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풍선을 날리고 서로 주고받는 놀이를 하는지 깔깔, 큭큭 떠들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솔이 짓궂은 장난을 쳤는지, 언니이~ 하고 연이 목소리를 높인다. 난 방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 얘들아, 밤이 늦었거든. 아래층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놀아. 방방 뛰지 말고..
천장에 닿았던 연노랑 풍선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진다. 풍선 겉면에는 아이들이 검은 펜으로 그려 넣은, 수염 돋은 냥이가 두 발을 오므린 채 날 노려보고 있다. 거참, 지지리도 말 안 듣게 생겼네. 천방지축 '풍선 고양이'가 바닥에 나뒹굴며 살짝 비웃는 듯했다. 아이들은 다행히 미리 깔아놓은 이부자리 위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가끔 엘베에서 마주칠 때마다 오지랖 부리는, 아랫집 할머니는 진작에 잠자리에 들었으리라.
난 솔과 연에게 주의를 주곤 방문을 반쯤 열어 두었다. 다시금 아이들은 풍선을 공중으로 던지고 날리면서, 나풀대는 녀석을 쫓아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밉상인 냥이 풍선, 안경다리 골절상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으리라. 아마도 그럴 거야, 그렇고 말고..
시간이 늦었으니 놀지 말라고, 조용히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가 밀린 방학 숙제를 하라고 강하게 말을 했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태풍 '카눈'이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우리나라를 종단하며 관통하는 바람에 일찍부터 계획한 가족 여행이 틀어졌다. 그것도 출발 전날, 캐리어에 짐도 대충 싸 놓았건만 엎어지고 만 것이다. 강원도 동해로 떠나려던 가족 여행은 한 달 전에 예약한 숙소에서 전액 환불해 줄 테니 다음에 예약해 달라는 연락이 오면서 산통이 깨졌다. 예약한 숙박 날짜와 상륙한 태풍이 충청도를 지나 수도권으로 접어드는 예측 시기와 얼추 겹쳤다. 강풍과 호우를 뚫고서라도 어떻게든 여행을 떠나려 했지만.. 닥쳐오는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결국 여행 취소를 알리자 아이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춘기가 다가온 솔은 시무룩해져서는 지 방에 틀어박혔다. 완전 삐짐 모드에 들어갔다. 연은 눈물을 보이며 소파에 털썩, 쓰러져서는 애착 인형 '라미'를 껴안았다. 이후로 아이들의 멀뚱하고 냉랭한 표정이 스치고, 다크 & 시니컬한 기운이 집안을 휩쓸다가 이제야 겨우 예전의 명랑 쾌활한 자매의 웃음을 되찾을 참이었으니.. 괜히 근엄 진지한 아빠의 제지로 좋은 분위기를 깨뜨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고삐 풀린 유치원 때마냥 널찍한 구들장이라도 우지끈, 동강낼 것처럼 막무가내로 뛰어다니지는 않았다. 어엿한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든 모범생답게, 조신하게 사뿐사뿐.. 층간 소음과 천둥을 동반한 빗소리의 경계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이웃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야밤의 위태로운 풍선 점핑 놀이를 즐겼다.
평온하면서 발랄한 놀이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악, 뭔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멈췄다. 큰 방은 난데없이 불이 꺼진 것처럼 정적에 빠졌다. 이를어쩌지? 언니.. 뭘 어떡해? 속닥이는 자매의 은밀한 대화가 열린 방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잠시 후 아이들이 종종거리는 까치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난 짐짓 모른 체하고 노트북을 바라보다 꿍, 액정을 처닫고는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 무슨 일 있어? 잘 놀다가 왜 그래?
아이들은 쭈빗대더니 연이 한 걸음 다가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언니 솔이 눈치를 보다가 살짝 뒤로 물러났다. 둘은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다문 나도 얕은 날숨을 뱉을 수밖에 없더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안경을 부러뜨려 먹은 거냐? 난 가까스로 말을 속으로 삼키고는 물었다.
- 어쩌다 부러진 거야? 냥이 풍선에 맞아서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문이 닫힌 동생을 대신해 솔이 나섰다.
- 연이 풍선을 치려고 손을 높이 뻗었는데.. 하필이면 지 뺨을 때려버린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연의 오른쪽 귓바퀴가 불그레하다. 헛방질을 해도 허공을 가를 것이지, 지 얼굴을 귀싸대기 때리는 건 뭔 희대의 삽질이더냐. 더구나 아끼는 안경을 박살 내는 자학 행위를 저지를 줄이야.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질 아니 헛 스파이크라니..
바닥에 나뒹구는 풍선 냥이가 밉상으로 통통 튀어 오른다. 자신은 아무 죄가 없는 것처럼, 심드렁한 방관자의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로.. 아, 보기만 해도 얄밉다! 난 가까이 다가가 헤드킥을 날리는 것처럼, 풍선을 멀리 차 버렸다. 녀석은 끽소리 못하고 어딘가로 숨어 버렸다. 뻐엉, 하고 터지지 않은 걸로 보아 명줄이 제법 긴 풍선이렸다!
