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경주에 오면 필수 순례지로 정해 들르는 곳이 있다.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는 '경주월드'가 바로 그곳이다. 잠실 롯데월드가 석촌 호수를 끼고 앉은 것처럼, 경주월드 또한 보문호를 향해 비죽이 각을 내민 형태로 자리 잡았다.
정문을 통과해 공연장으로 향하자 학생들의 수런한 대화와 욕지거리가 들린다. 평일 오전인데도 경주월드를 찾은 방문객들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남녀 학생들의 체격과 말투를 보니, 부근의 중학교에서 단체로 놀러 온 듯싶다.
처음 도전하기로 한 '발키리' 롤러코스터는 바로 옆에 무섭기로 악명 높은 '드라켄'이 자리해서인지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아 보인다. 트랙의 경사도 완만해 보이고, 길이도 짧으니 롤코 입문자 용으로 적절하겠다 싶지만, 출구로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낯빛은 대부분 사색으로 질려 있다. 구불하게 늘어선 대기줄 끝에 섰는데, 둘째 연이 무섭다고 쭈빗대며 자꾸만 뒤로 도망가려고 한다. 괜찮다고, 안 무섭다고.. 저길 보라고, 너보다 어린아이들도 곧잘 탄다고 겨우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단체 학생들이 몰려서인지 발키리 롤코에 탑승하기까지 30분 가까이 기다려야만 했다. 안전바가 내려지고 롤코가 천천히 움직인다. 허나 앞이 아닌 뒤로 후진하는 게 아닌가. 첫출발부터 예감이 좋지 않다. 결코 만만치 않은 험난한 주행을 예고하는 듯했다. 오르막을 뒤로 오른 발키리 롤코는 정상에서 멈추더니 쏜살같이 아래로 추락한다. 밖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꽤 가속도가 붙어 엉덩이가 좌석에 얌전히 붙어 있지를 않더라. 때때로 온몸이 허공으로 부양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덜미와 가슴팍이 쎄한 느낌과 함께 롤코는 정신없이 급강하하고 좌우로 덜컹, 휘어지며 탑승객들의 머리칼을 이리저리 휘날리게 한다. 여기저기서 눈을 감고 두 손을 뻗다가 황급히 안전바를 부여잡고,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이 여럿이다. 솔과 연은 초반에 아빠, 무서워요! 악을 지르다가 한 바퀴 이후부터는 적응이 되었는지, 내리막을 꽂을 때마다 양팔을 번쩍 들고는 스릴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롤코는 얼마간 질주하더니 오르막 정점에서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숨을 고른 미니 열차는 반대로 바퀴를 구르더니 전속력으로 지나친 길을 역주행하는 것이 아닌가. 으아악! 처음 겪는 이들은 모골이 송연한 느낌을 제대로 받았는지 경악을 금치 못하더라. 나 또한 예상치 못한 전속 후진에 당황한 나머지, 아점으로 먹은 김밥이며 컵라면을 하마터면 게워낼 뻔했으니까.. 다행히 후진하여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상태로 한 바퀴만 더 돌았더라면, 우웩! 하고 트랙 바닥에 오바이트를 쏟았을지도 모르리라. 메슥거리고 울렁이는, 멀미 기운 올라오는 속을 겨우 진정시키고 다음 놀이기구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니 선 또한 안색이 핼쑥하고 허여멀건 게, 속이 영 좋지 않은 듯싶다. 솔은 도전 정신이 솟았는지 수직으로 내리꽂는 드라켄 롤코의 맹렬한 질주를 자꾸 바라보았고, 연은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졌는지 경주월드 가이드맵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폐장 시간인 오후 6시까지, 아이들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여러 어트랙션을 즐겼다. 특히 연은 고소 공포와 놀이기구 울렁증을 어느 정도 극복했는지, 쉴 새 없이 패밀리 바이킹과 발키리 롤코에 도전했다. 난 한동안 연과 함께 놀이기구를 즐기다가 울렁대는 멀미 기운이 도져 도중에 낙오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벤치에 앉은 내게 손을 흔들며 출구에서 나와 곧장 대기줄 끝에 섰다.
- 얘야, 지금까지 몇 번 탄 거야? 기억나니?
- 이번에 타고, 다음 또 타면 정확히 열 번이에요. 아빠는 안 탈 거예요?
