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와 박제된 우상들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
2024년 2월, 인기 아이돌 카리나가 배우 이재욱과의 열애를 인정하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분노한 일부 팬들은 악성 댓글을 쏟아냈고, 시위 트럭을 소속사 앞으로 보냈다. 결국 카리나는 자필 편지를 인스타그램에 올려 사과했지만, 팬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고 소속사의 주가는 폭락했다. 이 사건을 접했을 때 섬뜩했다. 누군가를 사랑할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이다. 그러나 K-팝 산업 구조 속에서는 사랑을 죄로 만들어 아티스트의 인권을 유린하는, 기이한 자본의 논리만이 횡행하고 있었다.
이 비극은 코어 팬덤(Core Fandom)에 크게 의존하는 K-팝 산업의 수익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아티스트의 팬덤은 그의 예술을 가볍게 즐기는 라이트 팬덤(Light Fandom)과, 아티스트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코어 팬덤(Core Fandom)으로 구분된다. 아티스트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코어 팬들은 아티스트의 성공을 위해 한 사람이 수백만 원어치의 앨범을 구매하기도 한다. 그래서 K팝 대형 소속사들은 코어 팬(Core Fan)들을 대상으로 직접 아티스트와 만날 수 있는 팬사인회 입장권이나, 아티스트와의 채팅 및 영상통화를 제공하는 앱 이용권을 판매한다. 그 과정에서 아티스트를 위해 수많은 시간과 돈을 지불한 코어 팬(Core Fan)들은 스스로를 아티스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나 연인, 혹은 아티스트의 성공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하는 피보호자로 인식한다. 그런 그들에게 카리나의 연애는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공들여 키운 스타의 배임 행위이자, 믿었던 연인의 배신이었다.
물론 모든 코어 팬들이 카리나의 연애를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팬들이 그녀의 연애를 축하하고 응원했을 것이다. 카리나의 팬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사생활까지 간섭하려는 일부 극성 팬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문제는 k팝 산업 생태계가 아티스트의 사생활이나 인권보다 일부 왜곡된 팬덤의 높은 구매력을 더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카리나는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말라고 정당하게 요구하지 못하고 '팬들을 실망시키고 속상하게 해서 죄송하다'는 사과 편지를 써야 했을 것이다. K팝 산업계에서 인지도가 높은 카리나도 왜곡된 팬덤의 폭력 앞에서 이토록 무력한데, 얼마나 많은 K팝 아티스트들이 사생활과 인권 침해로 고통받고 있을지 걱정이다.
성해나의 소설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 도 왜곡된 팬덤과 폭력적인 여론 앞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무력하게 휘둘리는 휘둘리는 현실을 고발한다. 또한 이 소설은 거짓과 진실이 혼재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타인을 ‘내 입맛에 맞는 우상’으로 박제하여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빗나간 소유욕이 어떻게 집단적 폭력으로 변질되는지를 보여준다.
확증 편향의 늪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김곤' 감독에게 열광하는 코어 팬(Core Fan)이다. 김곤이 아동 학대 의혹에 휩싸였을 때, ‘나’는 이를 악의적인 ‘가짜 뉴스’이자 ‘마녀사냥’으로 규정하며 그를 옹호한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조회수에 미친 ‘사이버 렉카’와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김곤'을 매장하는 ‘대중의 광기’로 가득 찬 곳이다. 그녀는 아직 김곤의 아동 학대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기에 야만적인 여론 재판에 저항하여 자신만은 끝까지 김곤을 믿고 지지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사건 이후에도 내가 변함없이 김곤을 추앙하고 그의 영화를 보고 클럽에 가입해 굿즈까지 사들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길우는 경악했다.
자긴 그런 인간을 소비하고 싶어?
