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 커서를 옮기니 샛노란 헬멧을 쓰고 주홍 안경을 걸친 개구쟁이 펭귄이 활짝 웃고 있다.
아이들의 인기 만점 대통령, 꼬마 펭귄 '뽀로로'가 돌아온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영상을 재생하니 TV판 시즌 8이 제작되어 8월 말에 방영 예정이란다.
안녀엉, 뽀로로! 안녕, 친구들~ 뽀롱 뽀롱 뽀로로 로로, 언제나 즐거운 개구쟁이..
흥겨운 주제가가 흘러나오고 주인공 뽀로로에 이어 크롱, 크로옹만 입에 담는 초록 공룡 크롱, 영리한 발명가 여우 에디, 듬직한 북극곰 포비가 연이어 등장한다. 포비의 머리와 어깨에 올라타는 것을 즐기는 수다쟁이 음치 벌새 해리, 부끄럼 많고 상냥한 핑크 비버 루피와 발랄하고 이쁘장한 보라 공주 패티도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동그란 얼굴을 스크린 밖으로 내민다.
난 노트북으로 넷플릭스 애니를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 얘들아, 뽀로로랑 친구들 새로운 시즌 곧 뜬다는데 볼 생각 없니?
- 아빠, 뽀로로가 뭔데요?
헉, 아이들이 단기 기억 상실증이나 일시적인 치매에 걸리진 않았을 테고.. 설마 '뽀로로'를 잊었단 말인가?
난 당황스러운 마음에 폰의 예고편 영상을 솔과 연에게 보여주었다.
- 아, 이 뽀로로.. 뭔가 했네.
-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아이들은 익숙한 멜로디의 초창기 주제가를 흥얼대며 어깨를 들썩인다.
- 뽀로로 새로운 시리즈는 곧 뜰 테고, 작년 극장판은 진즉 떴는데.. 너희들 볼 생각 없어? 이미 본 사람들 평이 재미있다는 리뷰가 많던데?
난 아이들의 흥미를 어떻게든 끌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 별로요. 그냥 넷플릭스 볼래요.
- 지금은 말고.. 나중에 보면 안 될까요, 아빠?
나란히 고개를 젓는 자매의 시큰둥한 반응에 손에 쥔 폰을 슬그머니 뒤로 물렸다. 아이들은 넷플릭스에서 쏟아지는 화려한 캐릭터와 속사포 같은 랩 스타일의 대사에 포옥, 빠져 있었다. DC 히어로물을 어린이용으로 개작한 <Teen Titans Go!>의 주인공 로빈이 과장된 액션으로 외계 빌런을 물리치고 있다.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내뱉는 그의 병맛 개그 대사에 깔깔대며 고개를 젖혀 폭소를 터뜨렸다.
터벅터벅 난 방으로 돌아왔다. 폰에서는 여전히 시즌 8의 커밍 순! 을 알리는 뽀로로의 익살스러운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폰을 쥔 손의 힘이 스르륵 빠지면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뽀로로, 너도 이제 한물간 거냐? 전 세계를 주름잡던 뽀통령의 왕좌에서 내려올 때가 된 거니? 아니지. 이건 뽀로로의 잘못이 아니라, 아이들의 눈높이와 관심에서 네가 멀어진 걸 수도 있어. 유년기를 벗어난 아이들의 눈이 높아져서 또는 관심사가 달라져서 더 이상 네가 친근하게 보이지 않는 걸지도 몰라. 한 마디로 더 이상 재미가 없는 거야. 넷플릭스와 디즈니의 현란한 장편 애니와 실사 영화에 길들여진 지 오래인데, 눈 덮인 장난감 마을에서 이등신의 동물 캐릭터가 뒤뚱이며 뛰노는 애니에 눈이 돌아가겠냐 이 말이라고..
에이, 개유치 찬란해요. 보기만 해도 하품이 나오네. 저희들은 더 이상 꼬꼬마 유치원생이 아니라구요. 저거 본다고 소문 퍼지면 학교 친구들이 놀릴지도 몰라요! 억지로 뽀로로 애니를 보게 한다면 아이들의 드높은 원성이 터질지도 모르리라.
