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이 축복인 줄 알았다. 예지몽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자각했던 날에는. 열네 살 생일날, 수연의 꿈속에서 하얀 강아지가 담벼락을 넘으려다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에 수연은 등교하는 길에 어느 집 담장에서 굴러 떨어지는 하얀 강아지를 보았다. 일주일 뒤에는 꿈에 조그만 여자아이가 등장했다. 꿈에서 아이는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맹렬히 달려오는 자전거에 부딪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사흘 뒤 도서관 앞 횡단보도에서 수연은 꿈에서 본 그대로 사고가 일어나는 관경을 목격했다. 자신이 예지몽을 꿀 수 있음을 알았을 때 수연은 흥분했다. 꿈으로 수능 시험의 정답을 미리 알 수 있지 않을까. 로또 당첨 번호가 꿈에 나올지도 몰라. 예지몽으로 장차 닥칠 불운을 미리 알아차리고 피할 수 있다면 앞으로 내 삶은 어떤 암초에도 걸리지 않고 순탄하게 흘러갈 거야.
한껏 고조된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고 절망으로 곤두박질치기까지는 일 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수연의 예지몽은 행운을 계시하지 않았다. 간절히 바라며 잠들었기 때문인지 꿈에서 중간고사의 답지를 보기도 하고 로또 번호 여섯 자리가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했지만, 꿈에서 본 숫자대로 작성한 답안지는 오답 투성이었고, 흥분 속에서 기입한 로또 복권 숫자는 단 한 자리도 맞지 않았다. 반면에 현실에서 절대로 실현되지 않길 바랐던 악몽들은 어김없이 수연의 삶 속에서 재현되었다. 꿈에서 팔이 부러진 오빠는 이튿날 축구 경기를 하다가 오른팔이 골절되었고, 펄펄 끓는 물이 다리에 쏟아졌던 꿈을 꾼 다음날에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실수로 뜨거운 커피를 쏟아서 왼쪽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예지몽으로 예견한 불운은 어떤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었고, 피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큰 불행으로 번졌다. 친한 친구가 학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발목을 접질리는 꿈을 꾸었을 때 수연은 친구에게 학교 계단을 다닐 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 친구는 주말에 가족들과 등산을 갔다가 발목이 크게 꺾여서 수술까지 받았다. 남자친구가 농구 시합을 하다가 허리를 다치는 꿈을 꾼 날 수연은 애인에게 농구를 절대 하지 말라고, 나와 만나는 동안 잠시라도 농구를 했다가는 당장 절교하겠다고 울면서 애걸했다. 그 아이는 황당해하면서도 농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다음 날 남자친구는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다가 내리막길에 굴러서 척추가 골절되었다. 다행히 하반신 마비까지 가지 않았지만 척추에 철심을 여러 개 박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연은 예지몽을 꾸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덕분인지 열여섯이 된 이후로는 예지몽을 꾸지 않았다. 악몽을 몇 번 꾸기는 했지만 예지몽을 꾸었다가 깨어났을 때처럼 꿈의 내용이 현실로 바뀔 것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연의 표정이 밝아졌고 예지몽에 사로잡혀 불행했던 지난 시절을 보상하듯 행복이 잇달아 찾아왔다. 수연의 성적은 애매했지만 그해 처음 시작된 학생부 종합 전형을 타고 수도권 내 이름 높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고, 우연히 지원한 학생 인턴십 프로그램에서 인사처 부장의 눈에 들어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잘 나가던 대리와 눈이 맞아 결혼한 뒤, 그 남자가 과장으로 승진한 이후에는 퇴직하여 여유롭고 우아하게 삶을 누리고 있었다.
수연이 다시 예지몽을 꾼 때는 남편이 차장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밤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꿈이었다. 수연은 후들거리는 발을 이끌고 부엌에 있는 정수기로 가서 컵에 차가운 얼음물을 따랐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들린 유리컵 속에서 얼음들이 서로 부딪치며 불길하게 울었다. 차가운 물을 마시니 요동치던 수연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다독이며 수연은 좀 전에 꾸었던 악몽을 돌이켜보았다.