길우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내 윤리의식에까지 의구심을 품었다. 끝내는 어디에 단단히 홀린 게 아니라며 화를 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단단히 홀린 건 내가 아니라 길우였고,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이었다. 그들은 옐로 저널리즘과 사이버 렉카의 가짜 뉴스에 홀려 김곤의 작품을 철저히 외면하고 왜곡했다. <인간 불신>의 은곰상 수상을 두고 느닷없이 거품 논란을 일으키는가 하면 <미몽>의 동성애 코드와 감독의 성적 지향을 억지로 엮으며 평점 창을 '지 사리사욕 채우는 영화' 따위의 악랄한 댓글로 도배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가끔은 징그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작품을 본 적도 없으면서 '안 봐도 비디오' 따위의 평을 내리는 걸까. 어째서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나락으로 떨구려 그토록 안간힘을 쓰는 걸까. 도대체 왜 사실관계도 명확하지 않은 사건을 멋대로 공론화하고 거짓말까지 덧붙여 온갖 데로 퍼 나르는 걸까.
( 혼모노 p14 ~ 15 )
이 장면은 오늘날 미디어 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요즘은 어떤 미디어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렵다. 어떤 정보에서도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렵다. 공영방송이라고 공표하는 미디어도 확증편향과 선동에서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다. (흔히 MBC는 좌파, KBS는 우파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공영방송조차 이러하다.) 가세연과 같은 황색저널리즘이 판치는 인터넷은 더 신뢰하기 어렵다. 김수연, 이선균, 뉴진스 등 스타와 관련된 사건이 터졌을 때 인터넷에서 온갖 정보들이 범람했고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더 모호해졌다. 진실로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떠돌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이런 미디어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불편한 질문보다 '무엇이 우리 편의 의견인가?'라는 쉬운 판단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우리 편’과 ‘적’으로 나누고 ‘우리’에 속한 사람들은 철저히 단속하며 일치단결하고, ‘적’에 속한 사람들과는 대화하지 않고 적대시한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김곤의 아동학대 범죄 혐의가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김곤에 대해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대중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을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소설의 후반부에서 김곤이 아동학대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녀 또한 진실을 외면하고 맹목적으로 김곤을 믿었음이 드러난다. 이렇게 진실을 알기 힘든 혼탁한 미디어 환경은 개인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 편향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무엇이 사실인지 검증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개인은 ‘진실’보다 ‘내가 믿고 싶은 집단의 논리’를 택하기 쉬운 것이다.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
소설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은 주인공 '나'가 가입한 <길티 클럽>을 통해 자신이 믿고 싶은 집단의 논리에 매몰된 개인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타인(특히 집단에서 힘없는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쉽게 폭력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김곤의 골수팬들의 모임인 <길티클럽>은 6가지 규칙이 있다.
1. 대화 내용 캡처 및 무단 유포 금지
2. 2주 이상 활동 없을 시 총대 권한으로 추방
3.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선생님'으로 통일할 것
4. 친목질 절대 금지
5. 일부 단어(ex. 파주 세트, A군) 절대 사용 금지
6. 김곤 감독님에 대한 비하 발언 및 욕설 일절 금지
( <혼모노> p12 )
위의 규칙들은 <길티 클럽> 집단의 배타성을 강화한다. 규칙에 따라 멤버들은 집단 내의 대화를 밖으로 유출하면 안 되고(1번 규정) 집단 내에서 정기적으로 활동해야 하며(2번 규정), 집단 안에서는 서로를 존중하되 일치단결하여 다른 의견을 내는 소수집단을 형성해선 안 된다.(3, 4번 규정) 특히 집단의 구심점인 ‘김곤’에 대한 비하나 비판은 절대 금지이다.(5번, 6번 규정) 이렇게 <길티클럽> 집단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집단의 취향이나 가치, 논리에 대한 건전한 비판이나 의견을 모두 배재한다. 그런 집단이 일으킬 수 있는 문제점들이 <길티클럽>의 멤버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그들은 우상인 ‘김곤’에 대한 친분이나 지식의 수준에 따라 자신들의 서열을 나눈다. <길티클럽>의 권력과 주도권은 ‘김곤’과 친분이 있는 ‘총대’와 김곤의 영화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다. ‘김곤’과 친분이 없고 영화에도 문외한인 ‘나’는 자주 소외당하고 무시당한다. 또한 <길티클럽> 멤버들은 ‘김곤’ 영화의 명암을 직시하지 않는다. 그저 ‘김곤’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상정하고, 그 위대함을 알아본 자신의 안목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김곤의 영화를 소비한다. 김곤의 작품성을 제대로 평가하려 하기보다는, 김곤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영화 제작에 참여하거나, 굿즈 판매로 수익을 내려는 등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그들의 모습에서 김곤의 영화에 대한 진정한 사랑보다 김곤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이기심이 드러난다.
