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냉동실 문에 달린 액정 화면을 가리킨다. 5도.. 현재 냉장실 온도를 표시하는 주황빛 숫자가 깜박거린다.
"어제는 멀쩡했는데.. 오늘 갑자기 왜 이러지?"
냉장실 문을 열어보니 조용하다. 팬 돌아가는 위잉 하는 소리를 들어보려 해도 정적만이 흐른다.
이리 조용할 리 없는데.. 난 두꺼운 문짝을 도로 닫았다.
냉장실 온도 표시계는 여전히 깜박인다. 4도로 내리는가 싶더니 다시 5도로 오른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다시 냉장실 내부를 살펴본다. 맨 위칸부터 차례로 매의 눈길로 찬찬히 훑어내린다.
야채칸 바로 위, 냉각팬이 숨은 통풍구에 시선이 머무른다. 동시에 난 하아, 탄식을 내질렀다.
수납칸 안쪽의 통풍구가 위치한 면은 무언가로 덮여 있었다. 빈틈없이 미끈하고 희부옇고 두꺼운 그것은 다름 아닌,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아닌가. 신혼 때부터 애지중지 아껴 온 냉장고를 메롱한 상태로 만든 주범은 바로 너였구나. 작년 겨울에도 같은 사태가 벌어져 오밤 중에 난리를 피운 적이 있었지.
1년은 버틸 줄 알았더니 웬걸, 봄이 지나기도 전에 이런 불상사가 다시 벌어질 줄이야.
일전에는 덜덜 쿵쾅대는 팬 소음이 온 집안을 울려 제발 날 고쳐주세요! 경고라도 줬건만, 이번에는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다. 아마도 영역을 침범한 설빙에 회전 팬이 걸려 덜그럭 대기도 전에 급속으로 얼어붙어 꿈적도 못한 탓이리라.
"AS 기사 부를까? 서비스 센터 전화해?" 아내가 날 바라본다.
"아니, 오늘 빨간 날이야." 난 츄리닝 바지 밑단을 걷어올려 무르팍까지 접었다.
이 작업은 미룰 수 없어. 내가 해결할 수밖에.. 한번 해봤다고 어떻게 진행할지 순서도가 눈앞에 대략 그려진다. 편히 쉬기는 글렀군. 일요일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하다니. 아내가 마시다 반쯤 남긴 블랙커피를 단숨에 원샷한다. 멍한 머릿속이 삐그덕 대며 돌아가고 무겁게 내리운 눈꺼풀이 바르르 떨린다.
먼저 멀티탭의 냉장고 전원 플러그를 뽑는다. 빈 콘센트에 헤어드라이어를 연결한다.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도구다. 공구함에서 일자 드라이버를 꺼내 곁에 둔다. 유난히 따뜻한 봄 날씨를 견딘 단단한 얼음장이다.
틀림없이 물리적인 파쇄력이 필요할 것이다.
다음은 통풍구 아래 수납칸을 말끔히 비운다. 모든 칸을 비울 필요는 없다. 이 작업은 신속하게 해치워야 한다.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냉장고에 가득한, 가족들이 일용할 양식은 시들어 변질되고 녹아 버릴 테니까.
통풍구 앞면을 겹겹이 가로막은 우유 팩들이 눈에 띈다. 바닥을 드러낸 딸기잼이 담긴 유리병도 갑갑하다. 탈취제를 담은 종이 용기는 아예 들러붙어 얼음과 한 몸이 되었다. 멀뚱히 뒤에 선 아내에게 일러두었다.
"다음부터 통풍구 앞칸은 여유 있게 비워 두라고. 찬 공기가 순환을 못 하니 이렇게 얼어붙을 수밖에.."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모든 준비는 마쳤다. 한 손에는 드라이어를 들고 뜨끈한 열풍을 냉장고 내부를 뒤덮은 저 거대한 빙벽을 향해 뿜어내면 된다. 두꺼운 얼음이 녹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므로 요령이 필요하다. 마른 수건을 아래에 깔고서 드라이어를 그 위에 거치하면 해동 작업이 수월하겠다.
