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일본에서 백제를 가리킬 때 쓰는 말 '구다라'가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넜다'는 말 즉, 백제(百濟)라는 뜻의 순 백제 말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이제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온조왕(溫祚王)과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있는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 및 주서(周書)에 있는 구태(仇台)가 어떤 관계인지 알아볼 차례다.
먼저 온조(溫祚)라는 호칭에 관하여 보자.
백(百)을 뜻하는 순우리말에 '온'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부터 '온'은 '온 누리, 온 세상, 온 천지'와 같이 '전부, 모든, 많은'의 뜻을 갖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거슬러 올라가 송나라 사신 손목이 고려 때(1103년) 쓴 계림유사(鷄林類事)에도 고려 사람들이 백(百)을 '醞'이라 발음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글자는 온조(溫祚)의 '온(溫)' 자와 글자는 다르나 오늘날 우리말식 발음은 동일하다.
이를 보면, 온조(溫祚)의 온(溫)도 '백(百), 전부, 모든, 많은'의 뜻을 가진 순 백제 말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음으로, 온조(溫祚)의 조(祚)는 '왕위, 임금 자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광개토대왕비문에 '이구등조(二九登祚)'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18세에 왕위에 등극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온조(溫祚)'라는 호칭의 의미는, 오늘날식 한자로 표현하면, '백왕좌(百王座)'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뜻은 '백제(百濟)의 왕'이나 '백가(百家)의 왕'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나아가 '모든 동물의 왕 사자'라는 뜻으로 '백수(百獸)의 왕 사자'라고 하는 표현처럼 '모든 사람들의 왕'이라는 뜻으로 확장하여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온조(溫祚)라는 말의 '온' 자는 한자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한자의 소리만 빌어 쓴 음차 표기이고, 조(祚) 자는 임금 자리를 뜻하는 뜻글자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온조'라는 말은 '백제의 왕'이라는 보통명사에 불과하여 이를 실존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온조라는 호칭을 지금의 본명(本名)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온조라는 호칭은 그가 백제를 건국한 이후 붙여진 칭호로 보아야 한다. 마치 몽골제국의 테무진이 몽골제국을 건국하고 칸으로 즉위하면서 몽골의 부족장들이 '칭기즈칸'이라고 존호를 올린 것처럼 말이다. 그 뜻은 '위대한 칸'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이다. 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왕(秦王) 정(政)도 통일 후 '시황제(始皇帝)'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그 뜻은 '첫 황제'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라 할 수 있다. 고구려 제8대 왕 신대왕(新大王)도 '새로운 왕'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일 뿐인데, 그는 즉위와 동시에 신대왕이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 신대왕 본기 2년 정월 조). 미추홀에 도읍한 비류왕과 백제 제11대 비류왕도 비류국에서 따 온 호칭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예가 있지만, 생략한다. 이러한 예를 보면, 아무런 뜻을 가지지 않는 호칭이 오히려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를 건국한 왕에게 그 업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인, '백제왕'이라는 호칭을 올렸다고 하여 그 사람의 실존성을 부정할 수 없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부르던 호칭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다음으로 신찬성씨록의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을 보자.
일본의 신찬성씨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백제국(百済国) 도모왕(都募王)의 아들(男)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 おんたきすわう)
앞의 글들에서 도모왕은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에 기록된 대로 고구려 시조 주몽이라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음태귀수왕은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에 기록된 주몽의 아들들 즉, 온조왕(溫祚王)과 비류왕(沸流王), 둘 중의 한 명이 될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는 백제 제11대 왕을 비류왕(比流王)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주몽의 아들인 위 비류왕(沸流王)과 오늘날 우리말 발음이 같다. 그리고 신찬성씨록은 제11대 비류왕을 '比流王'(비류왕) 혹은 '比留王'(비류왕), '避流王'(피류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몽의 아들 비류왕(沸流王)도 당시 일본식으로 沸流王 혹은 그와 유사하게 표현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음태귀수왕과는 발음과 뜻, 표현이 전혀 달라서 아무런 유사성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남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 즉, 음태귀수왕과 온조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어떻게 이 두 이름이 같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은 '음(陰) + 태(太) + 귀수(貴首) + 왕(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서 '귀수(貴首)'라는 말은 신찬성씨록에 일본어로 '기스(きす)'로 읽는다고 표기되어 있다.
