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의 도서관 순례기

그리고 이런저런 잡다한 책 이야기..

by 라미루이







1. 관악 중앙도서관

9월 30일까지 연체자의 멍에를 벗겨주는 이벤트를 베푼다 하여 읽은 책 몇 권과 읽지 못한 책 다수를 반납하였다. 덕분에 도서관 회원증의 상태는 정상으로 복원되었다. 솔과 연은 손원평 작가의 <위풍당당 여우꼬리> 2권을 아무도 대출하지 않았다고 기뻐했다.

김혜리 작가(겸 기자 겸 평론가..)의 <묘사하는 마음>을 겨우 완독 하였다. 국내외 장르를 망라한 수십 편의 영화에 대한 그녀의 깊고도 넓은 사유와 독자적 해석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꼬박 나흘을 헤매었다. 내게 해석은 묘사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예기치 못하게 마주치는, 전망 좋은 언덕과 같았다는 작가의 고백에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곁의 서가에 모셔 두고 틈틈이 펼쳐 볼만한, 소장 가치가 높은 책이라고 추천하는 바이다. 이왕이면 김영진과 이동진, 정성일의 영화 평론집, 고인이 된 이지훈 작가와 로저 에버트의 유고집 사이 어느 빈칸에 자리하면 좋을 듯싶다.



2. 솔은 여전히 연체자다

사당솔밭도서관에 빌리지도 않은 책이 대출 기록에 남아있는 바람에 솔은 연체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혹시나 알게 모르게 빌리지 않았나 싶어 집구석 구석을 뒤져봐도 그 책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이들 또한 시디 2장이 부록으로 포함된 그 영어책을 본 적이 없다 하니 참 요상한 일이다. 책이음 서비스 덕분에 아이는 연계된 몇몇 도서관에서도 책을 빌리지 못했다. 해당 도서관 사서에게 이제껏 이런 적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 책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하고 연체를 풀어달라 부탁했다. 다행히 담당자는 다른 이가 대출했을 수 있으니 시일을 두고 찾아보다가 처리하겠다 답했다. <Summer of the Sea Serpent>. 과연 그 책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집 어딘가, 으슥한 옷장 아래에 다가온 모든 것을 빨아들여 멀티버스로 순간 이동시키는, 미지의 홀이 열린 게 아닐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에 빠져본다.



3. 용산 도서관

최근에 주차장 공사를 하여 출입이 편리해졌다. 주차장 티켓을 끊지 않아도, 나갈 때 사무실에 반납하지 않아도 입출차 가능하다. 헨닝 만켈의 발란데르 경감 시리즈 신작, 독일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한 고 허수경 시인의 복간 시집, 이승우 작가의 개정판 소설 그리고 김중혁 작가의 새로운 판타지 소설을 손에 넣어 기쁘다. 신간 서적을 담은 카트에서 우연히 눈에 든, 청년 용접공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쇳밥일지>의 첫 대출자 겸 독자로 간택받았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희망 도서로 신청한 대만의 동화 작가 '지미 리아오'의 <별이 빛나는 밤>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 봐도 환상적인 이미지가 가득해 필독서로 꼽힐만하다. 이러다 3주의 짧은 대여 기간이 다하면, 주옥같은 이 친구들과 이별을 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든다. 지갑 사정과 거주 공간이 무한정 여유롭다면 서가에 이들을 영구 소장하는 것이 평생소원이다.




4. 서울시 어린이 도서관

주차 공간이 협소한 데다 방문객이 많아 주말에는 차 안에서 대기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좌측 깜박이나 비상등을 켠 차들이 줄지어 서있는데도 무작정 새치기를 하고 고개를 들이미는 얌체 차량이 꼭 한두 대 있다. 보통의 한국인들은 자신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거나, 이에 더해 차례를 거스르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마음 넓게 양보하는 차가 있다면 그 차의 운전석은 잠시 비어 있거나, 차를 렌트한 어느 외국인이 멀뚱히 쳐다보는 경우일 것이다. 아니면 초원을 질주하는 하이에나 떼처럼, 스펙터클한 무한 경쟁 초스피드 사회를 버티는 것도 모자라 마침내 해탈하고 득도한, 극히 소수의 도인이자 성자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각설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차들은 결코 그 차를 얌전히 보내주지 않는다. 무차별적인 경적 연타가 쏟아지는가 하면 욱한 성격의 누군가는 차문을 박차고 달려가 그 차를 세우고(심지어 앞을 가로막고) 한바탕 눈총을 쏜다. 운 나쁘게 상대 낯짝이 두껍다 못해 떡두꺼비 상이면 짧고 굵은 설전이 벌어진다. 오늘도 여지없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 새로 뽑은 듯한, 매끈한 외제 차가 눈치를 보다 새치기를 하길래 난 클락션을 울리고 차창을 내렸다. 이봐요! 호통을 치고 삿대질을 날렸다. 바로 뒤에 선 벤츠 차량의 경적 소리가 하도 신경질적이고 날이 서 있어서 성을 내는 나 또한 기겁했다. 다행히 그 차는 거리낄 만한 양심이 남아 있는지, 머뭇거리다 비상등을 깜박이고는 언덕 위 매동 초등학교 방향으로 사라졌다. 부근에 약속이 있어 미리 도착한 아내에게 반납할 그림책들이 가득한 캐리어와 두 아이를 맡기고는 난 차 안에서 잠시 쉬었다. 잠시 후 차에서 내려 물레바퀴와 조그만 호수 안에 뛰노는 잉어들을 바라보다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불뚝이는 가슴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커피를 들이키려다 간신히 참았다.



