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비행飛行을 꿈꾼다

<탑건: 매버릭>을 보고..

by 라미루이

* 이 글은 <Top Gun: Maverick>의 스포를 일부 담고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어려서부터 하늘을 나는 것, 비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초등학교 하굣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하늘을 가로질러 우주를 횡단하는 '은하철도 999'와 나란히 비행하는 공상에 빠지곤 했다. 우주의 적들을 향해 함포 사격을 하는 '캡틴 하록'의 해적선 아르카디아 호에 승선하기를 꿈꾸었다. 아득한 몽상에 빠져들어 길을 가로막고 허우적대는 날 향해 빵빵대는 택시의 경적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스타워즈'를 처음 접했을 때는 엑스 윙을 타고 제국군이 장악한 데스 스타 협곡에 침투하는 상상을 거듭했다. 그러다 동네 오락실에서 접한 '슈팅 게임'이 일대 충격을 선사했다. 실제로 비행기를 조종하여 종횡으로 쏟아지는 탄막을 회피한다는 그 느낌. 짜릿한 쾌감이 온몸에 퍼졌다. 초창기 스페이스 인베이더와 갤러그를 시작으로 제비우스, 1942, R-Type, 그라디우스, 라이덴 등이 80년대 슈팅 게임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와 함께 실제 조종석에 앉아 복잡한 계기판을 조작하고 공중전을 벌이고 싶다는 게이머들의 욕망이 커져만 갔다.

애플과 PC 시대가 무르익자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장르가 출시 게임 목록의 일부를 차지했다. 89년에 출시된 브로더번드 사의 '윙스 오프 퓨리'는 항공모함에서 이착륙하는 과정과 치열한 공중전을 실감 나게 재현하여 기존 횡스크롤 슈팅 게임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 <Wings of Fury, 분노의 날개> 플레이 영상

https://youtu.be/iQ5Wy7EBB4Q



이후 실제와 다름없는 정밀한 비행 스킬을 필요로 하는 MS 사의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시리즈,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독일 간의 공중전을 재현한 루카스아츠의 'Their Finest Hour' 게임이 출시되어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었다. 91년에 등장한 'Falcon 3.0' 은 실제 교본으로 적용할 만한, 사실적인 기체 조작과 임무 수행 시퀀스, 난도 높은 교전 상황을 구현해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의 부흥을 알렸다. 난 위 게임들을 정발로 구매한 적도 있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어둠의 경로로 구해 즐기기도 했다. 박스에 동봉된 매뉴얼은 하나같이 두툼했고, 어느 PC 잡지에 실린 짤막한 분석글은 실제 게임을 진행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빈약한 사전 지식과 둔감한 키보드와 마우스로 기체를 조작하는 탓에 툭하면 불시착하여 화염에 휩싸였다. 혹은 정처 없이 망망대해를 헤매는 미아 신세를 면치 못했다. 캠페인 미션 하나를 완수하려면 실제와 다름없이 대양을 건너기 위해 장시간을 비행해야만 했다. 단색의 도트로 찍고 비뚤한 선으로 그린, 조악한 상공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하품을 터뜨리고 좀이 쑤셔하다가.. 급기야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마우스를 던졌다. 깔끔하게 포기 선언을 한 것이다.

게임 박스와 매뉴얼 북, 플로피 디스크 더미는 책 서랍과 창고 깊숙이 처박혔다. 이사를 빌미로 짐 정리를 핑계로, 어딘가로 실종되는 행불자 처지가 되었다. 지금은 고전 게임 동호회나 커뮤니티를 뒤지면 단시간에 이들 게임을 다운로드하여 플레이까지 할 수 있다. 허나 지나간 추억은 손이 닿지 않게, 멀리 남겨두어야 하는 법. 다시 플레이한다 해도 오프닝에서 감탄사를 내지르다가, 초기 화면에서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고는 10 분도 되지 않아 끝, 게임 종료! 할 가능성이 다분하리라. 그렇게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은 짧은 전성기를 구가하고는 급 변하는 게임 트렌드에 밀려 소수 마니아, 비행 덕후들의 전유물로 명맥을 이어갔다.




* <Their Finest Hour, 나치 공군의 비밀 무기> 플레이 영상

https://youtu.be/_FwoLIemWF0


* <Falcon 3.0> 플레이 영상

https://youtu.be/rHEwBSYeSCg






게임과 달리 실제 전투기와 파일럿을 주제로 시종일관, 심도 있게 밀어붙이는 영화는 흔치 않다. 항모에서 이착륙하거나 항공전을 벌이는 하이라이트 신을 일부 끼워 넣는 경우가 아닌, 러닝 타임 내내 다루는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다. 진주만 침공, 미드웨이 해전을 다룬 몇몇 전쟁 영화들이 떠오른다. 리처드 플레이셔 감독의 <도라 도라 도라>, 잭 스마이트 감독의 76년작 <미드웨이>가 이들 필모그래피의 선조 격에 해당한다. 십여 년 후, 특유의 블루 톤을 가미한 세련미 넘치는 영상으로 주목받던 신예 '토니 스콧' 감독이 제리 브룩하이머와 손잡았다. 86년작 <Top Gun>이 스크린에 걸렸다. 반골 기질 다분한, 반항기 넘치는 천재 파일럿의 사랑과 우정.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전쟁 영웅에 등극한다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다뤘지만 흥행에 성공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피카디리 극장에 이 영화가 걸렸지만 난 연령 제한에 걸렸다. 건너편 길에 서서 큼지막한 영화 포스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 '톰 크루즈'가 남자라면 한 번쯤 ('비행'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자극적인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수년 후, 친구 부모님의 공석을 틈타 삼삼오오 모인 어느 집에서 비디오로 <탑건>을 처음 접했다. 맥락 없이 뜬금포로 펼쳐지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불뚝한 상체를 훤히 드러낸 젊은 파일럿들의 비치 발리볼은 철없는 중딩 사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얼마 후 짙푸른 바다를 닮은, 아쿠아 블루 빛 그림자가 스미는 창가를 배경으로 톰 크루즈와 여주가 벌이는 농염한 정사 장면이 펼쳐졌다. 장안에 화제가 된, 야하다는 소문 그대로였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넋 놓고 그들의 숨 가쁜 로맨스를 지켜보다 장면이 전환되기 바쁘게 리와인드 버튼을 눌렀다. 적어도 대여섯 번은 돌려봤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 영화는 액션과 로맨스를 가미한 전쟁 영화가 성공할 만한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30년이란 세월의 간극이 벌어진 시점에 다시 이 영화를 감상한다. 항모의 활주로를 비추는, 오프닝의 역동적인 관제 액션과 이륙 장면은 시작부터 가슴을 끓어오르게 한다. 체내 아드레날린 수치를 높이는 기폭제 작용을 한다.

