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행의 맛

츄로스의 r 발음

부엔 카미노, 좋은 길 되길

by 매일의 기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지 10일 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지난 열흘 간 200여 km를 걸어왔다. 이제 함께 걷고 있는 다른 순례자들도 점점 낯이 익어가고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 스페인에 있는 가톨릭의 성지순례길이다. 800여 km의 길을 30~40일간 걷는 도보여행길이기도 하다.


10일째의 여정은 그라뇽에서 토산토스까지의 22km였다. 새벽 6시 30분부터 오후 12시까지, 5시간 30분 정도를 걸어 토산토스의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에 도착했다. 시간이 일러서 그랬는지 내가 토산토스의 알베르게에 도착한 첫 순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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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 토산토스의 알베르게



토산토스는 아주 작은 마을로, 호스피탈레로(알베르게를 운영, 관리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곳엔 슈퍼도 없고, 대신 작은 바르(스페인식 술집+레스토랑)만 하나 있다고 한다. 우선 알베르게에 등록을 하고, 자리를 잡아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씻고 내려와서 점심 식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바르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이곳까지 오던 길에 있던 바르에 들러 음료수와 빵을 사먹었기 때문에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숙소에 돌아와 호스피탈레로가 주는 초리소(스페인식 소시지)와 와인을 얻어먹고 낮잠을 잤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오후 4시가 넘어 있었다. 슬슬 내려가서 주방과 거실을 기웃거리니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호스피탈레로가 알베르게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자에 한해) 오후 6시에 마을 뒤쪽에 있는 작은 동굴 속에 있는 성당을 간단히 소개해준다고 했다. 가보기로 했다.

시간이 되니 마당에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사실 순례길엔 별달리 할 게 없었기 때문에, 알베르게에 묵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였다. 마을 뒷산에 있는 성당은 도보로 5~10분 정도 걸릴 정도로 가까웠다. 가이드는 마을에 오래 살아 온 동네 주민 할머니였다. 그 할머니는 이 성당의 유래와 그 속에 살던 몽크(수도사)들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IMG559.jpg 마을 뒤편 작은 동굴 안에 성당을 지어 놓았다.


성당 구경을 마치고 알베르게에 돌아오는 길에 곁에서 걷던 중년의 여성 한 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순례길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말을 걸기가 편하다. 국적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나이가 달라도, 함께 '걷고 있다'는 동질감은 우리를 가깝게 만든다. 일종의 전우애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에게 의례 하는 질문들을 던졌다. 어디에서 왔고, 이 길에 왜 왔는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치 못하게 묵직했다.

순례자들 사이에서는 전우애와 흡사한 비슷한 분위기가 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출신의 수잔나는 삶의 구석에 몰려 있었다. 그녀는 얼마 전 연인과 헤어졌고, 하던 사업도 잘 되지 않아 현재는 접어 둔 상태라고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갑자기 자신이 그동안 열심히 노력하고 쌓아 올렸던 것들이 한순간에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한 것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그녀는 순례길로 떠나 왔다. 일종의 도피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나의 상황도 그리 다른진 않았다. 나도 대학 졸업반에 운 좋게 들어갔던 직장을 세 달만에 그만두고 도망치듯 이 길로 떠나온 참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잘 몰랐고 그래서 솔직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의 무게가 달랐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고 짊어진 것의 크기가 달랐다. 그녀의 무릎은 나보다 크게 휘청거렸을 것이다. 나는 수잔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처음 본 사이에, 가족에게도 하지 못할 말들을 할 수 있던 것일까. 그것은 순례길 특유의 분위기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잘 몰랐고 그래서 솔직해질 수 있었다.

수잔나와 나는 편히 하기 어려운 말들을 나누고 있었지만, 우리의 대화 분위기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 그저 나는 이러한 문제들이 있어, 나는 이런 상황이야. 담담히 털어놓을 뿐이었다.



짧은 가이드 투어를 마치고 알베르게에 돌아와서는 순례자들이 함께 일을 분담해 저녁을 차렸다. 감자를 깎고 수프를 끓이고 설거지를 했다. 순례길의 하루는 또 조용히 저물었다.

IMG561.jpg 식사 앞에서 평등한 순례자들.


순례를 위해 다음 날에 일찍 일어나 알베르게에서 주는 아침을 먹는데 수잔나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수잔나, 나는 이 순례를 마치고 마드리드에 갈 거에요. 마드리드에 가선 무엇을 먹어야 하나요?

수잔나는 종이가 모자랄 정도로 메모를 해가며 친절히 마드리드의 명소와 맛집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맛있는 츄로스 집을 묻는 나의 질문을 수잔나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몇 번의 반복 끝에 그녀는 '아 츄로ㄹㄹ스!' 라며 알았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수잔나는 내게 츄로스의 스페인식 발음을 따라하게 했다. 너그러운 그녀는 내 어설픈 발음에도 굿good 을 연발했다.

그리고 수잔나와 나는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났다. 순례길에서 이별은 곧 만남과의 동의어다. 우리는 서로에게 '부엔 카미노 buen camino' (좋은 길 되길)라고 인사했다.




그리고 이십여일 뒤, 나는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의 곳곳을 구경했고, 수잔나가 말해줬던 곰 동상(마드리드의 상징) 앞에서 사진을 찍고 솔 광장에서 샹그리아를 마셨다. 프라도 미술관에 갔다.


IMG1202.jpg 마드리드의 상징은 곰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츄로ㄹㄹ스'는 먹지 못했다. 그리고 수잔나가 말해 주었던 곰과 얽힌 마드리드의 탄생 설화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수잔나가 말해 주었던 츄로스의 r 발음만큼은 생생했다. 그 뒤로 츄로스를 먹을 때 마다 수잔나를 떠올렸다. 아마도 츄로스의 r 발음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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