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새벽에 문득 잠이 깨었다.
멍한 머릿속을 헤치고 뒤를 돌아봐도 뚜렷이 잡히는 꿈 자락 하나 없이 깨끗한데 무슨 연유일까?
목이 말라 거실로 나와 찬물 한 모금 들이켜니 속이 아리다. 얼마 전 맞은 노바백스 백신 탓일까?
잠잠하던 속이 메슥거리고 영 불편하다. 눈먼 걸음을 옮겨 베란다 통창에 비치는 맞은편 동의 불 꺼진 창을 보자니 쓰리던 속이 점차 잦아든다. 어둠을 뚫고 화장실 불을 켠다. 투명한 거울로 다가가 날 마주 보니 도저히 눈을 못 마주치겠다.
이건 인간 형상이 아니라 차라리 좀비에 가깝네. 이제는 긴 잠을 자도 깔끔한 몰골로 깨어나는 경우가 없다.
하루하루 잠들고 깨어날 때마다 티 나게 늙어감을 깨달아도 별다른 수가 없다. 그냥 포기하고 마음 비우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뭔가가 눈에 거슬린다. 틈새로 새어 나온 그 무언가. 야밤이지만 그대로 둘 수는 없어.
양쪽 콧구멍 사이로 삐져나온 굵은 털 몇 올을 손가락으로 집어 단숨에 뽑아낸다.
찌릿하는 통증이 미간을 따라 머리끝까지 관통하며 몽롱한 정신을 깨운다. 찰나의 배꼽을 꿰뚫는 고통은 어쩌면 우리가 그리 갈망하는 절정의 쾌감과 결이 같을지도 몰라. 품에 안은 그녀가 처음 오르가즘에 도달했을 때 환희에 가득 찬 표정과 수태하여 오랜 진통 끝에 첫아기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때의 일그러진 표정은 데칼코마니처럼 묘한 닮은꼴이니..
창백한 세면대에 떨어진 잘록한 털 몇 가닥과 함께 검붉은 각질 같은 것이 점점이 보인다.
양쪽 콧구멍 안을 살살 만져보니 부서진 피딱지가 가루로 묻어난다. 잠결에 코가 막힌 나머지 콧구멍을 후비어 어떻게든 숨길을 트려 한 걸까? 아니면 방 안이 건조한 탓에 비강을 둘러싼 여린 점막은 뜨거운 피라도 뿜어 자신을 적시려 한 걸까?
배수구 아래로 휘내려가는 내 몸에서 떨어져 내린 잔해물을 보노라니, 흐릿하게 잊혀 가던 기억 속 이미지 여럿 부유물로 떠오른다. 작년 가을, 서울 의료원 10층, 칸막이 커튼 하나 없이 노출된 병상, 밤낮없이 돌아가는 대형 팬의 굉음, 밤새 그칠 리 없는 기침 끝에 엉긴 가래를 끄집어 내려는 힘겨운 발악, 산소포화도 80에서 오르락내리락. 숨이 막혀! 콧줄을 자꾸 잡아 빼는 어느 노인의 양 손목을 겁박한 끈 매듭, 그는 내게 그걸 풀어달라 애원했지. 숨을 못 쉬겠다고. 차라리 날 죽여달라고.. 난 그에게 다가가려다 뒷걸음질치곤 간호사실에 연락했어. 그는 살아남았을까? 살아서 화상통화를 하던 그의 어린 손주의 뺨을 부빌 수 있었을까?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누구든 대답해줘요 제발..
어색한 침묵을 깨고 침대 열을 가로질러 진회색 철제문을 밀면 음울한 붉은빛이 퍼지는 토일렛에 다다르지.
입원한 지 사나흘 째였나. 새벽녘 난 세면대에 떨군 내 몸의 일부를 보고 있었다. 독한 에탄올로 소독한, 일체의 틈 없이 미끈한 여기에 꽃이 피었네.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내 가슴속 깊이 검붉은 꽃잎을 날리기 위해 그리도 열을 끓게 하고, 마른기침을 게워내고 온 몸을 진땀으로 흠뻑 적셨구나! 갖은 고생 끝에 그나마 보람이 있었어.
그 꽃은 가장자리에 하얀 꽃받침까지 둘렀다. 이쁘기도 하지. 정신이 아득하여 헛것을 보고 있나? 아니, 절대 허상이 아니야. 한쪽 팔을 들어 올리자 푸른 정맥을 따라 박힌 주사 바늘이 따끔하다. 내 왼팔은 고농도 항생제를 투여하는 링거줄과 바퀴 달린 거치대에 꽁꽁 묶여 있다. 가까이 폰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기록으로 남겼으리라. 하는 수 없이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것은 분명 몇 번의 토악질과 손가락을 입 안 깊이 넣어 혀뿌리를 누른 끝에 폐부에서 튀어나온 내 일부이자 상처의 흔적. 선혈을 머금은 진득한 객담이 분명했다.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 하니 내 숨결에 진홍색 꽃잎들 바르르 떨리다 하나 둘 아래로 흐른다. 서서히 꽃의 형태가 일그러지자 금세 썩은 내가 올라온다. 하수구의 오물과 매캐한 소독액 냄새와 뒤섞인 비릿한 피 내음은 마비된 후각마저 깨우고 끊임없이 자극한다.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가 없구나. 그대는 내 육신을 온갖 고통으로 물들이려 태어난 악의 열꽃. 애초에 메마른 사막의 심장부에 피어난 오아시스처럼 서투른 눈길을 미혹하다가, 다다르면 멀어지는 신기루와 같이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구나.
가라! 흐르거라! 떠나라! 더 이상 날 찾을 수 없도록 저 멀리, 더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 그 안에 영원히 사로잡히길.. 잠시나마 내 안에 머물렀지만 끝내 패배한 네가 머무를 곳은 음습한 지하, 저주받은 쥐떼가 들끓는 진창뿐이니..
난 주저 없이 물을 세게 틀어 그것을 흘려보냈다. 우묵한 세면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짝거렸다.
난 오른손에 물을 묻혀 입과 코 언저리를 씻어 내곤 거기서 빠져나왔다. 링거 스탠드를 끌고 가느라 달달거리는 네 바퀴 소리가 거슬렸는지 어느 환자가 뒤척거리며 욕지거리를 잠꼬대 마냥 뱉었다.
다음 날 회진하는 간호사가 지난밤 뱉어낸 각혈에 대해 물었다. 난 아이들 소꿉장난에 쓰이는, 1:10으로 축소한 미니 계란 프라이의 모양과 닮았다고 답했다. 아닌가?
신열 오르는 어느 무녀巫女의 배란기, 끝내 착상에 실패하고 몸 밖으로 방울진 난혈의 형상과 비슷했노라 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나 보다. 방호복을 입은 채 멀찍이 선 간호사는 그런 가래를 다시 뱉으면 바로 호출하라 했지만, 난 고개만 끄덕이곤 멀리 창 밖을 내다보았다.
뒤늦게 돌이켜보니 그것은..
곧 만개하려다 잘 벼린 무사의 칼날에 사선으로 베여 순백의 눈밭에 홀로 뒹군, 다문 동백꽃을 빼닮은 것도 같았다.
아니면 곧이곧대로 수만 배 확대하여 스파이크 돌기가 사방에 돋아난, 치밀하게 설계되어 진화를 거듭한 바이러스의 원형을 목격했으리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수척한 내 얼굴 가린 희부연 입김이 사라지기 전에, 난 따스한 이부자리로 기어들어 다시 잠을 청했다. 늘어진 꿈자리 어수선했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긴 잠을 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