한편, 일본에서 백제왕을 '고니키시(こにきし)'라 하였고, 중국의 주서(周書)에는 백제 백성들이 왕을 '건길지(鞬吉支)'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 말들은 모두 대왕(大王)을 뜻하는 순 백제 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말 '고니'와 주서(周書)의 '건(鞬)'은 모두 오늘날 우리말로 '큰'에 해당하는 말이고, '키시'와 '길지(吉支)'는 왕(王)에 해당하는 말이다. 또 고구려에서는 왕을 '개차(皆次)'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신찬성씨록의 '기스(きす, 貴首)'도 '왕'이라는 뜻을 가진 백제 말 어근(語根)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시 이것이 '왕위(王位)'를 뜻하는 말일까?
어쨌든 이 말은 온조왕(溫祚王)의 '조(祚)'에 대응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태(太)' 자는 '크다'는 뜻을 나타낸 말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태귀수왕(太貴首王)'은 한자식으로 '태조왕(太祚王)'이라는 말로 바꾸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陰'(음) 자는 신찬성씨록에 'おん'(옹)으로 읽는다고 되어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일본어 'おん'은 우리말 '온'과 '옹'의 중간 정도 발음이다. 그런데 온조왕의 '溫'(온)도 일본어로 'おん'(옹)이라고 읽는다. 비록 오늘날의 발음이기 하지만 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음태귀수(陰太貴首)의 '陰'(음) 자와 온조왕(溫祚王)의 '溫'(온) 자는 모두 '백(百)'이라는 뜻을 가진 같은 발음의 백제 말('온'과 유사한 발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을 음차(音借)한 표기라 할 수 있다.
결국,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은 '온태조왕(溫太祚王)'이라는 표현으로 완전히 치환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 '온태조왕(溫太祚王)'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온조태왕(溫祚太王)'이다. 즉, 온조왕을 더 높여 태왕으로 칭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도모왕을 백제 태조(太祖)라고 부른 것과 대비된다.
둘째는 '온조 = 태왕'이다. 즉,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이라는 표현은, '백제 말 온 + 한자어 太 + 백제 말 기스 + 한자어 王'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백제 말 '온'은 원래 숫자 백(百)을 뜻하는 말인데, 그로부터 '모든, 많은, 전부'라는 뜻이 파생되었듯이, 이 숫자가 큰 수라는 의미에서 '큰'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온'을 한자로 태(太)로 표현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백제 말 '기스'는 '임금 자리'를 뜻하는 한자인 '조(祚)'로 표현할 수 있지만, 임금 왕(王)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결국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이라는 말은 '온 = 太' + '기스 = 王'이라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말에서 흔히 '역전(驛前)앞' 혹은 '외가(外家)집'과 같은 표현에서 '前 = 앞'과 '家 = 집'이라는 표현과 유사한데, 다만 그 표현이 두 번 반복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온기스' = '온조' = '태왕'이라는 사실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나아가 우리가 백부(伯父)를 '큰 아버지'라 부르고, '맏이'를 '큰 자식'이라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맏 백(伯)' 자에도 '크다'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온 = 百 = 太'이므로, '百' 자와 '伯' 자도 서로 뜻이 통하는 글자로 사용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삼국지 동이전 한(韓)전에 백제를 '伯濟'라고 표기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다. 특히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에 따르면, 백제는 온조왕 때 이미 마한을 정복한 후여서 스스로 삼한(三韓)의 맹주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百 자와 뜻이 통하면서도 크다는 뜻이 더욱 뚜렷한 伯 자를 즐겨 쓴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주서(周書)의 구태(仇台)를 보자.
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구태(仇台)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 (중략) 해마다 네 번씩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에 제사드린다.
'대방군(帶方郡)'은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나도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하는 '대방'이라는 말은 그 지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중국 사람들이 한반도 내의 특정한 위치를 자기들이 알고 있는 군현의 이름으로 대략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마치 우리가 오늘날 부르는 '만주'나 '요동'처럼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서 위 '대방'이란 대략 한반도 중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한반도 중부에서 나라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온조와 비류뿐이다. 그중 비류는 구태와 발음상 아무런 유사점을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온조왕 건국 기사에는 비류가 아닌 온조가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삼국사기 온조왕 건국 기사야말로 일본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만일 구태와 비류를 동일한 인물로 보게 되면, 일본 기록의 신빙성도 모두 부정해야 하는데, 그 기록이 매우 신빙성이 높다는 것은 앞서 밝힌 것과 같다. 결국, 구태를 비류로 볼 수 없다.
그러면 남아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구태와 온조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같은 인물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앞에서 나는 '구다라'가 '백제(百濟)'와 같은 뜻을 가진 말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구'는 '백(百)'에, '다라'는 제(濟)에 각각 대응하는 순 백제 말이다. 그런데 온조(溫祚)의 '온(溫)'도 '백(百)'이라는 뜻의 또 다른 백제 말이다.
