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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다림 Oct 22. 2021

백제라는 국호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상의 논의에서, 일본으로 간 백제 왕족들이 백제 태조 혹은 시조로 받들었던 도모왕은 부여 시조가 아니라, 고구려 시조 주몽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와 일본 측 기록은 편찬 당시 서로 참조하지 않고 편찬되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서로 내용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기록의 신빙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백제를 실제 건국한 사람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 온조왕이라는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신찬성씨록에 보면, 백제국(百済国) 도모왕(都募王)의 아들을 "온조왕"이라고 하지 않고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 おんたきすわう)"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 내린 결론이 옳다면, 당연히 음태귀수와 온조왕은 동일 인물이어야 한다. 그런데 일견 봐서는 같은 인물이라고 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둘째, 주서(周書)와 수서(隨書)의 기록처럼 당시 중국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거나 백제 사람들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것으로 보이는 기록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주서 백제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데, 이 구태는 누구일까? 온조왕과 같은 인물인가, 다른 인물인가? 이 또한 해명되어야 한다.


구태(仇台)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有仇台者, 始國於帶方). (중략) 해마다 네 번씩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에 제사드린다(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이 문제들은 간단치 않다. 음태귀수와 구태에 관한 정보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음운(音韻)론적인 접근 방법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은 백제(百濟)라는 국호와 '구다라(くだら, kudara)'라는 말이다. 구다라는 옛날부터 일본에서 백제를 불러왔던 말이다. 이것들과 온조, 음태귀수, 구태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백제라는 국호의 유래를 알아보는 것에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보자. 백제(百濟)라는 한자는, '일백 백' 자에 '건널 제' 자다. 삼국사기와 수서에 백제의 뜻과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먼저, 삼국사기 온조왕 건국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로 하였다가, 그 후 백성(百姓)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위 기사에서 몇 가지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첫째, 백제라는 국호가 건국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 국호의 앞 글자는 함께 동행한 열 명의 신하 혹은 백성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호의 앞 글자가 십(十) 또는 백(百)이라는 것과 잘 연결된다.

   그러나 국호의 둘째 글자인 '건널 제(濟)'자와는 쉽게 연결이 되지 않고,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왜냐하면 제(濟) 자에는 즐겨 따른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설을 보완할 더 이상의 자료도 없다.


 다음으로 수서(隋書) 백제전의 기록을 살펴보자.