그런 <길티클럽> 멤버들의 모습에 대해 주인공 ‘나’는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런 '나'도 김곤의 아동학대에 대해 언급하는 ‘미지 선생님’을 대할 때 폭력적으로 돌변한다. ‘나’는 김곤의 아동학대 혐의 가능성을 일체 부인하고, 인터넷 여론의 잘못으로 ‘김곤’이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렸다는 논리를 펼치며, 팬이라면 김곤을 믿어주어야 한다는 주장 하에 ‘미지 선생님’을 정죄한다. 그렇게 '미지 선생님'이 집단에서 배재한 후에 '나'는 <길티클럽>의 다른 사람들과 김곤에 대한 애정을 나누며, 그를 비판으로부터 지켜냈다는 성취감을 느낀다. 이 장면을 보면서 주인공 '나'처럼 선량해 보이는 개인도 집단 심리에 휘말리면 힘없는 소수에 대한 폭력을 쉽게 행사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를 만드는 사랑, 불편함도 존중하는 사랑
소설의 후반부에서 김곤은 아동학대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때 주인공 '나'는 폭탄이 터진 듯한 ‘공허함’을 느낀다.
질의응답을 마치고, 오늘 온 관객들에게 소감 한 말씀 부탁한다는 사회자의 말에 김곤은 잠시 머뭇댔다. 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낸 뒤 담담히 말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지난 이 년간 저는 하루하루를 참담한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주변이 고요해졌다.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 김곤이 말을 이었다.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쳤다는 것 잘 압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작업했던 스태프들, 그리고 제 작품을 사랑해주신 관객분들께 죄송합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송구스러우나 영현 군에게도 진심으로 사죄하려 합니다.
김곤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거듭 말하며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깊이 수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펑.
내 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감싸듯 눈앞이 뿌예졌다. 땅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수가 잦아들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던 김곤, 암전과 퇴장. GV는 단정히 마무리되었다. 통속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엔딩처럼.
(<혼모노> p56 ~ 57)
‘나’의 맹목적인 '믿음' 속에서 김곤은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한 뛰어난 감독만 남았을 뿐 아동 학대를 범했다는 김곤의 허물은 제거되어 있었다. 그렇게 완전무결한 우상으로서의 김곤이라는 허상이, 김곤의 자백으로 인해 부서지는 순간,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나’가 김곤의 불편한 점을 무시하고, 그저 완벽한 우상으로 박제하여 소비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치앙마이 타이거 킹덤의 자이언트 타이거. 그 거대한 호랑이는 발톱과 이빨이 모두 뽑힌 채 관광객들이 자기 몸을 만지도록 무력하게 누워있다. ‘나’는 그 호랑이를 만지면서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을 느낀다. 그 모럴은 본디 아동 학대까지 할 정도로 이빨과 발톱과 같이 불편한 점이 있을 김곤을, 그의 이빨과 발톱과 같은 불편한 점들은 모두 없는 것처럼 무시해 버리고 오직 완전무결한 김곤의 이미지를 추앙하고 사랑했던 시기에 느꼈던 감정과 동일할 것이다.
'이빨 빠진 호랑이'의 은유를 카리나 사건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카리나의 연애로 팬들이 쏟아낸 분노는, 사랑이라는 ‘인간적 욕망(이빨)’을 드러낸 아이돌에게 다시금 ‘무해한 호랑이’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는 명령이었다. 팬들은 스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의 이빨과 발톱을 도려내고, 그저 팬들의 말에 고분고분 순종하기만 하는 ‘타이거 킹덤의 거대한 호랑이’로 사육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호랑이의 가죽만 즐기고, 불편하고 위험해 보이는 이빨은 뽑아버리는 사랑.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다.
성숙한 사랑은 대상의 ‘이빨’까지 존중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이든지, 그는 나의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내게 반항할 수도 있고 심지어 나를 할퀼 수도 있다. 그 불편함을 견딜 때, 우리는 ‘박제된 우상’이 아닌 ‘존엄한 인간’으로서 그를 사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