야밤의 헛 스파이크질로 인한 대참사. 바로 응급 수술에 들어갔다.
얼마 후,
연이 항상 귀에 걸고 다니는 빨간 안경이 내 책상에 올려졌다. 이번에도 증상은 동일하다. 오른쪽 다리와 몸체를 연결하는 고관절이 똑 부러졌다. 고질에 상습 골절이다. 라미루이 병원의 단골이자 VVIP 대접을 받을 만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난 골절 부위를 살피고는 아이들에게 외쳤다.
- 수간호사, 순접 빨리빨리!
바로 내 손 위에 순간접착제가 턱 하니 놓인다. 아이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응급 수술대 앞에 선 날 바라본다. 난 접합 부위를 쓱싹, 닦아 내고는 숙련된 손길로 투명한 접착액을 얇게 발랐다. 급박한 상황에서 어설픈 미숙련자는 무턱대고 힘을 주어 덕지덕지, 접착액을 쏟아서는 렌즈알에 묻히고 심지어 지 손가락에 처바르는 실수를 저지르곤 해. 자신의 손끝을 안경 몸체에 이식하고 강력 접착시키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하지. 그럼 그 자는 졸지에 의사에서 환자로, 처지가 급 뒤바뀌어 수술대에 눕는 신세가 되는 거야. 가죽 벨트에 꽁꽁 묶인 채로 녹이 슨 메스를 들이대기도 전에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고, 손가락 끝에 철썩 붙은 안경을 사방으로 휘젓는 꼴이라니.. 난 고개를 저었다. 수전증 걸린 것처럼 손끝이 달달 떨렸다. 집중하자, 집중! 어처구니없는 무책임한 의료 사고를 저지를 수는 없잖아?
난 깔끔한 솜씨로 골절된 다리를 원위치시키고는 후우, 입김을 불어 상처를 소독했다. 내일 아침이면 이 안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다리로 걸어 다닐.. 아니지 연의 이쁘장한 콧등 위에 걸쳐져 어두운 눈을 밝히는 중대한 역할을 다시 수행하리라.
- 오늘은 안경 쓰지 말고.. 내일 아침에 걸치거라.
접합 수술을 마친 안경은 TV 수납장 위 회복실에 누웠다. 그제야 연은 표정이 환히 풀렸다. 거봐, 아빠가 다 고쳐 준다니까. 뭘 그리 겁내고 그래? 솔이 동생의 한쪽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뭘 겁내? 자꾸 그럴래. 조용하던 자매는 다시 옥신각신 말다툼을 시작하려 한다.
- 연은 이제 드림렌즈 껴보지 그래? 안경 저래 가지고 불편해서 쓰겠니. 재작년에 렌즈 맞춰 놓고 끼질 못하니..
네, 대답하는 아이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비싼 돈 주고 유명 안과에서 드림 렌즈를 맞춘 지가 어언 2년 전이다. 처음 일주일은 엄마가 렌즈 넣어주는 대로 곧잘 끼더니, 이후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렌즈 끼는 것을 거부하더라. 볼록한 하드 렌즈를 검지 끝에 올린 엄마가 바짝 다가가면 연은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찌푸리고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온몸을 다해, 본능적으로 필사적으로 거부한다. 선이 요리조리 피하는 아이를 꼭 붙잡기도 하고 살살 달래기도 하고, 따끔하게 호통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렌즈를 낀 채로 하루 이틀, 사흘 밤만 버티면 그토록 귀여워하는 냐옹이를 집에 들이겠다, 거부할 수 없는 파격적인 딜도 제시했지만 아이는 실패를 거듭했다.
좌절하다가 낙담하고 엄마의 야단에 기가 질린 아이는 울고 불고 눈물을 짰다. 이걸 왜 못 끼니? 언니는 이렇게 한 번에 잘 끼는데.. 진즉 렌즈를 끼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언니 솔을 바라보는 연의 입꼬리가 무너진다.
애써 참은 눈물이 똑똑, 턱 아래로 떨어진다. 가시 돋친 말을 뱉은 엄마는 엄마대로 마음이 상하고 성격만 모나고 뾰족해지더라. 결국 연의 빨간 안경은 한쪽 다리가 거듭 부러져도 응급 수술을 마치고는 아이의 동그란 귀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고가의 드림 렌즈는 주방의 서랍장 어딘가에 깊숙이 처박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아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을 맞았다.
이번에는 연이 드림 렌즈를 낄 수 있을까? 산전수전 다 겪은, 절뚝이는 짝다리 안경은 긴 안식에 들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난 선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아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우리의 속 타는 바람과는 달리, 연은 회복실에 누워 있는 빨강 안경이 빨리 퇴원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어디서 찾았는지, 솔은 얄궂은 풍선을 꺼내서는 통통 토스를 띄우고 있다.
고 녀석, 언제든 뻥 하고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한 게.. 핼쑥한 냥이 표정에 다 드러난다, 야! 버럭 하는 일침에 느긋하던 풍선 냥이, 움찔하고 놀라 움츠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