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기와 음식 찌꺼기가 덕지덕지 묻은 접시와 밥공기가 산처럼 쌓인 설거지 거리를 해치우는데
20분이 훌쩍 넘어간다. "와장창" 그만 미끄덩하고 접시를 놓쳤다.
- 이제 다 깨부수려고? 조심조심 살살해.
식탁에 앉아 설거지하는 날 바라보던 아내가 툭 던지듯 한 소리한다. 싱크대 안에 나동그라진 접시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가장자리에 움푹 어금니가 나갔다.
- 멀쩡하구먼, 이 나간 접시 한둘쯤은 살림살이 채우고 있어야 훗날 큰돈이 들어오는 법이야.
흥, 들릴 듯 말 듯 콧방귀를 뀌고 폰을 들여다보는 아내는 대꾸도 안 한다.
요란법석을 떤 설거지를 마쳤다. 티셔츠는 헹군 물로 폭탄 맞은 듯 배꼽 부분이 흥건하고,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 하면 할수록 집안일은 쉽지 않아. 특히 한여름에 집구석 붙어 있으면 군살 오를 틈이 없지. 에구구.
오동나무로 만든 경침을 목에 베고 거실에 깔아놓은 요가매트에 누워 땀을 식힌다. 아이들은 진즉에 방에 자러 들어갔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속닥속닥 수다를 떨고, 키득키득 웃음보를 터뜨리느라 기어코 엄마에게 한소리 듣는다.
- 자꾸 떠들고 안 잘 거면 일어나서 책 읽어. 솔은 수학 문제 더 풀던가. 알았어?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이들은 잠시 조용하더니 오래지 않아 부스럭거리고, 귀엣말로 비밀 수다를 떨어댄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길래 밤새 웃음꽃이 피는지 궁금해 몰래 귀 기울이니,
- 유치원에 누가 제일 좋아? 해찬이? 성열이? 그럼 누가 제일 싫어?
- 라미(다이소에서 산 다람쥐 인형)는 어디에서 왔을까? 미국? 중국 아니면 호주?
- 아니야~ 관악산에서 집에 가는 길을 그만 잃어버려서 우리 집에 온 거라구.
- 우리 이렇게 영영 안 자면 어떻게 될까? 새벽에 천장에 붙은 귀신이랑 눈이 딱 마주치면.. 끄아아~
이대로 놔두면 밤새도록 수다만 떨 듯하여 내가 방에 들어가 구석에 모로 누워 버린다.
- 속닥거리지 말고, 간격 띄우고, 서로 등 돌리고 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자 이내 조용해진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연이 먼저 쌕쌕거리며 꿈길로 빠지고, 솔은 좀 더 버티다가 코를 골면서 뻗는다.
- 그리 피곤하면서 이리 잠을 안 자고 버티나?
땀에 절어 이마에 붙은 아이들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준다. 배꼽만 가리도록 홑이불을 덮어준다. 창문을 활짝 열어 두어야 새벽에 더워서 깨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청객인 모기를 쫓으려고 전기 모기향을 켠 뒤 살그머니 문을 열고 나온다.
식탁에서 조신하게 책을 읽는 아내에게 곧 샤워할 테니 등 좀 밀어달라 부탁하니 귀찮은 내색이 확 번진다.
- 준비되면 불러, 참나.
며칠 전부터 등을 밀어주기로 단단히 약조하였기에 거절은 하지 않는다. 마흔 줄에 접어드니 자주 때를 밀지 않으면 몸에서 쉰내가 나는 듯하고 영 개운치 않다. 대중목욕탕을 찾아 세신사나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시원하게 벗기면 좋으련만 코로나로 인해 출입이 꺼려진다. 할 수 없이 집에서 묵은 때를 밀어야 하는 상황.
손이 닿는 허벅지나 배꼽, 엉덩이 이런 곳은 커버 가능하다. 하지만 유연성이 부족한, 뻣뻣한 몸을 가진 내 손이 닿지 않는 등 정가운데와 날개뼈 주위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고민 끝에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고, 웬일인지 아내는 별말 없이 세신사 노릇을 허락했다.
나중에 변심하여 딴말하지 않도록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내와 애끼 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었다.
비누칠을 하고 따뜻한 물로 씻어내니 하루 동안 굳어진 온몸의 근육들이 살살 풀어진다. 특히 어깨와 목 근육이 과하게 긴장하여 고질적인 편두통이 도지곤 했는데 샤워를 하며 그 부위를 집중적으로 풀어준다.
이 정도면 몽글몽글 때가 불었겠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재택 세신사를 부르니 아내는 책을 확 덮고는 마지못해 일어선다.
- 으이그, 정나미 떨어지게.