진정한 주연은 톰 크루즈와 발 킬머가 아닌, F14 톰캣과 미그 28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매끈한 유선형 동체를 뽐내는 편대 비행의 우아함. 정적을 깨고 창공을 어지러이 가르며 벌이는 도그 파이팅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어색한 CG를 최소화하고, 코크 핏 내외부를 다양한 시점으로 조망하는 시퀀스를 연출하여 긴박감을 배로 높였다. 스토리는 대중들의 입맛에 철저히 맞추었다. 라이벌 파일럿과의 피 말리는 경쟁, 규범을 따르라는 상관과의 트러블. 설상가상으로 남주를 좌절케 하는, 절친의 안타까운 죽음. 시련을 넘지 못하고 수렁으로 빠지나 싶더니 역시나.. 주위의 응원과 자극, 여주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실전에 복귀한다. 곧이어 숨 돌릴 틈 없이 불가능한 작전에 투입된다는 플롯으로 요약된다. 동료들과 합심하여 적기를 연달아 격추한 후 모함으로 귀환하는 톰 크루즈를 모두가 환영하는 장면은 거대한 축제의 장이다. 마치 2차 대전 막바지, 폐허가 된 베를린과 도쿄에 입성하는 미군의 격한 환호성이 들리는 듯하다.





모두의 함성이 잦아들고, 적지에서 돌아온 전쟁 영웅은 갑판 끝에 서서 무언가를 바다로 던져 버린다. 불의의 죽음을 맞은 절친의 군번줄을 수장시킨 것이다. 이로써 그를 괴롭히던 친구의 망령은 영영 바다 깊숙이 가라앉았을까? 자신의 예측 불가한 비행으로 인해 동료를 사지로 몰았다는 세간의 오해가 말끔히 풀렸을까? 쉬이 놓아주지 않는 그날의 트라우마는 언제까지 그를 속박할 것인가? 이 모든 궁금증이 풀리지 않을 의문 부호로 남았다.


그로부터 36년이 흘렀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아슬한 비행을 계속한다. 상관들은 그를 못 미더워하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 파일럿들은 그의 능력을 의심한다. 주력으로 몰던 F14 톰캣은 더 이상 실전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으로 밀려났다. 골동품 취급을 받아 전쟁 기념관에 전시될 지경이다. 마하 2에서 마하 10으로 속도는 진일보했고, 파일럿이 탑승하는 유인기는 AI가 조종간을 제어하는 무인기로 대체될 운명에 처해 있다. 국적 불명의 적들은 업그레이드된 기체와 무기, 비행 스킬로 시시각각 그의 목을 죄어온다.

그의 발밑에 깔린 가시밭은 여전히 물러날 기미가 없다. 전우이자 라이벌 '아이스맨'은 제독의 자리에 올랐지만 타고난 명줄이 턱 끝에 다다랐다. 최악인 건 자신이 바닷속 깊이 가라앉혔다고 믿었던, 옛 동료가 부활하여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인중을 중심으로 양 갈래로 뻗은, 건방진 금빛 수염이 망자의 친아들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제 또 한 편의 극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 한다. 그는 과거와 똑 닮은 흐름으로 전개되는, 초고난도의 불가능한 미션들을 모두 클리어하고 진정한 전설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세간의 평대로 톰 크루즈의 여심을 유혹하는 표정은 여전하다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찌할 수 없는 것. 앳된 얼굴의 생기 넘치던 그는 사라지고, 미간과 눈가에 그간의 고난이 깊은 주름으로 새겨졌다. 그도 늙었고, 우리 또한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기필코 승리하여 아끼는 동료들과 함께 귀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함의 갑판에 서서 환호하는 모두에게 둘러싸여, 자신을 쫓던 망령과 트라우마를 기꺼이 감싸 안을 것을, 극적으로 화해할 것을 믿는다.



우리는 여전히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저 푸른 하늘을 사선으로 가르는 비행운의 꼬리를 뒤쫓는다. 손차양을 한 채, 그 시작점에 위치한 비행체를 가리키며 그 안에 타고 있을 누군가를 동경한다. 아이스 맨, 구스, 루스터, 행맨 그리고 매버릭. 콜사인으로 불리는 우리를 꿈꾸며 초음속으로 상공을 돌파하는 그 순간을 꿈꾼다.




86년작 토니 스콧 감독의 <탑건> 몇몇 장면들. 가히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톰 크루즈의 앳된 표정이 인상적이다





<탑건: 매버릭>의 주요 장면들



* Lady Gaga_Hold My Hand (From “Top Gun: Maverick”)

https://youtu.be/O2CIAKVTO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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