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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일의 기분 Nov 20. 2016

사소한 계기

내 영어 실력에 대해 솔직히 말해보자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며 철저히 입시 위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영어에 흥미라곤 하나도 없었고,(핑계) 그 덕분에 학창시절 내내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모의 고사를 볼 때면 절반을 겨우 맞추는 수준이었고, 재수를 하면서 겨우 받은 점수가 75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준비했던 토익 점수 또한 705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철저히 정답을 맞추고 점수를 얻기 위한 공부였기 때문에 실제 회화나 듣기 실력을 더욱 형편 없었다. 이런 내가 바뀔 수 있었던 것은 해외 여행덕분이었다. 영어가 학문이나 시험이 아닌 '의사소통 수단'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영어가 좋아졌다.



                                                                                            

워킹홀리데이+영어를 배우러 간 뉴질랜드에서 지내는 몇 달 동안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어 원서로 된 책을 읽어보았다. 그 전까지는 영어 원서로 된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를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내 독해 능력은 철저히 단어들 각각을 해석해 합치는 것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학원을 다니면서 과제로 받은 영어 원서 읽기를 진지하게 해보면서, 처음으로 원서로 된 '어린 왕자'를 읽게 되었다.(엄연히 말하면 어린 왕자의 원서는 프랑스어판이겠지만)

처음으로 원서를 읽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사소한 문장 하나들까지도 철저히 해석하려고 사전을 몇 번이고 뒤져보았다. 한 시간을 읽어도 몇 페이지 읽지 못했지만, 원서가 읽힌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감동이 더 컸다. '어린 왕자'는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었지만 거의 한 달이 걸려 그 책을 겨우 다 읽었다. 처음으로 원서로 된 책을 읽었다는 감동은 생각보다 컸다. 너무도 기뻤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는 내가 가장 원서로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을 골랐다. 현대 영미문학을 늘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미국의 단편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였다. 레이먼드 카버의 책은 역시 어린왕자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았지만,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단편이었기 때문에 호흡이 짧아 오히려 읽기 편할 것도 같았다. 나는 호기롭게 '제발 조용히 좀 해요'(will you please be quite, please?)를 읽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1/3정도를 읽던 중 한국에 돌아왔고, 돌아와서는 역시 게을러져서 영어 공부를 더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그의 단편 하나 하나를 읽어 나가면서 느낀 감동만큼은 대단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워서로 읽는다는 기분은 정말 좋았다. 그가 어떤 단어를 썼고, 어떤 문장을 썼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영어를 더 잘했다면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읽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 경험이라는 말이 있다. 학창 시절 영어에 대해 내가 늘 자신이 없었던 것은 성공 경험이 없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내가 처음으로 영어에 성공 경험을 느낀 것은, 말도 안 되는 영어 실력으로 외국인들과 의사소통을 한 것이었던 것 같다. 형편없는 실력이었지만 말이 통한다는 것을 느낀 것은 큰 동기 부여가 되었던 것이다. 

어린왕자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영어로 읽은 것 또한 좋은 경험이 되었다. 애니를 좋아해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다는 사례처럼, 어쩌면 사소한 일들이 나중에 일어날 결과의 큰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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