난 덜컥이며 급후진 하는 롤코 안에 타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줄 듯 말 듯, 밀당의 고수. 터키 아이스크림 아저씨의 현란한 묘기를 보라!
솔은 엄마와 함께 우의를 입고는 급류 타기에 도전했다. 경주월드에는 급류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어트랙션이 여럿 있는데.. 그중의 압권은 '섬머린스플래쉬'라 할 수 있다. 20명이 탑승하는 노란 사각 보트가 트랙을 따라 천천히 고도를 높이는 장면을 보자면, 수중 지옥을 향해 끌려가는 엄숙한 장례 행렬을 보는 듯하다. 그 안에 몸을 실은 아내와 솔이 신나게 손을 흔든다. 지상으로부터 32미터, 최정점에 도달한 보트가 유턴을 하여 내리막에 도달하면 저 아래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는 한바탕 난리가 난다. 우비를 벗어던진, 투지 넘치는 학생들이 한데 모여 두 팔을 벌리는 가운데.. 보트가 트랙을 따라 추락하고 얼마 후 호수 면과 정면충돌하며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킨다. 공작새가 활짝 꽁지깃을 펼친 것처럼, 물폭탄이 사방으로 터지며 반경 10미터 넘게 폭우가 쏟아진다. 내 옆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연이 갑자기 소리친다.
- 아빠, 저기 무지개 뜬 거 봤어요? 저기 물보라 한가운데 봐요!
나 역시 보았다. 물보라도 대단하지만 뒤에 따라오는 오색 무지개 또한 선명하고 영롱하더라. 난 감탄사를 뱉으며 모든 장면을 영상으로 남겼다. 아까 한 무리의 학생들이 줄지어 날뛰던 그 가교는 물폭탄이 직격하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날도 싸늘한데 반팔 달랑 걸친 온몸이 흠뻑 젖어서는, 오들오들 떨며 어딘가로 달려가는 학생들이 여럿이었다. 젊은 혈기에 반나절은 어찌 버티겠지만, 해가 지는 오후 넘어서는 추위로 고생하겠다 싶었다.
솔은 다시 한번 아쿠아 어트랙션을 타보겠다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폐장 시간이 다가올수록 인기 어트랙션의 대기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몇몇 어트랙션은 중간에 점검을 하기도 했고, 일찍 문을 닫기도 했다. 아이들은 만만한 놀이기구에 거듭 도전하면서 자신감을 얻었지만, 하드코어 한 몇몇 어트랙션은 어설픈 미숙련자들의 접근을 불허했다. 360도 회전하며 몸을 비트는 자유분방한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공포에 질린 탑승자들의 괴성을 듣는 것만으로 고개를 떨구고 뒷걸음질 치게 하는.. 극악한 아우라를 내뿜는 철제 괴물들이 사방에 진을 치고 있더라.
연이 연이어 도전한 패밀리 바이킹, 킹 바이킹의 미니 버전이라 보면 된다.
이를테면 메가드롭, 토네이도, 킹 바이킹, 앞서 목격한 드라켄, 파에톤, 크라크 같은.. 그 이름마저 무시무시, 사악한 놀이기구들이 솔과 연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용기를 잃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것들 목덜미에 올라타 양팔을 뻗어 만세를 부르며 상공을 자유로이 비행하겠다고 다짐했다. 고작 이것뿐이더냐? 더 몸을 비틀어 속도를 내고 불을 내뿜지 못하겠느냐고, 녀석들에게 가시 돋친 채찍을 휘두르겠다고 벼르기까지 했다. 최정점에서 거꾸로 낙하할 때는 여유로운 나머지 하품을 연발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라.
얼마의 시도를 거듭해야 그 정도 상급 레벨에 도달할지 알 수 없지만, 난 아이들을 믿기로 했다. 우리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색색의 우비를 벗어 쓰레기통에 처넣고는 출구로 향했다. 경주월드의 통행로, 푸드트럭, 디저트 매장 등을 밝힌 조명이 하나둘씩 꺼졌다. 구불한 철제 어트랙션의 기괴한 움직임도 침묵에 빠져들었다. 멀리 흔들리는, 보문호의 은빛 물결이 우리의 지친 시선을 잡아끌더니 천천히 어루만졌다. 아이들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까운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