꿈에서 남편은 죽어 있었다. 남편의 뒷머리가 수박이 터진 것처럼 부서져 허연 골수와 시뻘건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남편의 시체는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남편의 몸 옆으로 수연의 시체가 보였다. 수연의 시체도 누군가 둔기로 내리친 듯 이마 부위가 깨져서 피와 골수가 낭자했다. 두 사람의 시체 너머로 전자시계가 보였다. 시계의 디지털 다이얼은 12월 25일 11시 35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체가 놓인 장소는 고급 펜션으로 보이는데 내부 인테리어로 보아 수연이 이번 크리스마스 때 남편과 머물기 위해 예약했던 곳인 것 같았다. 침실의 널찍한 창문으로 동해 바다가 훤히 보이는 게 좋아서 수연이 예약한 펜션이었다. 어두운 밤에 흔히 그러하듯 창문은 밖의 풍경을 투영하지 못하고 마치 거울처럼 침실의 참혹한 풍경을 은은히 반영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범인으로 보이는 사람의 모습도 있었다. 범인은 검은색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으며 체구는 날렵하고 야리야리해 보였지만 창문에 비친 상이 흐릿하여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그저 악몽일 뿐일 거야. 그동안 승승장구하며 잘 살다 보니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불안했던 마음이 꿈으로 나타난 것뿐이야. 나와 남편을 죽이고 싶게 만들 만큼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적도 없잖아. 애써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수연은 예전에 예지몽을 꾸었던 때처럼 꿈의 내용이 반드시 실현될 거라는 확신이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게 엄습함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빌어먹을 예지몽이 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려 하는데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예지몽이 계시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수연은 필사적으로 과거에 예지몽들이 현실화되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특히 예지몽이 예언한 불행을 막으려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경험들을 절박하게 떠올렸다. 그리고 예지몽이 현실에 실현될 때 반복되었던 패턴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하나. 예지몽은 꿈을 꾼 지 빠르면 하루 뒤에, 늦어도 일주일 안에 현실이 된다.
둘. 예지몽의 실현을 막기 위해, 꿈의 내용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면, 꿈에서 보았던 불행은 꿈에서 목격했던 상황과 다른 시간이나 공간에서 반드시 실현된다.
셋. 꿈에서 보았던 상황과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불행은 꿈에서 본 불행보다 더 가혹해진다.
예지몽의 패턴을 정리하니 수연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분명해졌다. 우선 예지몽의 실현을 막겠다고 꿈의 내용을 남편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이를테면 경찰이나 사설 경호업체에게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된다. 예지몽의 내용을 타인에게 발설하는 순간, 수연과 남편은 꿈에서 보았던 시공간과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더욱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당할 것이다. 문득 수연은 이번 예지몽이 살인이 일어날 시간과 장소, 범인까지 특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지몽이 예고한 시간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밤 11시 35분, 장소는 수연이 예약한 고급 펜션, 살인자는 검은 모자와 운동복을 입은 정체불명의 사람이다. 12월 25일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이다. 지금까지 예지몽은 꿈을 꾼 지 일주일 안에 반드시 실현되었다. 그렇다면 꿈을 꾼 지 일주일이 되었던 날에 살인을 저지르려 한 범인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여 꿈을 꾼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을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나와 남편은 예지몽이 계시한 살인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꿈에서 보았던 범인은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매가 가냘파 보였다. 그런 범인이라면 나 혼자서도, 혹은 범행이 실행되는 그 순간에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충분히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하자 수연은 공포감이 옅어지고 오기와 투지가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수연은 결연히 다짐했다. 나는 입시지옥도 헤쳐 나왔고 전쟁 같은 회사 생활도 견뎌냈어. 수많은 경쟁자를 뿌리치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까지 해냈어. 나는 헬조선에서 벌어지는 모든 서바이벌 경쟁에서 결국 승리해 낸 사람이야. 어릴 때처럼 예지몽이 계시한 불행을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이번만은 내 미래를 내 손으로 바꾸어 놓고 말겠어.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수연은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펜션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 달간 출장을 갔다가 사흘 전에 돌아온 남편은 수연에게 한없이 자상했고, 오랜만에 수연과 단둘이 떠나는 휴가에 어린아이처럼 한껏 들떠 있었다. 수연은 내면 가득히 출렁거리는 불안과 초조감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펜션이 다가올수록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말수도 적어졌다. 남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조금 멀미가 나서..."
수연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구. 미안. 내가 너무 세게 운전했나 보네. 자기랑 오랜만에 휴가를 떠나서 내가 너무 신이 났었나 봐."
남편이 운전하는 차의 속도가 줄어들고 움직임도 더 조심스러워졌다. 남편의 목소리와 몸가짐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느껴지면서 수연의 불안감이 조금 누그러졌다. 수연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내가 무너지면 나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까지 끔찍하게 죽게 돼. 약해지지 말자.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반드시 예지몽의 저주에서 탈출하는 거야.'
