번이 되겠지.
축구의 리오넬 메시, 농구의 마이클 조던이 있다면 여자 배구, 이 바닥은 대한민국의 김연경 선수가 꽉 잡고 있다. 그녀를 어찌하든 살려야 한다. 그녀를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마지막 남은 한 포인트를 두고 양 팀이 짜낸 묘수는 이렇게 단순했을 것이다.
하얀 피케 셔츠를 걸치고 수북한 턱수염을 기른 라바리니 한국 감독은 긴 말 없이, 흘러내린 한쪽 귀밑머리를 올리는 그녀가 말을 끝내기를 기다린다.
"하나만 올리자고, 천천히. 하나만 하자!"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가쁘게 몰아쉬는 숨을 가라앉히고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오른손을 저어대는 그녀의 말에 동료들은 오케이, 알았어, 언니, 하나하나! 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아자 아자! 이기자! 필승의 구호를 외치며 양쪽 끝에 오륜기가 그려진 코트로 흩어지는 태극 마크를 단 선수들.
터키 선수들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각자의 표정은 패배를 예감한 듯 서늘하고 지쳐 보였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스코어는 14 대 13. 한 포인트만 올리면 듀스 상황.
선수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열 손가락과 양 손목을 식히려 연신 팔을 흔들어 대고, 다들 지쳐 있음을 알기에 누구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터키 선수가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자세로 서브를 날리고, 우리 선수들은 떨어지는 공 주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클러치 상황에서 세터가 토스를 올리면서도 불필요한 속임 동작이 없다.
우리는 단지 '그 선수'를 믿으면 된다. 우리 팀의 영원한 에이스이자 정신적인 지주, 배구의 여신이자 레전드..
첫 공격은 상대의 절박한 수비 탓에 아쉽게 실패했지만 다시 한번 공격 기회가 넘어왔다.
코트에 기댈 것처럼 바짝 붙은 등번호 3번, 염혜선 세터가 왼쪽을 보고 공을 넘겨준다.
상대 코트 가운데 위치한 장신 블로커 두 명이 그쪽으로 게걸음하여 점프할 준비를 마치고, 모두가 주목하는 그 선수 또한 몇 걸음 도움닫기해 높이 도약할 준비를 마쳤다.
네트 위로 솟구친, 길게 뻗은 스무 손가락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쭉 뻗어 보지만, 그보다 한 치 위에서 내리치는 흰 공의 타격음은 그녀가 한 수 위라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아마도 전생에 공덕을 쌓은 문어가 환생하여, 여덟 팔이 달린 누군가가 블로커로 나선다 해도 촘촘히 뻗은 손가락 창살, 그 사이를 여지없이 돌파하거나 그 위를 넘어설 위력의 송곳 스파이크다.
전위에 선 블로커들이 뒤를 돌아보는 와중에, 대각의 궤적을 그린 공은 상대 코트 왼쪽 구석에 떨어져 밖으로 굴러간다. 4강전으로 가는 문이 활짝 열렸다. 공격을 성공시킨 갓연경 선수의 입매가 배구공처럼 한껏 둥글어진다. 투혼으로 넘치는 한 판 승부가 끝을 맺는다.
청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한데 모여 얼싸안고 껑충 뛰어오르며 기뻐하는 가운데, 맞은편 코트의 터키 선수들은 무릎을 꿇고, 셔츠 앞깃으로 얼굴을 가리고 치미는 실망감에 눈물을 흘린다.
4강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김연경 선수의 마지막 스파이크가 상대 코트의 바닥에 떨어졌다.
"아빠,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기뻐서 우는 거야, 아빠?"
아이들이 다가와 난데없이 박수를 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며 기뻐하는 내게 묻는다.
200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스페인을 격침하고 4강에 진출했을 당시보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더 극적인 승리다. 나 자신이 험난한 여정을 거쳐 어느 고봉의 정상에 오른 것처럼 감개무량하다.
오죽하면 좀처럼 물기를 비치지 않는 내가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감정이 복받친다.
"우리나라 여자 배구팀이 이겼어. 올림픽 4강 그러니까 준결승까지 올라간 거야."
"그래? 그럼 올림픽 메달도 딸 수 있겠네?"
"응, 두 번 더 이기면.."
난 아이들에게 '두 번'이라는 말을 가벼이 꺼내고는 그 무거움에 눌려 선뜻 끝을 맺지 못했다.
브라질, 케냐, 도미니카 공화국, 일본 그리고 터키..
예선에서 여기까지 올라오기까지 한 경기 또 한 경기 매 순간이 살얼음판이었고, 조금의 방심도 허용치 않았다. 팔짱 끼고 편히 보는 사람도 손바닥에 흥건한 땀이 이리 맺히는데, 실제 필드에서 몸을 내던지고, 구르고, 뛰어오르는 선수들의 몸은 어찌 성한 데가 있을는지..
여름 불볕더위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이른 새벽부터 맹훈련을 거듭하다가, 한 치 앞 승부를 알 수 없는 적지의 코트에 뛰어든 그들의 노고를 가벼이 여겼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여자 배구의 레전드, 김연경 선수가 국대로 활약하는 동안 벌써 두 번째 올림픽 4강 진출이다.
다음 4강전은 브라질과 러시아(ROC) 전의 승자와 맞붙는다. 브라질은 예선 1차전에서 완패했고, 러시아는 높이와 파워 면에서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이 세간의 평.
그녀가 작전 타임 때 팀을 다독이며 외친 것처럼 '천천히 공 하나를 올리고 이루면서' 과연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지.. 이미 모두가 인정하는 고지를 넘었으니, 승패와 상관없이 제발 몸 다치지 않은 성한 몸으로 모두들 금의환향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녀의 영원한 팬으로서 마음을 비우고 두 손 모아 응원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그녀의 올라운드 플레이를 라이브로 지켜보는 영광을 가능한 오래 누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