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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년생 차돌이의 땡깡질

15년 묵은 차가 돈 달라고 생떼를 쓴다

by 라미루이






'차돌이'가 땡깡을 부린다.

한동안 잠잠하던 우리 집 자동차가 돈 달라고 생떼를 쓴다.

최근에 트레드가 마모된 뒷타이어 2짝을 교체하기 위해 근처 타이어 샵에 들렀다.

리프트에 올려 하부를 봤더니 엉망이다. 운전을 험하게 한 것도 아니고 지킬 거 지키면서 얌전히 다녔는데도

관심을 더 쏟아 달라며 속을 썩인다.


먼저 눈에 띈 건, 조수석 바깥쪽의 등속 조인트 부위.

번들거리고 진득한 무언가가 흘러나와 있다.

다름 아닌 윤활 기능을 하는 구리스가 밖으로 덕지덕지 삐져나와 있는 게 아닌가.

"유턴이나 좌회전 틀 때 조수석 아래서 드득, 뜨득 하는 소리 안 났어요?"

"아니요. 그런 소리 안 났는데요."

그동안 핸들을 무리하게 좌우로 돌려도 거슬리는 소리는 없었다. 등속 조인트 즉 부츠 안에 충격을 흡수하는 베어링들이 아직 마모될 정도는 아니란 건가. 그나마 다행이다. 누출된 구리스 양이 꽤 많은데도 특별한 이상을 못 느꼈다니.. 타이어 샵에서는 등속 조인트의 교체 작업을 할 수가 없어 다른 정비소를 찾기로 한다.


등속 조인트 부위의 구리스 누출. 핸들의 무리한 조작 또는 과속 방지턱을 넘을 때 속도를 줄이지 않을 경우 파손되기 쉽다.


더 심각한 건 미션과 엔진 하부에 오일 누유 흔적이 보인다는 것. 소량의 방울진 흔적이 아니라 주행 시 흩날린 파흔波痕이 남을 정도로 누유량이 많다. 어쩐지 금년 들어서 주차한 자리마다 거무튀튀한 기름기가 비치길래 설마 우리 차의 문제일까 싶어 애써 무시했다. 제발 같은 자리에 주차한 다른 차량의 누유 자국이길 바랬건만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타이어를 교체하고 며칠 후 자주 들리는 정비소에 예약을 잡아 방문했다. 전문 메카닉의 진찰을 받기 위해 리프트에 올려져 서서히 공중으로 띄워지는 '차돌이'. 나이 지긋한 08년 생, 주행 거리 12만 키로. 키로수가 적지만 15년에 가까운 연세라 골골대며 앓아누울 때가 되긴 했다. 그래도 15만 키로까지 우리 가족 움직길 책임져 주라. 같이 버티고 달려 보자 응원했건만 하체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


하부 커버를 뜯어낸 메카닉이 LED 램프를 들고 여기저기를 살핀다.

"조수석 바깥 등속 조인트는 19년 초에 여기서 작업하셨네요?"

"네. 같은 부위가 또 찢어진 건가요?"

메카닉이 주름 잡힌 고무 관절 부위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때 제가 작업한 게 아니라서 확인이 어렵네요. 3년이 지나서 AS 처리는 힘들 거 같습니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잘라 말한다.

"그래도 부츠는 한 번 갈면 적어도 7년은 버텨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게 평소 운전 습관에 따라 자주 파손되기도 해서.. 2년을 못 버티고 터지기도 합니다."

"가족들 타는 차라 운전을 험하게 하지도 않는데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날 못 본체 하고 그는 엔진 쪽을 살펴본다.

"음.. 엔진 쪽은 위에서 새서 아래로 떨어지면서 오일을 흩뿌린 거 같네요."

눈부신 램프 머리를 들어 상부로 열린 틈새를 비춘다.

"꽤 양이 많네요. 리프트 내려서 다시 봅시다."

그는 게걸음을 걷더니 미션 하부에 얼굴을 들이민다.

"여긴 미션 오일 팬이랑 개스킷이 의심되네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메카닉 한 명이 다가오더니 리프트 다운 스위치를 누른다.

천천히 하강하는 차돌이가 바닥에 안착하자 그들은 보닛을 열고 이곳저곳을 살핀다.

"바로 보이네요. 로커암 커버와 개스킷 틈을 보세요."

사수로 보이는 메카닉이 치과에서 볼 법한 기다란 거울 봉을 들고 반대쪽 엔진 커버 틈을 비춘다.

개스킷과 커버 틈을 따라 거뭇한 오일이 배어 나온 흔적들이 길게 이어진다.

"개스킷만 교체하면 안 되고요. 흔히 경화된다고 하죠. 엔진 커버가 플라스틱 재질이라 시간이 흐르면서 비틀리고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함께 갈아야 합니다."

난 절로 한숨이 나온다. 차돌아, 제발 백만 단위는 넘지 말자 기어봉과 핸들을 붙들고 그리 애원했건만, 그 바람은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지금까지 파악한 부품 교체 건만 대충 합쳐도 십만 단위에서 끝날 기미가 당체 안 보이니..

"그리구요.."

메카닉은 내 떨리는 마음도 모르고 다른 부위를 가리킨다.

"이게 진공펌프데요. 여기 보시면 오일이 뚝뚝 흘러내립니다."

