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걸이와 피어싱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었다. 군대 입대 직전에 A와 함께 갔던 게 마지막이었으니, 거의 십년 만에 다시 방문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갔지만, 여전히 왜 이곳이 무료 입장인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흥미롭고 좋은 전시품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가장 재미있게 봤던 것은 신라의 '유리'였다. 로마의 유리가 중동의 상인을 통해 신라까지 흘러 들어 온 것은 언제 생각해도 신비롭다.
신라의 유물 중 흥미로운 것은 이뿐만 아니다. 신라(삼국시대)의 유물들 중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역시 화려한 장신구들이다. 북한과 중국 땅에 있던 고구려의 유물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경주와 무령왕릉(내고향 공주)에서 많이 발굴해 낼 수 있었던 신라와 백제의 유물들 중에는 화려한 장신구들이 많다. 1,000년도 넘은 옛날에 어떻게 저렇게 정교한 장신구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보면 볼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유교 사상(돈을 천시, 소박함 강조) 때문에 화려한 장신구를 하는 것을 금기시하게 되었지만,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화려한 장신구를 하는 것은 우리 민족에서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 중에도 우리민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귀걸이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군대를 전역하고 뒤늦은 사춘기가 왔는지 해보고 싶은 것들(작은 일탈)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그것들 중 가장 먼저 한 일은 귀를 뚫는 것이었다. 전역한 지 일주일이 되지 않아 나는 금은방에 가서 검은 색의 귀걸이 한 세트를 샀다. 그리고 주인 아주머니께 귀를 뚫어 달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로는 귀를 뚫을 때 총같이 생긴 기계를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막상 뚫어보니 그냥 주인 아주머니가 손으로 뚫어줬다. 귀에 마데카솔 같은 연고를 잔뜩 바른 후 귀를 주물럭거리며 마사지하고 귓볼에 귀걸이를 단번에 뚫어 넣었다. 약간의 진통과 살이 뚫리는 '투두둑' 소리와 함께 귀는 금방 뚫렸다. 며칠 동안은 귀가 얼얼하긴 했지만 많이 아프진 않았다.
귀를 뚫은 것은 내 나름대로의 일탈(?)이었다. 태어나서 군대에 다녀올 때까지 이렇다 할 일탈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길을 걷다가 창에 비친 내 귀에 걸린 귀걸이를 볼 때마다 무언가 설레는 마음이었다. 잘 나가는 일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몇 달이 지나고는 피어싱을 했다. 오른쪽 귀 귓바퀴에 두 개의 피어싱을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귀걸이를 하고 나니 피어싱도 해보고 싶어서 했다. 피어싱은 아무래도 구멍의 크기가 귀걸이보다 크기 때문에 조금 더 아팠고, 귀를 뚫을 때 보다 조금 더 관리가 힘들긴 했지만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아팠던 것은 그 다음 피어싱을 했을 때였다.
일본의 밴드 토toe의 공연을 보고 왔는데, 그 중 스탭 한 명이 인더스트리얼 피어싱을 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나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충격적일정도로 아팠다.
특히 위쪽 귓바퀴는 연골(부드러운 뼈)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뚫기도 힘든데다가 아프기도 엄청 아프다. 뼈를 뚫는 거니 당연히 그렇게 아플 수밖에 없는데, 힘들게 뚫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그 이물감이 대단했다. 특히 샤워를 하며 실수로 건드렸을 때는 죽을 것 같았다.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귀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피어싱은 습관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를 하면 계속 하고 싶어진다고 해서 그런 말이 있는 것이다. 다행히 나의 습관은 여섯 개가 마지막이었다.
대학교 4학년이 되고, 취업을 준비하고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 자연스레 피어싱과 귀걸이를 빼게 되었다. 몸에 잘 맞지 않았는지, 귀걸이와 피어싱을 하는 내내 정기적으로 귀가 붓곤 했는데 이것들을 다 빼고 나니 그럴 일도 없었다.
아직도 피어싱과 귓걸이 구멍은 완전히 막히지 않은 것 같기는 하지만 다시 귀걸이를 하고 다니진 않을 것 같다. 이제 귀걸이를 한다고 해서 특별하고 잘 나가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대신, 요즘은 문신을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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