 중국의 수서(隋書, 636년 당 태종 10년에 완성)는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 기록된 사서로서 삼국사기(1145년)보다 약 500년 앞선 기록이다. 수서 백제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넜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 불렀다.(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이것은 백제(百濟)라는 뜻과 정확히 일치한다. 위와 같은 유래로 백제라는 국호가 붙여진 것이 사실일까? 아니면 혹시 후대에 단순히 한자의 뜻을 가지고 역으로 추정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추정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흔한 일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유래에 대한 설명이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다른 사료적 근거가 있는 경우에는 그 역사적 사실성을 쉽게 부인해서는 안된다. 백제의 경우, 온조와 비류 일행이 백성들과 함께 육로가 아닌 바다를 건너 남하해서 건국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사료들이 있는데, 이는 수서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첫째,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를 보면,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주몽이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추격병을 피하여 급하게 도망쳐서 북부여를 빠져나오는 상황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고 남하를 하였고, 당시 유리왕으로부터 별다른 제재를 받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리왕으로서도 정적(政敵)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이를 막을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처한 정황상 이를 막을 힘도 없었을 것이다. 즉, 유리왕은 당시 북부여에서 아버지를 찾아 남하해 온 직후였으므로 정치적 기반이 약한데 반해서, 온조와 비류는 비록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지만, 졸본부여 왕실의 후손이었으므로, 정치적 지지세력이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환런 지방에서 한강 유역까지 육로로 갈 수 있었을까?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선 한반도의 자연환경을 보자. 한반도에는 큰 강이 많다. 환런 지방에서 남하하기 위해서는 압록강, 청천강 혹은 박천강,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등의 큰 강들을 건너야 한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식량 등 많은 짐들을 가지고 육로로 이동하였다가, 배로 갈아탔다가, 다시 육로로 가는 것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중교통이 발달해 있지 않을 때라,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강을 건널 배를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또 많은 식량과 짐을 가지고 높은 산들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기원 전후에 평양과 황해도 지역에는 낙랑군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낙랑군을 통과하여 이동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강 이북에는 말갈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등 곳곳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지역들을 별다른 충돌 없이 통과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적들의 습격을 받아 식량을 빼앗기고 많은 백성들이 죽을 수도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적벽대전 직전에 조조를 피해 번성에서 강릉으로 형주 유민들을 이끌고 육로로 가던 장면을 생각해 보면, 고대에 육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더딘 일인지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미리 배를 준비하여 강과 바다를 통하여 남하하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실제로 배를 이용한 항로가 더 많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에는 기원전 2세기 초경,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바다를 경유하여 남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지 왜인전(倭人傳)을 보면, 240년대에, 중국 사신단(使臣團)이 대방군에서 출발하여 왜(倭)까지 가는 길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중국 사신단도 황해도에서 김해까지 육로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황해도에서부터 배를 타고 김해(구야한국)까지 가서, 일본 열도로 가는 길을 택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이러한 해로가 육로보다 더 안전하고 편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구당서(舊唐書)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대해(大海)의 북쪽, 소해(小海)의 남쪽에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려(高麗, 고구려를 말한다)에 이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당시 도읍은 평양)를 비롯한 외국과 백제(당시 도읍은 사비) 사이의 왕래에 해로(海路)가 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삼국사기 온조왕 건국 기사 자체에도 해로를 통하여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 있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沸流)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언 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河南之地)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分其民, 弥鄒忽以居之).


   먼저 위 기사의 한산(漢山)은 한강 이북에 있는 오늘날의 북한산이 아니라 한강 이남에 있는 남한산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백제가 처음 도읍한 곳의 이름이 하남(河南) 위례성이므로, 그 이름으로 볼 때 위례성의 위치는 한강 이남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 기사에서 위례성이 위치할 강 남쪽의 땅(河南之地)을 가리켜 지시대명사 '저()'를 쓰지 않고 '이()'를 쓰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그들이 올라 간 산은 강 북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 남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불교에서 현실 세계를 '차안(此岸)', 이상 세계를 '피안(彼岸)'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원 뜻은 강의 이쪽 언덕과 강의 저쪽 언덕이란 뜻이다.


   다음으로, 위 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미추홀로 돌아갔다는 뜻의 ‘귀()’ 자를 쓰고 있다. 이것은 비류와 온조 일행이 이미 오늘날 인천인 미추홀을 거쳐서 남한산(南漢山)에 이르렀는데, 비류는 하남 위례성보다는 도중에 오면서 보아 둔 미추홀 부근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또 바다를 거쳐 한강 하류에서부터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서쪽이 큰 바다에 막혀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일행이 올라간 남한산 줄기에서 서쪽으로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쪽이 큰 바다에 막혀 있다고 말한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위와 같은 사정들은, 비류와 온조 일행이 육로로 왔다고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수년 전에 어떤 방송사에서, 온조 일행이 올랐던 한산을 찾기 위해, 여러 산에 올라가서 서해 바다가 보이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이러한 점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참고로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의 분주로 기록되어 있는 비류 건국 기사에는, 비류 일행이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육로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비류 건국 기사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서는 언젠가 한 번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위 기사는 온조왕 13년 5월 기사와 모순되어 신뢰할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즉 온조왕 13년 5월 기사에는 온조왕이 한수의 남쪽(漢水之南)을 둘러보고 그곳으로 도읍을 옮길 계획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위례성이 한수의 남쪽에 있었다면, 도읍을 다시 한수의 남쪽으로 옮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온조왕 13년 5월 기사 다음에 이어지는 기사를 보면, 온조왕 13년 5월 기사의 '한수의 남쪽(之南)'은 '한산의 남쪽(之南)'의 오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온조왕은 두 달 후인 온조왕 13년 7월에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民戶)들을 옮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한산 아래(漢山下)라는 말은 한산의 남쪽(漢山之南)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흔히 남쪽을 아래로 표현한다. 그래서 남쪽으로 가는 것을 남하(南下)라 하고 북쪽으로 가는 것을 북상(北上)이라고 한다. 삼국시대에도 그렇게 기록한 사례가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추모왕이 남쪽으로 가는 것을 순행남하(巡幸南下)라 하였다. 또 영락 9년 기해년 조에도 '왕이 평양으로 내려갔다(王巡下平穰)'고 하여 당시 도읍인 국내성에서 남쪽인 평양으로 '내려갔다'라고 하고 있다. 일설에는 위 구절 중 하평양(下平穰) 자체를 지명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르더라도 평양 남쪽에 있다는 뜻으로 '하평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니, 마찬가지다.