언제부턴가 아이들의 곁에서 '뽀로로와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략 초등학교 3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인 듯하다. 잠자리에서 애착 인형을 대신하고, 바깥나들이를 갈 때마다 각자 껴안고 다니던 뽀로로와 에디 인형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뽀로로의 얼굴에서 떨어져 비스듬히 흘러내린 안경과 에디의 납작하게 눌린, 펑퍼짐한 꼬리가 애처로웠다. 원색의 버튼을 누를 때마다 뽀로로 노래가 메들리로 터지고, 크롱크롱, 반가워! 너희들이랑 노는 게 제일 좋아! 하고 몇몇 친구들의 애기진 목소리가 흐르던 장난감 비행기며 버스는 고장 난 채로 방치되다가 재활용함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냉장고와 책장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뽀로로와 친구들의 스티커는 색이 바래거나 뜯어지고, 캐치 티니핑이나 산리오의 캐릭터 스티커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시간의 흐름은 갈수록 가속도가 붙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데.. 여전히 내 시선은 그들의 유년기에 머물러 있다. 그리운 아이들의 어린 시절. 영영 머무를 수 없기에, 갈수록 그 잔상이 스러지기에 못내 아쉽기만 하다.
뽀로로의 <바라밤> 노래 전주만 흘러나와도 들썩들썩, 엉덩이 춤을 추고 무대로 뛰쳐나가던 아이들. 때때로 기분이 상해 칭얼대고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장난감 나라를 퍼레이드 하는 <피노키오> 영상을 틀어주면 어느새 방긋 미소를 짓곤 했었지. 뽀로로 테마파크를 찾아 칙칙폭폭, 뽀로로 기차를 타고 미끄럼틀과 터널을 즐기다가.. 코스튬과 탈을 쓴 인형들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공연에 빠져들어 재차 삼차 관람하던 아이들의 반짝이던 눈동자.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뽀로로와 포비, 에디의 손을 잡고 허리께를 껴안은 채, 떨어질 줄 모르던 아이들의 설렘과 기쁨, 터질 듯한 흥분.. 그리고 끝내 뽀로로와 헤어져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자 아쉬운 나머지 터지던 오열과 끝없는 흐느낌.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솔과 연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다른 뽀로로 실내 놀이터를 찾는 나날의 연속..
구글 포토의 좌측 연도 그래프, 저 아래에 가라앉은 여러 사진들이 갈수록 아득해지는 기억들을 떠올려 준다.
난 대여섯 살 무렵의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눈망울과 둥글게 앙 다문 앵두 입술, 내 손을 꼬옥 붙잡은 다섯 손가락의 말랑하면서 따스한 감촉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홀로 내 방에 앉아 작년 개봉한 뽀로로 극장판을 돌려 볼까 한다. 지루하고 유치하다 싶으면 1.3 배속 정도로 빨리 재생하면 끝까지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졸음을 참기 어렵다 싶으면 볼륨을 살짝 높여 볼까 한다. 어쩌면 귀에 익은 뽀로로와 친구들의 앵앵대는 목소리에 잠이 깬 솔과 연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내 방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아빠, 뭐해? 뽀로로 보는 거야? 응, 아빠도 잠이 안 오네.
아이들은 내 옆에 앉아 처음엔 하품이 터지고 멍을 때리다가 점점 스크린에 가까이 다가가리라. 코로나를 닮은 빌런, 네모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한 뽀로로와 친구들의 좌충우돌 맹활약에 헤에, 입을 벌린 채 빠져들겠지. 중간중간 흐르는 흥겨운 춤과 노래를 따라 하다가 서로 마주 보며 멋쩍은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뽀로로에 빠져든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더 이상 목말을 태우기 버거울 정도로 너희들 몸집이 커지고 키가 자랐지만, 제법 진지한 말투로 아빠, 엄마한테 그러면 안 돼! 내게 따끔한 충고를 건네기도 하지만..
여전히 너희들은 스크린을 멋대로 휘젓다가 뒤엉켜 넘어지는, 저 뽀로로와 친구들처럼.. 영원히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로 머물렀으면 해. 놀이터의 흔들 그네에 올라타 아빠에게 높이높이 밀어달라 생떼를 쓰고, 걷는 게 힘들 때면 아빠 목덜미에 올라타겠다고 투정을 부리다가는, 매일 잠들기 전에 책장에 꽂힌 그림책 열 권을 읽어달라 애타게 조르는.. 그런 아이들로 영영 남아주었으면 해.
이 모든 게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은 아빠의 과한 욕심에 가망 없는 희망 사항일까? 과연 그럴까, 얘들아..
난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몽땅한 캐릭터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날 바라보고 있다. 빤히, 뒤통수를 꿰뚫을 것처럼..
모든 공연과 쇼가 끝났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라며 굳은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난 노트북을 덮고는 주위를 밝히는 스탠드의 전원을 껐다. 어둠에 잠긴 아이들 방 안에서 곤한 숨소리가 새어 나온다.
깊이 잠들거라, 사랑하는 내 아이들아.. 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술에 취한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유령을 닮은.. 짙은 그림자가 뒤를 따른다. 난 그와 한 몸이 되어 한참을 뒤척이다가 얕은 잠에 들었다.
뽀로로 & 친구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추억들. 그때가 그립기만 하다. 허나 어쩔 수 있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