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ㄱㄷㅎ 12-3

by 매일의 기분

17.

퇴근길에 지하철역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는데, 무언가 뒷통수가 오싹한 기분이 들어 뒤를 보니 어떤 남자(30대 후반으로 추정, 껄렁껄렁해보임) 하나가 뒤를 바싹 좇아오고 있었다.

대로변이기에 그냥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어쩐지 찜찜해서 걷다 말고 가만히 서 있는데 그 남자가 내게 다가오더니 "혹시 근처에 신협 있어요?(껄렁)" 하고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고 하고 계속 가만히 서 있는데 그 남자는 잠시동안 (5초?) 내 주변을 얼쩡거리더니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다른 사람에게 신협의 위치를 물었다.

진짜 그냥 길을 묻는 사람일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소름끼쳐서서 평소와는 다른 길로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뒤를 계속 쳐다보며 그 남자가 따라오는지 봤는데, 다행히 따라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에 가는 내내 불안했고, 골목길을 꺾을 때마다 급히 뛰어서 건물 뒤에 숨고 뒤를 보기도 했다. 결국 집에 올라가서는 불을 켜지 않고 창 밖으로 누가 있는지까지 살폈다.

오버스로운 행동일수도 있지만 내 뒤를 바짝 좇아오던 그 남자의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평소에도 지하철역 근처에 종교인(개신교 or 대순진리교)들이 종종 말을 걸어왔는데, 이번에는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아서 더욱 섬뜩했다. 집에 와서도 한동안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남자인 나도 이런데 여자라면...)

18.

매달 20일 전후로 이발을 한다. 작년 12월 23일에 현재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쭉 집 근처에 있는 미용실 한 곳만 갔는데, 오늘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깎고 계산을 하니 13번째로 방문했다는 문자가 왔다. 작년 12월에 처음 방문했으니 딱 1달에 1번씩 머리를 깎은 셈이 된다.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하는 나... 비정상인가요?

(더불어 이발을 하는 날은 면도날과 칫솔을 가는 날이기도 하다.)

19.

오랜만에 회사에서 사무실 전체 회식을 하였다.(송년회) 원래 회식을 끔찍하게 싫어하지만(술도 못 먹고) 요즘은 생각을 좀 바꾸고 있다. 회식에서 회사 돌아가는 얘기+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걸 엄청 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회사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결국 정보가 자원이자 무기가 된다.

회사 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가장 많이 연봉을 올리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 생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회식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전처럼 싫어하기보다는 나름의 의미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다.

20.

어엿한 30대 중반이 되며 많은 것이 변했지만, 20대 시절 대비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자의식이 약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그리고 그렇게 된 게 너무 좋다.) 20대 때에는 뭘 하든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에 많이 집착했던 것 같다. 특히 SNS같은 곳에서 그랬다.

재수를 하고 1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던 2006년에 학교에서 적응을 잘 못하고 친한 사람 하나 없이 데면데면하게 찐따처럼 다녔는데, 그때는 너무 불행했다. 단순히 아싸처럼 다니는 게 잘못이고, 불만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내가 원해서 아싸가 된 것이라면 그것은 불행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하고 친하고 재미있게 잘 지내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을 풀 데가 없어 SNS에서 발산했다. 친하지 않지만 대학의 사람들과 어떻게든 싸이월드(당시 주류) 일촌을 맺고, 그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내용의 글들을 많이도 올렸다. 그냥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고 싶었던 것 같고, 나는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쓰는 글 속의 나는 '실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나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이젠 30대가 되고 자의식 약해지니 그런 집착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참 편하다. 남들이 나에 대해 조금 오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또한 남들이 그만큼 나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도 진심으로 알게 됐다.

물론 이렇게 블로그도 열심히 하고, 내 얘기도 많이 쓰지만 그 의도가 20대 때와는 전혀 다르다. 단순히 나의 현재를 기록하고, 내가 어떤사람인지 쓰면서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기 위해 쓰고 있다. (실제로 블로그 이웃들 중 실친도 별로 없고.)

더불어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은 그런 글들이 나를 더 멋없게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21.

연말이라 회사에서 남은 연차를 돌아가며 쓰다보니 사무실이 휑하다. 어쩐지 사무실 분위기도 느슨한 느낌이다.(이래도 저래도 월급이 나온다는 것은 월급쟁이의 장점이기도...)

다음 주 월요일에도 휴가를 많이 써서 절반 정도밖에 출근을 안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남은 휴가가 없어서 못 쉰다 ㅠㅠ

22.

미세먼지가 많은 날이었지만, 날씨는 늦가을정도로 춥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겨울도 무서울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다음 주부터 다시 추워진다고 ㅠㅠ)

저녁 8시부터 크리스마스 당일에 있을 세례 성사 예식을 연습해야 해서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다. 시간 맞춰 성당에 가서 한 시간 반 정도? 연습을 했다. 벌써부터 살짝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00.jpg 우리 성당의 구유


연습을 마치고 집에 와서 쉬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더니,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미대 입시를 함께 준비하며 같이 미술학원을 다니던 친구였다.(고등학교 때 미대 진학을 꿈꿨었음)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8~9년 정도 전이었던 것 같은데(미술학원 선생님 결혼식 때) 갑자기 연락이 와서 처음엔 좀 당황을 했다.

사실 내 나이쯤 되면 오랜만에 연락오는 고등학교 동창의 전화는 대부분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결혼을 해서 연락하는 거냐고 먼저 선수쳐서 물어보니 함께 미술학원에 다녔던 또 다른 친구와 술을 먹는데, 그냥 생각나서 했다는 것이었다. 어쨌건 간단히 안부를 물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잠시 한 뒤에, 나중에 시간되면 보자는 모호한 이야기만을 남긴 채 통화를 끝냈다.

고등학교 때 미대입시를 준비할 때 나는 그림을 정말 못 그렸었다. 애초에 미술을 잘 하는 편이 아니었는데도, 그냥 만화가 좋고 미대에 가고 싶어 무턱대고 고1때부터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림을 제법 그렸던 애들을 따라가기엔 무척 벅찼다. (바보처럼 열심히 하긴 하는데 센스가 없다보니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는 짠한 캐릭터)

피시방에 간다고 학원 빠지는 애들보다도 못 그리고, 같이 대회에 나가서 나만 상을 못타기도 하고... 그런 일이 겹치다보니 자존감도 바닥으로 떨어졌고, 미술을 하는 일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고 우울했었다. 특히 연락을 해온 친구는 만화를 무척이나 잘 그려서(큰 만화 대회에서 상을 타서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함) 내심 질투도 많이 했었다.

그 뒤로 나는 미술을 그만 두고 재수를 했고,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해 대학에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술로 대학에 가려고 했던 게 내 몸에 맞지 않는 옷같은 것이었고, 한 번 시작했으니 아까워서 계속한 바보같은 행동이었다. 또한 내가 잘 하는 것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나니 실제로 큰 어려움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연락이 오고, 연락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는데, 그 시절의 자격지심같은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남은 것은 나를 생각해서 오랜만에 전화를 먼저 걸어 줬다는 그 고마움 뿐이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정말 너무도 힘들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인 게 새삼 신기했다. 내가 조금 더 단단해 진 것일까.

23.

여자친구와 종로에 가서 맛있는 밥을 먹고, 명동에서 옷구경도 좀 하다가 명동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집에 왔다. 이것이 요즘 나의 가장 평범하지만 행복한 주말이다.


00.jpg 명동 성당의 구유


매년 한 권의 독립출판물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년에는 이 일기를 모아서 책을 만들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주간 ㄱㄷㅎ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