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못 이룬 소원

그리고 선물..

by 라미루이





어머니가 따로 쟁여놓은 강낭콩을 본가에 들러 가져 가라 하신다.

전화를 했더니 대뜸 여동생 집에 와 있다고 다음에 오라 하시네. 마침 조카 준이에게 물려줄 그림책을 잔뜩 모아놓은 터라 아이들과 함께 들리기로 한다.


- 오늘 고모랑 사촌 동생 보러 갈까? 친할머니도 같이 계신데~~

- 좋아요, 가요.

- 그럼 점심 일찍 먹고 출발하자.


작년 겨울 조카 돌잔치 때 온 가족이 모인 것이 마지막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집콕 생활을 한지 벌써 5개월이 지났다. 가끔 전화 왕래만 할 뿐 고모네 집에 가는 건 오래간만이라 아이들도 기대 만발, 표정이 환하다. 끼니로 조미 김가루와 냉장고에 묵혀둔 반찬을 꺼내 먹고, 옷을 갈아입히고, 양치질을 하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 보니 벌써 오후 한 시가 지났다. 40여 권의 그림책 더미를 조수석에 싣고 네비에 동생 집 주소를 입력하니 32분 정도 걸린단다.


- 너희들 안전벨트 다 맸지? 시동 걸고 출발이다!


네비가 목적지까지 잘 도착해서는 단지 입구를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멀리 유턴해서 빙 돌아 도착했다.

인터폰을 누르니 출입문이 지잉~ 바로 열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어서 와라 하고 아이들을 부른다.


- 아, 안녕하세요.

- 고모한테도 인사해야지.


서먹한 표정으로 공손히 인사하는 아이들. 어머니는 더운 날씨에 편한 복장으로 거실에 앉으셨고, 동생은 식탁에서 음료수며 과일이며 준비하느라 바쁘다. 사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서인지 실내가 답답하지 않고 서늘한 느낌이 든다.


- 준은 안 보이네? 어린이집 갔나?

- 응, 이따 3시에 데리러 가야 돼.


아이들은 소파에 엉거주춤 앉아 할머니와 고모를 번갈아 흘끔거리며 탐색전을 펼친다. 고모가 씨 없는 포도와 골드 키위를 접시에 내오자 소파에서 흘러내리듯 내려와 주섬주섬 먹기 시작한다.


- 어머니, 저번에 충혈된 눈은 이제 괜찮아지신 건가?

- 안약 넣고 컴퓨터랑 폰 안 보고 그랬더니 회복되더라.

- 눈 조심하셔, 그 나이에 백내장 같은 걸로 고생하는 분 많아.

- 조심해야지


3시가 지나자 동생은 조카의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준은 낯선 손님을 보자 엄마에게 매달린 채 고개를 돌리고 울먹울먹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하다.


- 괜찮아. 삼촌이랑 누나들이야. 작년에 자주 봤잖아?


한창 낯 가릴 때인지라 엄마 옷 가랑이를 붙들고 곁을 떠날 줄을 모른다. 내가 슬쩍 눈을 마주치고 웃어줄 때마다 휙 고개를 돌리고 엄마 품으로 파고든다. 아이들도 어색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모르고 이러다 집에 돌아갈 때에서야 서먹함이 덜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럴 때 놀이터 가서 잠깐 놀고 그러면 금방 친해질 텐데.

- 그러게, 평소엔 장난기 엄청 많거든, 한시라도 가만 안 있는데...

- 삼촌이 비행기 놀이라도 해줄까? 엄청 높이 띄워줄 수 있는데~ 으하하


준은 더욱 기겁하며 엄마 등 뒤로 숨어버린다. 눈치 없이 더 다가가면 벌게진 뺨 위로 눈물이 주룩 흐를 것이다. 가지고 온 그림책 더미를 묶은 비닐끈을 풀어 책을 한 권 한 권 펼쳐서 보여주니 그제야 관심을 보인다. '그림책이 좋아' 시리즈의 사과 토끼가 여행을 떠나는 그림책과 곰 인형들이 병원을 찾아가는 책을 건네주니 표지를 유심히 바라본다. 삼촌이 책 읽어줄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니 아이는 얼른 숨어버린다.


- 말길은 곧잘 알아듣는데, 아직 책은 가까이하지 않더라고.

- 곧 "엄마, 아빠" 말문 터지면 글밥 적은 책들 읽어주면 좋아.

- 많이 읽어줘야지. 오빠가 가지고 온 책들 잘 읽을게.

- 그나저나 매부가 엄청 이뻐하겠네. 눈 위쪽으로 매부 많이 닮았어.

- 코랑 입은 나 닮았지? 발가락도 나 닮은 듯 해


동생은 아이의 앙증맞은 엄지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방긋 웃는다.