수연은 핸드백에 숨겨둔 호신용 전기 충격기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예지몽의 계시에 따르면 범행이 일어나는 시간은 크리스마스 밤 11시 35분. 펜션에 도착한 순간부터 범행 예정 시간까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위에 몰래 침범하는 자가 있는지 주의 깊게 살핀다. 펜션에 몰래 숨어드는 범인을 발견하면, 미리 준비해 둔 전기 충격기로 제압하거나 근처에 있을 남편을 큰소리로 불러 함께 붙잡는다. 꿈에서 본 범인의 체격은 크지 않았다. 전기 충격기로 무장한 나와, 취미 활동으로 주짓수를 연마했던 남편이 함께 덮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고 있는데 저 멀리 펜션이 보였다. 동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로 제법 널찍하게 잔디밭이 깔려 있고 대리석과 검붉은 벽돌로 모던하게 지어진 고급 펜션이 멀리서 보기에도 세련되고 화려한 외양을 뽐내며 우뚝 서 있었다. 남편이 모는 차가 정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진입하니 펜션의 바닷가 쪽으로 단아하게 자리 잡은 프라이빗 수영장과 노천탕이 보였다. 펜션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의 넓은 창으로 동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거실에 면한 부엌에는 각종 포도주와 와인, 샴페인이 구비되어 있었고 대형 냉장고에는 해산물과 야채, 과일, 육류 식자재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부엌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니 침실이 나왔다. 수연이 꿈에서 본 대로 널찍한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푸른 바다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침실 옆의 복도를 지나니 작은 문이 나왔는데, 그 문을 열고 나오니 펜션 앞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다. 잔디밭에는 여름밤의 낭만을 즐기고 싶은 투숙객을 위해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는 그릴과 테이블, 글램핑 텐트가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었다. 수연은 펜션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면서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펜션이 사방으로 열려있는 구조였기에 범인이 어디서든 창문과 문을 통해 쉽게 숨어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일하게 펜션 안에 머물러 있으면 몰래 잠입한 범인에게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펜션의 외부가 모두 보이면서 내부도 어느 정도 들여다 보이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때 글램핑 텐트 옆에 우뚝 솟아있는 나무 위로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사다리를 타고 오두막으로 올라가 보니 사면으로 창문이 나 있었고 천문 망원경과 별자리 모형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누군가 놓고 간 장난감 망원경이 놓여 있었다. 그 망원경을 들고 보니 의외로 먼 곳의 풍경을 눈 앞으로 가까이 잘 끌어왔다. 이 오두막은 밤에 자녀나 연인과 함께 별을 보며 추억을 만들라고 마련된 간이천문대인 듯했다. 여기서는 펜션의 외부와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연은 이 오두막에 숨어서 범인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남편이었다. 남편에게 속내를 감추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연은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그런 수연을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에 걱정이 차올랐다. 수연이 안절부절못해하면서 쾌적한 펜션 안에서 편안히 쉬려 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펜션 안팤으로 들락날락하자 남편이 수연을 붙잡고 물었다.
"자기야, 무슨 걱정되는 일이 있어?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남편의 자상한 목소리에 수연은 하마터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뻔했다. '내가 예지몽을 꾸었는데 오늘 밤 어떤 미친놈이 당신과 나를 죽이려고 한대. 나와 같이 숨어 있다가 그놈을 잡자.' 하는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수연은 꾹 참았다. 만일 지금 예지몽의 내용을 남편에게 털어놓는 순간, 예지몽의 규칙에 따라 수연과 남편은 수연이 예측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더욱 처참한 방식으로 살해당한다.
"별일 아니야..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랬어. 걱정 안 해도 돼."
"속이 많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지금 병원은 다 문을 닫았을 테고.. 응급실에라도 데려다줄까?"
순간 수연의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우선 나 혼자 응급실을 간다는 핑계로 남편을 내 곁에서 떨어트려놓자. 응급실에 가는 척 차를 몰고 나갔다가 몰래 돌아와서 오두막에 숨어 있는 거야. 남편이 펜션 안에 머물러 있고 나도 오두막 안에서나마 펜션 안에 있다면 예지몽의 계시는 유효할 테니 분명 제시간에 범인이 나타나게 될 거야.'
수연은 남편을 보며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내가 운전해서 병원에 다녀올게. 우리 자기가 그동안 회사일로 많이 무리했었잖아. 나 때문에 자기 쉬는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아."
남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몸도 안 좋은데 어떻게 운전하려고. 내가 데려다줄게."