따라서 '구 = 백(百) = 온(溫)'이라는 말이므로, 구태(仇台)의 '구(仇)'와 온조(溫祚)의 '온(溫)'은, 같은 뜻을 가진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구태(仇台)의 '태(台)' 자를 살펴보면, 이는 '별' 혹은 '높은 지위'라는 뜻을 가졌다. 전자의 예로는 '삼태성(三台星)'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북두칠성 중 세 개의 별을 말한다. 후자의 예로는 좌의정을 가리키는 좌태(左台), 우의정을 가리키는 우태(右台)라는 말이 있다. 또 이 글자는 높고 평평한 곳을 가리키는 '대(臺)'자와 통하는 글자로 쓰이기도 한다.
위와 같이 '태(台)' 자에 '임금 자리'라는 직접적인 뜻은 없지만, '높은 자리'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본 것처럼 온조(溫祚)라는 이름이 '순 백제 말 온 + 한자어 祚'로 구성되어 있듯이, 구태(仇台)라는 이름도 '순 백제 말 구 + 한자어 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뜻은 '백가(百家)의 윗자리' 혹은 '모든 사람의 윗자리' 정도로 풀이할 수 있고, 이것은 앞서 본 '온조'라는 말과 상통한다.
이에 대하여 발음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구태(仇台)를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 건국 기사에 나오는 우태(優台)로 보거나, 구태의 태(台) 자가 '이'라는 발음도 나므로 이를 '구이'라고 읽고, 발음이 유사한 고이왕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후자의 견해는 한 동안 우리나라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쳐, 고이왕 이전의 삼국사기 백제 본기 기록을 불신하는 하나의 큰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앞서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발음의 유사성만으로 역사적 사실을 추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방식으로 추정된 결과는 그러한 주장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와 관계없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이 권위 있는 전문가라거나, 그러한 주장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 권위 있는 사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추론하기 시작하면, 다음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 후 1세기경까지 중앙아시아에 월지국(月支國)이 있었는데, 마한 소국 중에도 월지국(月支國)이 있으므로, 둘은 같은 나라거나 같은 종족이다? 또 춘추전국 시대에 한(韓)이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이 있었는데, 삼한(三韓)은 이들의 후손이다? 왕망이 세운 나라 이름이 신(新) 나라인데, 이는 신라(新羅)와 이름이 같으므로, 신라는 왕망이나 그 후손이 세운 나라다? 인도에 보드가야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건너와서 가야를 세웠다? 중국 한나라 때 로마를 대진국(大秦國)이라고 불렀으므로, 로마와 진시황의 진(秦)나라는 뿌리가 같은 나라다? 고려 왕요(王堯, 고려 3대 왕 정종의 이름)와 왕요(王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의 이름)는 발음이 같으므로 같은 사람이다?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이상한 결과가 생길 수 있으며,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는커녕, 대부분의 경우 오히려 역사적 사실 추적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나아가 삼국사기 백제 본기 비류 건국 기사의 우태(優台)는 백제 시조 비류의 아버지로서 비류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기 전에 졸본에서 오래전에 사망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대방에서 백제를 건국한 구태를 우태와 동일한 사람으로 보게 되면, 위 삼국사기 기사 중 우태라는 이름만 빼고 그 내용을 모두 부정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견해는 앞서 본 일본의 관련 기록과도 전혀 맞지 않는다.
구태를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도 마찬가지다. 고이왕이 백제 건국 시조가 되면, 앞서 본 도모왕 관련 기록,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다른 백제왕들의 세대수 등 일본 측 기록과 모두 어긋나게 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이왕 즉위년 기사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백제 본기 기사,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들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결론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즉, 중국 사서의 단 두 구절의 기록과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 이름의 유사성만으로,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수많은 기사와 일본에 백제 왕족들이 남긴 많은 기사들을 모두 부정해 버리는 대참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을 한 사람이나 역사서에 권위가 있을수록 더욱더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상으로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주몽과 일본 기록의 도모왕,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온조왕과 일본 기록의 음태귀수왕, 중국 주서(周書)의 구태왕은 각각 기록된 그들의 업적이나 계보, 이름의 뜻을 볼 때, 같은 사람을 달리 표현한 이름이라는 것을 논증하였다. 그 과정에서 백제라는 국호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일본 사람들이 왜 백제를 구다라라고 했는지도 알아봤다.
이러한 논의 결과,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의 건국 기사는 중국과 일본의 해당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의 논의 결과만 가지고서도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본기 기사의 신빙성을 더 이상 낮춰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미약하나마, 한국 고대사 복원을 위한 첫걸음을 겨우 내디뎠습니다. 앞으로도 한국 고대사 복원을 위한 다양한 이야기를 이어갈 것을 약속드리며, 관심 있는 독자들의 많은 응원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