- 눈썹도 친가 쪽 닮았나 보네.

근데 눈썹 끝이 부채처럼 넓게 퍼지는 게 우리 아버지 닮은 듯하다.

- 오빠도 그렇게 생각해? 눈썹 숱이 없긴 한데 끝이 가지런히 퍼지는 게.

볼 때마다 신기하더라고.


친가 쪽이 전체적으로 숱이 많이 없다고. 매부가 고민 끝에 눈썹 문신까지 했다고 넌지시 말하고는 웃는 동생. 조카는 다행히 머리숱이 두텁고 풍성하다. 머릿 구멍 하나에 머리숱이 두세 개는 솟아난 듯하다. 미소를 품은 동생의 눈썹 그리메를 보자 먹물을 듬뿍 머금은 대 붓으로 힘차게 그은 가로획을 닮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눈썹 모양이 떠오른다.


- 사실 아버지가.. 준이 태어나기 전에 잠결에 나타나서 이름을 써주셨거든.

- 정말? 뭐라고 써주셨는데?

- 준원이라고... 하얀 종이에 한글로 또박또박 써서 보여주시더라

- 허, 그 정도로 생생한 꿈이면 태몽이나 마찬가지네. 하늘 가신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서 선물해 주신 거야.

- 남편한테 그 꿈을 얘기했거든. 그랬더니 집에서는 준원이라고 불러.

외할아버지가 하늘에서 지어주신 이름이라 자주 불러주면 복이 들어올 거라면서.

- 준이, 준원이. 둘 다 '준' 이 들어가네. 신기하다. 정말로...


아버지는 저 하늘에서도 여전히 우리 가족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뒤늦게 알았지만 동생이 늦은 나이에 결혼식을 올릴 때에도 꿈에 나와 밝은 얼굴로 기뻐해 주셨다고 한다. 생전에 아버지는 웨딩드레스에 면사포를 걸치고, 부케를 든 동생의 결혼식에 같이 입장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십 년만 더 살아계셨으면 그 소원을 이루셨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병이 악화되어 환갑에 못 이르시고 돌아가셨다. 아버지 생각에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하지만 어여쁜 손주들이 한데 모인 것을 보면, 넉넉한 웃음으로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 주시리라 믿는다.


-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때 이후로 참 많은 일이 있었어. 우리 둘이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 그러게. 나 결혼하고 '준'이 태어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린이집 다닐 정도로 자랐다니.


코로나 바이러스로 달라진 일상과 아이들 키우면서 꽃피는 애로 사항을 이야기하다 보니 벌써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주방에 대리석 재질의 식탁 모서리가 날이 서 있다. 멋 모르고 조카 준이 일어서다 부딪혀 다칠 것만 같았다. 마침 동생이 주문한 몰딩, 모서리 보호대가 있어 식탁 모서리를 따라 빈틈없이 둘러 붙여주었다. 아이는 신기한지 푹신한 스펀지 재질의 보호대를 꾸욱 눌러보고 떼어내려 한다. 곧이어 날 바라보며 삼촌이 이걸 붙였다면서 손가락질한다.


- 그래, 삼촌이 우리 준이 다치지 말라고 해준 거야. 다치지 않게 잘 자라야지.


아이가 조막만 한 손을 모아 박수를 연달아 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기뻐하는 조카의 손을 슬며시 잡아끌어 얼마 되지 않는 지폐 몇 장을 쥐어주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예솔이와 하연이는 어느 틈에 받았는지 5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고 신발장 앞에 서 있다.


- 어이구, 안돼. 너무 큰돈이야 다시 돌려줄게.

- 가끔 보는 건데, 그냥 받아둬.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에 받은 돈을 돌려줄까 하다가 준을 안고 있는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쌓인 어려움과 슬픔을 알기에 동생의 호의를 애써 무시하지 않기로 한다.


- (그래, 이 오빠가 노력해서 잘 되면, 크게 되면 두 배로 갚으마. 잘 살아!)

건강 조심하고, 어려운 일 생기면 전화하고. 알았지?


천천히 닫히는 철제문 사이로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의 모습이 사라진다. 종이돈과 봉지과자를 들고 선 아이들이 날 보고 웃는다.


- 너네들은 오늘 먹을 복도 터지고, 이래저래 운수 좋은 날이네. 그 돈은 집에 가서 엄마한테 고대로 드려라, 알았니?

- 네, 아빠.


급 시무룩해진 서로의 표정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가만가만 말해본다.


-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은 건강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저쪽 세상에서 바쁘지 않으시면 제 꿈에도 들려주세요. 아버지!



IMG_20200504_160404.jpg 엘리베이터에서 마스크를 쓴 채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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