어느 정도 얼음이 녹아 허물어진다 싶으면 일자 드라이버를 들어 빙벽을 깎아내린다. 이때 냉장고 내부가 파손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민감한 센서나 팬 날개가 손상되면 큰 비용이 청구될 수 있으니 주의하자.
헤어드라이어와 드라이버를 양손에 들고 냉장고 앞에 앉아 빙설을 녹이고 쳐낸다. 냉장고 주위는 튀어나온 얼음 파편과 흥건한 물로 난장판이다. 틈틈이 주위를 닦아 정리한다. 함께 얼어붙은 탈취제는 녹으면서 내용물이 흘러나와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작업한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보기만 해도 어수선하고 심란하던 냉장고 내부가 말끔해졌다. 혹시나 싶어 냉장고 전원을 연결해 본다. 내부의 황색 조명이 켜지고 외부의 계기판 램프가 들어온다. 냉장실 온도는 9도를 가리킨다. 더 이상 깜박이지 않는다. "스르륵!" 앞이 훤하게 트인 통풍구 안에 설치된 윙팬이 회전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정상이다. 10년 묵은 올드한 냉장고는 현역에서 은퇴할 생각이 없다. 냉장실 온도가 천천히 떨어진다. 8도에서 7도를 가리키는 온도계 숫자.
이참에 냉장실 내부를 싹 정리한다. 일이 커졌지만 한 번에 끝내기로 한다. 상한 음식은 버리고, 구석에 처박힌 음식은 빨리 해치우던가 아니면 눈에 잘 띄는 바깥쪽으로 자리 바꿈한다. 물때가 끼고 반찬 국물이 점점이 묻은 내부는 깨끗이 닦아준다. 말썽을 일으킨 통풍구 주변은 찬 바람이 드나들 공간을 마련했다. 이 사달을 몇 번 더 겪는다면 이 냉장고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질긴 명줄이 끊어지고 숨이 다할지도 모른다. 내친김에 냉동칸까지 정리할까 하다가 겹겹이, 한치의 틈도 없이 쌓인 내용물을 보곤 얌전히 문을 닫았다. 고렙 테트리스 장인의 숙련된 솜씨가 요구된다. 평온한 주말 아침을 위해 냉동실은 다음 기회에 정리하기로 한다.
보기만 해도 심란한 냉장실 해동 작업
마지막으로 냉장고의 겉면을 광이 나도록 닦아 준다. 아이들이 붙여 놓은 온갖 스티커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솔과 연이 바닥을 쓸며 기어 다니던 시절, 애기 손이 닿는 대로 남긴 시간의 흔적들. 바닥부터 쌓아 올린 소중한 추억들이 여기에 남아 있었네. 난 그것들을 손으로 쓰담쓰담 쓸어내린다. 오돌토돌한 돌출면의 느낌이 전해진다. 문득 내 바짓단을 붙들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아이들이 떠오른다.
크롱 포비 루피 패티 에디, 타요 로기 라니 가니, 로보카 폴리 로이 앰버 헬리 등등.. 냉장고 문짝을 덮은 그들을 매만지고 혀를 내밀어 핥다가 까르르, 웃음 짓고 박수를 치는 아이들. 서툰 직립 탓에 균형을 잃고 철푸덕,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난 미소 짓는다.
"까꿍!"
냉장고 옆에 숨었다가 얼굴만 빼꼼 드러낸 아빠의 장난질에 또 한 번 아이들이 자지러진다.
냉장고 문을 열자 와락 쏟아지는 불빛과 한기에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벌벌 떠는 아이의 손에 뽀로로 음료수를 안겨주자 좋아라 방긋 웃는다. 난 냉장고의 굳게 닫힌 문을 탁탁 두드리곤 그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