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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고현 히메지 성, 앵문교, 백로성, 천수각, 대천수

오키쿠 우물, 반쵸 사라야시키 기담, 유령담

by 라미루이

2010.02.16












9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히메지 성'. 일본 성곽 중 최전성기의 건축 양식과 구조를 잘 보존하고 있는 성채다. 다층 누각으로 이루어진 천수각은 양 날개를 펼친 백로와 닮았다 하여 '백로성(白鷺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며칠 전 들른 오사카 성에 비해 히메지 성은 천수각 꼭대기가 하늘에 더 근접한 듯하고, 벽면의 백색이 더 강조되어 보인다. 전란이나 방화로 인한 화재를 막기 위해 외벽에 흰 회칠을 하고 석고를 발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붕과 처마에 솟아오른 뾰족함과 우아한 곡선이 어울려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상을 표현한다.


성채로 들어가는 가교 역할을 하는 '앵문교'를 지난다. 장애물 역할을 하는 해자는 깊어 보이며, 수면 위로 청둥오리들이 각자 짝을 찾기 위해 제멋대로 흩어진다. 간혹 순백의 백로가 우아한 자태를 과시하며 날아오르다가 가까운 수면 위 고개를 내민 암석에 안착하기도 했다.


교각 위에서 성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여행객들은 웅성대다가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성벽 사이 문을 통과할 때마다 간격이 넓은 돌계단이 완만한 코너를 그리며 왼쪽으로 휘어진다. 이 길을 따라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여러 가문 일족, 다이묘들이 출입했을 것이다. 참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성주였던 시절에는 흑까마귀와 같은 검은색 성이었는데, 이후 이케다 가문이 건물을 철거하고 지금의 백로를 닮은 새하얀 히메지 성을 지었다고 한다.


순백의 백로성이 우아하고 고결해 보이긴 하나, 순수 블랙 톤의 '흑귀성' 또한 카리스마 넘치는 음울한 포스를 발했으리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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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 내부 계단을 통해 최상층 '대천수'로 오른다. 지붕을 덮은 기왓장은 정연하게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 끝은 살짝 들려 버선코와 비슷한, 도도한 느낌의 곡선을 그린다. 각 지붕 귀퉁이 추녀와 용마루 끝에는 액운과 화기를 물리치는 동물 형상의 잡상(雜像), 신수(神獸)가 세워져 있다. 뒷모습을 보면 얼핏 고개를 치켜든 용 또는 봉황을 닮았다.


외창을 통해 내려다본 히메지 시는 햇빛이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춘 탓에 회백색을 띠었다. 차들이 꼬리를 물고 진군하는 히메지 대로 끝에는 히메지 역 건물이 보인다. 히메지 성과 천수각을 지키는 요괴 '오사카베히메'는 히메지 시 전체를 관장하고 수호하는 힘을 지닌 듯했다. 사방을 돌아다니며 동서남북의 각기 다른 풍경을 조망하니, 남쪽 멀리 푸른 바다와 접한 항구가 얼핏 보였다. 날씨가 화창했다면 더 멀리, 선명한 이미지와 실루엣을 감상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정상에서 하산하는 기분으로 천수각에서 지상을 향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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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 앞에는 '오키쿠 우물 Okiku Well'이라는 깊은 우물이 보인다. 굵은 석주 여럿을 깊이 박아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다. 오사카 성에도 우물이 있었는데, 히메지 성의 오키쿠 우물이 훨씬 까마득 깊어 보이고, 그 안에 품은 사연은 절절해 보인다.


이 우물은 대대로 전해지는, '반쵸 사라야시키'라는 유령담, 기담을 품고 있다. 히메지 성의 유력한 무사 가문에서 일하던 하녀 오키쿠(お菊). 그녀는 성주의 음모, 계략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데..

집 안에 가보처럼 보관하던 열 개의 값비싼 접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훔쳤다는 의심을 받게 된 오키쿠. 성주는 그녀를 모질게 구타하고 고문한 끝에, 화근을 없애기 위해 저 우물에 던져 죽이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로 밤마다 오키쿠의 원혼이 우물 위로 떠오르면서 성내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한다. 물에 흠뻑 젖은 기모노를 입은 정체 모를 여자가 성내를 맨발로 헤맨다든지, 누군가 몽유병이 도졌는지 아니면 귀신에 홀렸는지 잠든 채로 우물 주위를 배회하다가 몸을 던졌다든지 하는..


우리는 우물 앞에서 그녀의 명복을 빌고, 조용히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천천히 아홉까지 세고서 귀를 기울여도 돌아오는 것은 아득한 침묵뿐이다. 그녀의 한 맺힌 원혼이 진즉 성불했구나.. 안심하면서 걸음을 옮기는 찰나.


저 아래 깊고 낮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희미한 탁성이 터진다.

"줏코(열 개).."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섬뜩한 느낌에 선을 쳐다보았다. "지금 아무것도 못 들었어?"

"뭘 들어? 아무 소리 안 들리는데.."

난 오키쿠 우물로 가까이 다가가 소리의 진위를 알아보려 했지만, 낮게 깔리는 음습한 기운에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어서 가자, 느낌이 안 좋다." 선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뒤를 따랐다.

가까운 성문 입구를 넘으려 하는데 저 뒤에서 가슴이 끓어오르는 듯한.. 어느 여인의 추추귀성, 울음이 새어 나오길래 하마터면 비명을 지르고 두 귀를 막을 뻔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물에 잠기어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 파문으로 번지는 울음.


오사카 성에서도 그랬지만, 유서 깊은 히메지 성 깊은 우물에 잠긴 한 맺힌 원혼은 여전히 저 아래서 떠돌고 있었다. 지하에서 헤매는 그녀의 성불은 악랄하고 교활한 옛 성주의 직계 후손이 자신의 피를 한 사발은 바쳐야만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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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JPG?type=w1 '반쵸 사라야시키' 기담을 품은 오키쿠 우물. 다가가 아래를 내리보면 엄습하는 귀기에 소름이 끼친다. 심약하고 꿈자리 사나운 이들은 멀리 돌아가길 바란다.



'반쵸 사라야시키' 기담을 품은 오키쿠 우물. 다가가 아래를 낮보면 엄습하는 귀기에 소름이 끼친다. 심약하고 꿈자리 사나운 이들은 멀리 돌아가길 바란다.


난 앵문교를 건너기 전, 그제야 뒤를 돌아보고 성호를 긋고 합장하며 그녀의 안식을 빌었다.

멀리 짙은 회백색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소름 끼치는 귀기를 내뿜는 음산한 혼령이 우리를 덮쳐도..


어찌했든 간사이 여행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선과 난 서로의 손을 맞잡고 고성을 떠나 다음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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