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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일의 기분 Nov 16. 2016

삶의 불문률

지하철 환승 시간이 촉박하여 급히 뛰고 있는데, 에스컬레이터가 나왔다. 나는 자연스레 에스컬레이터 왼쪽 줄에 서서 걸어 올라갈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앞에 탄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지하철 한 대를 놓치고 다음 것을 타게 되었다. 사실 에스컬레이터에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내 앞에 있던 사람이 특별한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괜히 그 사람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사회 속에는 어떠한 ‘불문률’이란 것이 존재한다. 출퇴근 시간에 에스컬레이터를 타서 가만히 서 있을 것이라면 꼭 오른쪽으로 타서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왼쪽으로는 급한 사람들이 걸어서 올라가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런 것을 배우지 않지만, 지하철을 타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다.




에스컬레이터의 왼쪽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실례합니다’를 외치면 그 사람은 걸어서 올라가거나 오른쪽으로 비켜준다. 명문화 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행동한다.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이 법칙은 상당히 미묘하다. 한 줄짜리 에스컬레이터의 경우에는 가만히 서 있어도 무방하다. 만약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의 앞에 한 줄짜리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면, 그는 계단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서 앞 사람에게 ‘실례합니다’를 외쳐도 소용없다. 급한데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이 잘못인거다. 




지하철에 탔을 때 자리에 앉는 것에도 법칙이 있다. 한 명의 승객이 내릴 역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날 경우, 그 앞에 있는 사람에게 자리에 앉는 우선권이 주어진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더 오래 전부터 지하철을 탔더라도 그에게는 자격이 없다. 
  
다만 강호의 도리를 아는 사람들도 있다. 지하철에 타자마자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일어났을 경우, 옆에 먼저 서 있던 사람에게 한 번쯤 눈짓으로 양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배려’일 뿐이다. 매섭게 난 자리에 앉아도 아무도 탓할 길이 없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문을 할 때 먼저 들어왔더라도 메뉴를 정해놓지 않는다면, 뒤늦게 들어온 메뉴를 정한 사람에서 먼저 주문권을 줘야 한다. 길게 늘어선 줄에서 일행에게 잠시 자신의 자리를 맡기고 다른 볼일(화장실에 다녀 오거나)을 봐도 좋다. 대표자 한 명만 있어도 그 일행 모두의 순서는 지켜진다. 소매점에서 너무 적은 금액(보통 5천원~1만원)은 카드로 계산하는 게 실례다. 등등 우리 사회에는 굳이 성문화되어있지 않지만 사회 구성원들 나름대로 합의를 본(봤다고 느껴지는) 많은 규칙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규칙들을 잘 지키지 못했을 경우, 왠지 모를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지하철 개찰구를 나갈 때, 교통 카드에 한 번에 찍히기를 기도한다. 두세 번 실수로 터치를 반복할 경우 왠지 ‘사회 구성원들 나름의 규칙’을 어긴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이것은 버스에서는 왠지 2번까지는 실수가 허용되는 듯하다.) 그리고 한 번에 잘 찍히면 알 수 없는 편안한 안도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감정을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이건 분명한 비약이다. 하지만 한 번에 교통카드를 찍지 못하고, 두세 번 반복했을 때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불문율도 일종의 '법칙'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런 감정 때문에 우리는 매일을 무사하고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특별할 것 없는 무난한 하루가 어쩌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도 점심을 먹으러 나와서 다른 사람들이 6명이 짜장면을 시키면, 짬뽕을 시키지 못하고 ‘짜장 7개!’를 외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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