그는 일자 드라이버를 들어 펌프 아랫면을 닦아낸다. 드라이버 끝날에 묻은 갈색 오일 자국이 선명하다.

(어이구야.)

재차 날아온 결정타를 턱에 맞은 난 휘청거릴 뻔했다. 낙담하고 실망한 표정이 얼굴에 번진다.



잠시 후 대기실로 돌아와 투명 통창에 비친 차돌이를 바라본다.

(너한테 돈을 더 들여야 하니? 아니면 지금이라도 팔아야 할까?)

어림짐작으로 수리비는 공임 포함해서 150만을 넘을 것이 분명하리라. 이제는 견적서를 보지 않아도 대충 감이 온다. 저 정도 고장이면 통으로 부품을 갈아야 하고 미션에 엔진 오일도 교체해야 할 테니..

주력 계좌의 잔액이 단번에 녹아내리는구나. 삽시에 허물어지는 이런저런 재테크 계획들.

현재 중고가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나오는 저 놈을 더 유지할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론이 고개를 든다. 대기실 밖으로 나와 속엣것을 훤히 드러낸 차돌이의 뒷 궁둥이를 쓰다듬는다. 뒷유리창 한편에는 색이 바랜, "아이가 타고 있으니 주의"를 바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이 차에서 아내와 만나 알콩달콩 연애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들 태우고 방방곡곡 여행도 다니고 그랬는데..)

코로나 유행 이전 차돌이를 타고 남도길 따라 목포항에 머무르다, 내친김에 제주 섬까지 배를 타고 건너간 가족 여행이 떠오른다. 너 없었으면 우리 가족들의 긴 여행길, 절대 순탄치 않았겠지. 그래도 네가 양심은 있는지, 집을 떠난 와중에 비상등을 켜고 대로변에 정차하는 불상사는 여태껏 벌어지지 않았다.

열린 문 틈으로 보이는 뒷좌석에 나란히 놓인 카시트 한 쌍. 아이들이 장난 삼아 붙였는지, 앞 좌석 뒤판과 후측 창 양면은 말끔히 떼어내지 못한 스티커 자국 천지다. 미처 지우지 못한 시크릿 쥬쥬에 티니핑, 프리파라 등등 온갖 만화 캐릭터가 날 향해 미소 짓고 손짓한다. 자세히 훑지는 못했지만 차돌이 내외부에 쌓인, 우리 가족들이 남긴 흔적들 더께가 만만치 않다.

(이건 뭐, 10년 묵은 냉순이 저리 가라네.)

얼마 전 꽝꽝 얼어붙은 냉장고에 이어 이번엔 너란 말이냐. 적어도 6개월 이상 시간차를 두고 말썽을 피울 것이지, 이런 무매너가 어디 있단 말인고.. 물심양면으로 너희들 보살피는 주인장의 인내심을 이리도 시험하면 어쩌란 말인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마음도 빠져나가는 목돈 앞에 마른 바닥을 곧 드러낼 테니..

휴우, 난 무거운 숨을 내쉬곤 차 뒷문을 꽝! 닫았다.



젊은 메카닉이 대기실 의자에 앉은 내게 견적서를 보여준다.

난 총액을 살피곤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최선인가요? 비용을 더 줄일 수는 없나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 답한다.

"필수적인 항목만 담은 거라서요. 엔진 커버는 교체 안 하면 나중에 다시 작업할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 개스킷만 교체한 열에 대여섯은 다시 누유 발생해서 재작업하느라 공임만 늘어났어요. 괜히 돈 나가고 시간만 허비합니다. 정품 대신 저렴한 재생품 사용 가능한 건 견적에 포함시켰어요."

(그래도 두 장을 넘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난 밖에 주차된 차돌이를 바라보고는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엔 여지없이 중고상에 넘길 줄 알아.'

부글거리는 속을 누르며 되뇌었다.

"그래요. 문제 안 생기게 잘 좀 봐주세요."

넵. 그는 짧은 대답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를 맡긴 지 다음날, 그러니까 오늘 오후 정비소에 다시 들렀다.

"일시불로 할까요?"

"아뇨. 3개월 할부로 해주세요. 무이자 맞죠?"

난 옆에 세워진 카드사 홍보 브로셔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긁는다.

대수술을 마친 차돌이는 이상이 없다. 집으로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 거액의 수리 비용이 들어간 탓인지 아니면 단순 플라시보 일지도 모르는, 이전에 비해 부드러운 주행감과 정숙한 내부 소음에 돈 아까운 마음이 다소 누그러진다. 핸들을 잡은 주인장의 마음이 이리도 비좁고 간사하구나. 목돈 들인 값어치를 해서 다행이야.

이대로 12만, 13만을 돌파해 15만 키로까지 주욱 펼쳐진 탄탄대로, 꽃길만 달려보자고..


난 둥근 기어봉에 걸린 묵주 다발의 십자가를 만지작대며 강남순환로 터널 시작점에 들어선다.

라디오를 켜자 <배철수의 음악캠프> 오프닝 음악이 귓가를 울린다.

핸들을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가고, 엑셀 위에 올린 오른발이 아래로 깊이 파고든다.

집으로 향하는 터널의 출구를 밝히는 빛 한 점이 커지더니 순식간에 차돌이와 나를 감싸 안았다.

차창으로 쏟아지는 강렬한 빛줄기에 눈이 부신 나머지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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