5. 마지막 순례지, 이진아 기념 도서관

일요일은 대부분 도서관이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 급박한 마음에 가까운 길가에 차를 대고는 이진아 기념 도서관 정문을 향해 달리다시피 한다. 영유아 열람실을 향해 꺾이는 오름길을 낮보는 목재 벽면이 성큼 다가온다. 멀리 이국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사랑하는 가족들의 곁을 떠난 고인의 미소 띤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그녀를 기리기 위해 서대문 안산 자락에 공공 도서관을 세운 아버지의 마음을 잠시나마 헤아려 본다.

이 도서관은 여타의 도서관과 달리, 그래픽 노블이나 웹툰, 만화나 시리즈물도 편견 없이 희망 도서로 선정하는 경우가 많아 자주 애용하는 편이다. 다른 도서관들도 순수하고 건전한 일체의 텍스트로 쓰인 서적만 발을 들일 수 있다는, 낡은 선입견과 기준에서 과감히 벗어났으면 한다. 작품성이 높은 데다 구체적인 혹은 추상화된 이미지의 향연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충격과 감동, 즐거움까지 선사하는 다양한 장르의 파격적인 책들을 서고에 들였으면 한다. 공공 도서관의 담당 사서들은 부디 사명감을 가지고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열린 마인드를 가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한 달 전에 희망 도서로 신청한 트렌디한 여행 서적 다수와 일러스트레이터 쩡찌의 <땅콩일기 2>, 기록되지 않은 표구사를 다룬 <표구의 사회사> 그리고 두 젊은 시인의 솔직 담백한 대화를 적은 <토끼는 언제나 마음속에 있어> 등을 받아 들고는 집으로 향했다.




묵직한 책 더미를 가득 실은 차 트렁크는 살짝 주저앉은 것처럼 보인다. 뒷타이어의 접지면은 무게에 눌려 평소보다 납작해 보인다. 매달 서울 시내 주요 도서관을 순회하며 새로 눈에 띄는, 따끈한 신간과 기대작을 받아오는 날은 한바탕 축제와 같은 날이다.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아도 배부른 날이고, 힙한 음악과 춤이 없어도 흥겨운 날이다. 집에 도착하면 도서관마다 칸을 구분하여 책장에 정리할 것이다. 비록 왜소한 판형에 두께는 얇지만 무궁무진한 은유와 심오한 사유를 응축한 시집은 앞표지가 보이도록,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도록 배치하리라.

그 외 순수/장르 소설과 만화, 에세이, 여행 서적과 인문 과학 서적 등은 따로 구분 짓지 않고 손맘 가는 대로 뒤섞는다. 난 책에 관한 한 잡식성이다.(하나 더하자면 영화 또한 그렇다.) 어떤 형식이든, 장르이든 이하 불문, 차별하고 저어하고 싶지 않다. 그리 가리고 편독하기엔 남은 시간이 여의치 않다. 온전한 심신으로 활동한다는 전제 하에 우리 생은 끝이 멀지 않았고, 노안이라는 불가피한 노화 현상도 언제 닥칠지 모른다.


사방의 벽면을 차지한 서고의 책들은 쌓인 먼지를 뱉으며 캑캑거린다. 그네들은 무심히 폰을 들여다보는 날 원망하고 힐난하기 바쁘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3주'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국내외 유수 작가들이 무수한 밤을 지새운 끝에 각혈하듯 토해낸 문장들의 행렬을 따라잡아야 한다. 손에 잡힐 듯한 그들의 기나긴 꼬리는 어느새 거리를 벌렸다. 그와 함께 사이사이 숨은 행간의 의중마저 꿰뚫고 헤아려야 한다니.. 감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독한 카페인을 퍼부어 꼬박 밤을 새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 많은 책들을 완독 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는 않으리라. 누군가 이 책들을 모조리 정복했다고, 페이지마다 담긴 정수精髓를 남김없이 취했다고 널리 알린다면 그건 허황된 공명심에 사로잡힌 것이다. 자신과 모두를 속이는 기만행위에 불과하다. 겉핥기로 띄엄띄엄 건성으로 읽었음에도, 타인에게 과시하고자 책으로 쌓아 올린 거탑의 꼭대기에 올랐다고 거짓을 지껄이는 것이다. 난 겸허한 마음으로 책들의 신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스름한 새벽어둠을 뚫고 넌지시 떠오르는 속삭임이자 무언의 계시. 오묘하고 부신 빛을 향해 손을 뻗는다.

어떤 책은 두 손으로 감싸 책등과 표지를 만지는 것만으로, 다음 페이지에 휘갈긴 작가의 친필 사인과 긴히 전하는 인사말을 읽는 것만으로, 애쓴 흔적이 역력한 들어가는 글과 목차를 훑는 것만으로 마주하는 자에게 빛나는 영감과 무한한 동력을 선사한다는 어느 현자의 가르침. 어둔 귀 잡아당기고 어수룩한 눈을 밝힌다.



무릇 작가의 크고 작은 고심苦心이 묻어난 책은 그러한 아우라를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