"괜찮아. 나 혼자 다녀올게. 가서 링거를 맞고 한숨 자고 오면 괜찮아질 것 같아. 병원 갔다가 늦어지면 근처 호텔에서 자고 올 테니 자기는 여기서 편히 쉬고 있어. 이 비싼 펜션도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데 오늘 밤에 그냥 비워두기 너무 아깝기도 하고."
남편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알겠어. 조심히 다녀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수연은 남편 차를 몰고 나갔다가 펜션에서 보이지 않는 지점에 차를 세우고 급히 펜션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내내 자신이 없는 사이에 남편이 범인에게 습격을 당했을까 조마조마했다. 수연이 펜션에 숨어 들어가 오두막에 올라갔을 때 다행히 남편이 아직 살아있는 채 침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수연은 스마트폰의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정각. 예지몽이 예고한 범행 시간은 11시 35분이니 범인은 앞으로 한 시간 안에 반드시 나타난다. 수연은 망원경을 들고 눈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펜션을 구석구석 살펴보다 절망감을 느꼈다. 외진 곳에 위치한 펜션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펜션 곳곳을 밝히는 조명등은 너무 은은하여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는 했지만 몰래 침입하는 자를 드러내기엔 턱없이 어두웠다.
수연이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펜션으로 접근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였다. 검은 승용차 한 대가 펜션 정문으로 들어오더니 주차장에 멈추었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수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검은 운동복을 입은, 야리야리한 체구의 사람. 꿈에서 보았던 범인이었다. 수연의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고 손이 벌벌 떨렸다. 범인은 대범하게도 펜션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 당장 남편에게 알려야 해. 수연이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집어드는 순간, 펜션 문이 벌컥 열리고 남편이 나타났다. 수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리도 요란하게 나타나다니, 남편이 알아차리는 게 당연하지. 저놈을 당장 붙잡아요. 경찰을 부르든지. 수연은 남편이 범인을 어떻게 응징할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음에 벌어진 관경에 수연은 경악했다. 남편과 범인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미친 듯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범인을 안고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범인의 모자가 떨어지면서 긴 생머리가 흘러내렸다. 범인은 여성이었다. 환히 불이 켜진 거실 유리창 너머로 남편이 여자를 안고 침실로 향하면서 그녀의 옷을 게걸스럽게 벗겨가는 게 보였다. 침실에 도달한 남편과 여자는 침대 위에 나뒹굴었고 들짐승처럼 거칠게 몸을 섞기 시작했다. 수연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도저히 침실 쪽으로 시선을 되돌릴 수 없었다. 침실로부터 남편과 여자가 내지르는 신음소리와 웃음소리가 솟구쳤다. 수연의 내면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뒤엉켜 폭발하듯 터져 나오면서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호흡이 급격히 가빠졌다. 순간 수연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수연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는 고요로 가득했다. 침실에서 더 이상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수연은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애써 가누며 오두막에서 내려와 침실로 향했다. 침실의 창문 너머로 남편과 여자가 벌거벗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수연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발소리가 나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뚜벅뚜벅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나 격하게 정사를 나누었는지 남편과 여자는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수연이 꿈에서 보았던 장면과 똑같은 자세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엎드려서 잠든 남편 몸 아래로 반듯이 누운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놀랍도록 수연과 비슷했다. 잠시 수연은 남편 몸 아래 누워있는 여자가 수연 자신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수연은 슬픈 눈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33분.
예지몽이 명하는 사형 집행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위스키 병이 보였다. 로얄 살루트 38년산 위스키. 술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수연이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범인을 붙잡은 뒤 남편과 함께 위스키를 마시며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다시 새롭게 맞이하는 삶을 자축하는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위스키는 절반 정도만 남아 있었다. 수연은 천천히, 그러나 머뭇거리지 않고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다. 병의 서늘한 감촉에 수연은 흠칫 놀랐다. 병을 서서히 들어올리던 수연은 잠시 주저했다. 살해당하는 피해자에서 살인을 범하는 피의자로 탈바꿈하는 운명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태평스럽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편의 손이 여자의 가슴을 더듬었다. 수연의 손에 들린 위스키 병이 높이 치솟았다.
11시 35분
수연의 손에 들린 위스키 병이 두 번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예지몽의 계시 덕분에 수연은 즉사에 이르게 하는 지점을 정확히 가격할 수 있었다. 퍽,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붉은 핏물과 하얀 골수가 터져 나왔다. 수연은 창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창문은 어두운 밤에 흔히 그러하듯 거울처럼 수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수연은 창문에 흐릿하게 비친 자신과 남편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