욕조에 들어가 벽에 양손을 짚고 넙데데한 등판을 내미니 아내는 못 이기는 척, 때수건을 손에 쥐고 등을 밀어준다. 결혼 10년 만에 처음 맨 등을 내주었는데도 각별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부부 간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데, 등을 밀어달라 괜한 부탁을 했나 하는 마음이 든다.
- 때가 시원하게 안 나오는데, 오래 불린 거 맞아?
- 빡빡 밀어보라고, 세게 밀어야 한다니까. 거의 몇 년치 묵은 때가 거기 묻혀 있구먼
평소 목욕탕에 가면 남들처럼 넉살 좋게 또래 사내에게 등을 밀어 달라한 적이 없었다. 벌거벗고 있는데 괜히 말 섞기도 귀찮고, 때가 많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소심한 걱정도 있었다.
그간 내 등을 밀어준 사람은 아버지, 외조부 정도였다. 아쉽게도 두 분 모두 돌아가셨다.
만약에 아들이 있다면 부자간에 목욕탕도 가고, 서로 세신사 노릇도 하고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으련만 두 딸에게 그 역할을 바랄 수도 없다. 등 밀어줄 아들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우리 셋째 낳을까' 얘기를 꺼내는 순간, 도끼눈을 뜨고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아내의 사나운 얼굴이 그려진다. 어쩔 도리없이 아내는 내 벌거숭이 등짝을 처음 허락한 이, 평생 귀한 손을 빌릴 그녀로 당첨된 것이다.
때가 줄줄 안 밀린다고, 괜히 피부만 벌게졌다고, 제대로 불린 거 맞냐고 구시렁대더니 등짝을 때수건으로 찰싹 때리고는 욕실을 나가 버린다. 할 수 없이 손에 닿는 가슴팍, 옆구리, 팔꿈치 등을 밀어 대니 웬걸, 힘을 많이 주지 않아도 지우개똥 밀리듯 땟무리가 쏟아지는 게 아닌가?
이왕 밀 거면 제대로 밀 것이지. 꺼림칙하게시리..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는데 등어리만 손으로 밀면 금방이라도 때가 밀릴 듯 근질근질하다.
사각팬티만 걸치고 욕실에서 나와 작정하고 아내에게 말한다.
- 뭐가 그리 정나미가 떨어지는데? 당신 얼마 전에 큰 거 누다가 변기 막혔을 때, 그리 사정사정 부탁하길래 똥물 넘치는 꼴 다 봐 가면서 기어코 뚫어줬건만 이러기야? 그런 적이 한두 번이냐고? 참나.
아내는 안경 속 동그란 눈을 치켜뜨고 아무 말이 없다. 식탁 위에 놓인 두꺼운 책의 낱장이 휘리릭 넘어간다.
- 같이 살면서 너무 그러지 맙시다. 나이 들수록 손길 닿지 않고 어려운 일이 많을 텐데.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데, 원망스럽고 그러네.
아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문을 연다.
- 알았으니 내일 때 밀고 싶으면 말해. 당신 뒤에 피 맺히고 벌겋고 난리야
- 그건 아까 낮에 간지럽길래 효자손으로 벅벅 긁어서 그런 거라고. 그래도 때수건을 잡으면 굵은 지우개똥 떨어질 정도는 밀어줘야지, 이거 원.
아내가 '지우개똥' 이란 말에 살짝 웃음을 보인다. 더 이상 몰아붙이고 역정을 내면 잠자코 웅크린 암사자가
발톱을 세우고 덤빌 듯하여 흠흠거리며 내 방으로 물러선다. 밤이 깊어지자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이친다. 이부자리에 누워 옆에 누운 아내의 가슴골을 슬쩍 건드리니 힝 하고는 모로 돌아눕는다. 또 삐쳤구먼, 손을 뻗어 베개 위로 흘러내린 꺼칠한 머릿결을 다듬어주곤 '잘 자'하고 속삭인다. 우리는 오늘도 한 방에서 서로의 기척을 느끼며 잠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다음 날 아침 둘째 연이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묻는다.
- 아빠, 엄마가 어제 등 밀어줬어?
- 으응? 밀어줬지. 다음에도 밀어준다고 그러더라.
- 역시 엄마가 약속한 건 잘 지키지?
아이는 뭐가 그리 궁금하고, 걱정스러웠는지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 방으로 돌아간다.
혹시 다른 부모들도 아이들 앞에서 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어 약속한 것이 있다면 하늘이 두쪽 나더라도그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걸 명심하길 바란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약속이 지켜지는지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다.
그러니 당신, 처음엔 부담스럽겠지만 결혼 20년 아니 30년이 지나도 서로의 등을 밀어줄 수 있는 우애 좋은 부부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