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님의 요리를 맛보다

구례 여행기_지리산 오여사

by 라미루이


ㄹ안



구례에 도착한 때는 지난 6월 초, 금요일 저녁이었다.

주린 배를 채우려 아내가 미리 점찍은 식당에 들어섰다. '지리산 오여사'라고 큼직하게 새겨진 나무 간판이 정겹다. 그 아래 에어컨 실외기를 가리는 칸막이에 이 식당의 대표 메뉴가 쓱쓱, 손 가는 대로 쓰여 있다. 국내산 식재료와 천연 조미료를 사용했다는, 자부심 넘치는 문구도 눈에 띈다. 잠깐 외관을 둘러보다 도르르, 열리는 미닫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장시간 운전 탓에 지친 두 발도 쭉 뻗을 겸, 널찍한 방에 앉을까 했다. 하지만 일부러 출입문 바로 앞의 기다란 탁자에 쭈그려 앉았다. 통창을 도화지 삼아 글라스 데코로 그린 듯한 정겨운 그림들에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가까이 앉아 차분히 바라보고 싶었다. 화가 뺨치는 재주를 지닌 오 여사님의 작품인지, 아니면 재능 넘치는 지인의 뜻깊은 선물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가만히 앉아 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뾰족한 마음이 살살 풀어진다. 좁은 운전석에 갇혀 있다 겨우 풀려난 온몸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그제야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여사님이 몸소 뽑은 칼국수와 바삭하게 튀긴 돈가스를 맛보고 싶어졌다.


주방에서 냄비와 프라이팬을 비롯한 조리 기구를 덜그럭 거리며 분주히 움직이는, 동그란 안경을 걸친 저분이 사장님 아니 여사님 이렸다. 처음 마주치면 무심한 기색이 스치고, 초면의 손님과 일정 거리를 두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 혼자서 조리와 서빙을 모두 책임지는, 일당 백의 처지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얼마 후, 우리가 주문한 음식들이 차례로 상에 놓였다. 오 여사는 번들거리는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양손 가득 무거운 접시를 나르다가 우리 테이블 곁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 들깨 칼국수가 걸쭉해서 목이 멕힐 수도 있는데.. 오이냉국 한 대접 드릴까?

네? 우리는 연신 수저를 놀려 진득한 국물을 들이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내비친 여사님의 호의와 배려를 내칠 수는 없었다.

- 들깨 국물이 진하네요. 목이 마를 정도로요. 맑은 오이냉국.. 주시면 감사하죠.

화구가 뿜는 열기에 질린 듯한 여사님의 얼굴이 급 밝아진다.

- 저희 집은 국내산 들깨를 쓰거든요. 면도 여기 구례에서 난 통밀로 치대어 뽑은 거라 그 맛이 완전 달라요. 잠깐 기다려봐.

여사님은 보기에도 시원해 보이는 오이냉국 두 대접을 들고 돌아왔다. 회백색을 띤, 걸걸한 식감의 들깨 칼국수와 새콤 청량한 오이냉국은 천생연분이다. 서로의 빈틈을 잘 채워준다. 들깨 칼국수의 진하면서 고소한 국물은 우리가 예상했던 바로 '그 맛'이었다. 한가위 명절이면 상계동 큰어머니가 교자상에 올리던 회심의 역작. 들깨 가루를 아낌없이 넣어 오래도록 끓여낸 '들깨 토란국'의 깊은 맛과 어찌나 닮았는지.

- 빙초산에 무쳐 맵게 삭힌 홍어회는 네가 맛보기에 아직 이르다 쳐도, 이거는 남기지 말고 싹싹 비우고 가야 하는디..

눈웃음을 머금은 큰어머니가 어린 내 앞에 뽀얀 국물이 넉넉히 담긴 사발을 턱 하니 놓으며 일갈한다. 뭉근하게 씹히는, 잘 익은 알토란에 녹아드는 구수한 들깨 국물은 그야말로 궁합이 찰떡이었지. 난 그때 그 맛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문득 사방의 창을 메운 저 색색의 이미지와 그림들이 그녀의 작품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오랜 시간을 두고 빚어낸 이 공간에서 자신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들은 자연스레 밖으로 밀려났으리라.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일정 눈높이를 만족하지 않는 것들은 이 안에 자리하고 배치될 자격을 얻지 못했겠지. 끝내 도태되지 않고, 그녀의 눈에 들어 기어코 살아남은 것들이 이 공간을 빛내고 있다. 오 여사의 오랜 공들임과 애씀이 묻어나는 식당의 곳곳을 살핀다.





- 아빠, 뭐해? 이 돈가스 먹어봐.

솔과 연은 주위를 두리번대는 날 바라보며 두툼 넓적한 돈가스가 담긴 접시를 가리킨다. 안심 가스, 치즈 돈가스에 더해 닭가슴살 가스까지. 아내는 식탐이 동했는지 돈가스를 종류 별로 세 접시나 시켰다. 그럼에도 부근 섬진강에서 잡아 올린 숭어, 농어 등 제철 생물을 튀겨낸 생선 가스를 맛보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 메뉴는 여름이 아닌, 봄과 가을 그리고 겨울에만 주문할 수 있단다. 어쩔 수 있나. 다음은 무더위를 피해, 선선한 계절을 택해 구례에 다시 들리자고 아내를 다독였다.

큼직하게 썰린 돈가스를 들어 맛을 보았다. 속은 촉촉하니 부드럽고, 겉은 바삭하다. 터무니없이 면적을 늘린다고 두께를 희생하지 않은 탓에 씹을수록 육즙이 배어 나와 퍽퍽하지 않다. 아이들은 절구 종지에 수북이 담긴 깨알을 공이로 잘게 다져 놓았다. 깨 볶는 고소한 냄새가 주위로 퍼진다. 진갈색 데미그라스 소스를 끼얹어 깨 가루와 고루 섞으면 돈가스의 느끼함을 날려줄 비장의 무기 완성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에 놓인 접시와 그릇들이 바닥을 드러냈다.


'지리산 오여사', 구례에 들르는 이들에게 선뜻 추천하고픈 곳이다. 평일이 아닌, 토요일 저녁에 들리면 전통 약주와 막걸리에 제철 안줏거리를 곁들여 마실 수 있는 주점으로 변신한단다. 구석구석 오 여사의 손길이 닿은 소박한 공간에서 그녀의 정성과 자부심이 넘치는 요리를 맛볼 수 있기를. 가능한 많은 분들이 그 행운을 누리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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