   결국 위 두 기사는 온조왕이 13년 5월에 하남 위례성에서 한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한 다음, 같은 해 7월에 한산 남쪽에 목책을 세우고 도읍을 옮긴 사실을 기록하였다고 보면, 매우 자연스럽다.


   이와 달리, 한산 아래(漢山下)라는 말 자체를 한산의 남쪽(漢山之南)이라는 의미로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위 두 기사를 연결하여 보면, 한산 아래(漢山下)라는 말은 '한산 남쪽 아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도, 다시 백제 근초고왕 26년 겨울에 '移都漢山' 즉,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그 이전인 온조왕 13년 5월과 7월의 기사 내용을 한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타당하지 않다. 


관련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정예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힘껏 싸우며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王引軍退移都漢山.


 위 견해는 위 기사 중 "王引軍退"와 "移都漢山”을 별개의 문장 및 사건으로 보아 "왕이 군대를 이끌어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문장을 천관우(千寬宇, 1976) 선생의 견해처럼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즉, 위 구절을 하나의 문장 및 사건으로 보아 "王, 引軍退, 移都漢山” 즉 "왕이, 군대를 이끌고 물러나 도읍인 한산으로 옮겼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혹은 "引"자에 "끌어당겨 물러나다"는 뜻이 있으므로, "王, 引軍, 退移都漢山” 즉 "왕이, 군대를 뒤로 물려서, 도읍인 한산으로 퇴각하였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이 더 타당한 이유는, 가능한 한 사료는 다른 기사와 모순 없이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 바로 다음 기사가 다음 해 1월 기사이므로, 이 기사 내용은, 겨울에 근초고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는 전과를 올린 후, 해가 바뀌기 전에 취한 행동이다. 아무리 고대국가라고 하더라도, 겨울에 고구려와 평양성 전투를 벌여 고구려 왕을 죽인 후, 군대를 이끌고 물러나자마자 곧바로 별다른 준비 없이 천도를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가사 위 문장을 이와 같이 해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도읍이 남한산 남쪽에 있었는데, 고구려와 추가적인 전쟁에 대비하여, 임시로 도읍을 남한산 위 즉, 지금의 남한산성 안으로 옮겼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결국, 이 기사는 온조왕 13년 5월과 7월의 기사와 모순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온조 및 비류와 그를 따르는 10신(臣)과 많은 백성(百姓)들은, 몇 척의 배에 나눠 타고 환런의 혼강(渾江, hun river)을 출발하였다. 압록강을 거쳐 서해안으로 항해를 한 다음, 인천을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남한산의 부아악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지형을 살핀 다음, 온조는 한강의 남쪽에 있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하였다. 이때 온조 일행이 바다를 통하여 먼 거리를 항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어려움을 헤치면서 바다를 건넌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백가제해(百家濟海)라는 뜻을 가진 말로 국호를 정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의 수서 기록은 신빙성이 높고, 수서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기사는 다시 한번 신빙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백제 이름의 유래에 대한 일부 기록만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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