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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다림 Oct 22. 2021

백제인의 혼이 서린 국호, 구다라!

   백제 사람들의 건국 이야기는, 1620년 메이플라워(Mayflower)호가 북아메리카의 플리머스(Plymouth)항에 도착하면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미국의 건국 이야기와 오버랩된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사람도 102명이었다고 하니, 백가(百家)와 그 숫자마저 같다. 메이플라워호가 악천후와 거친 파도, 굶주림 등 온갖 어려움을 겪은 것처럼, 기원전 후에 노(櫓)와 돛으로만 바다를 건넌 백제 건국의 아버지들이 겪은 어려움도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호는 지역이나 종족의 이름을 붙이거나 이를 약간 변형해서 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백제 사람들이 자신들의 건국 과정을 표현하는 말로 국호를 정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고, 대단한 일이다. 근대의 미국 사람들도 백제 사람들처럼 생각하지 못했다. 백제 사람들은 백제라는 국호를 들을 때 가슴 벅찬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광복 직후 태극기를 보거나 미국 사람들이 독립 직후 성조기를 볼 때처럼...

   백제라는 국호와 그들의 건국 과정을 담은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의 건국 기사야말로 백제 사람들이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이 아닐까?


   그런데 백제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들의 국호를 한문식으로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부여나 고구려, 사로(신라의 옛 이름)와 같은 주변국의 국호를 보거나, 비류, 다루, 기루와 같은 백제 초기 왕들의 이름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백제 사람들도 처음에 그들의 말로 된 국호를 지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일본 사람들이 백제를 불렀다는 말 '구다라'가 아닐까?


   백제(百濟)의 일본식 한자 발음은 ‘햐쿠사이(ひゃくさい)'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일본식 한자 발음과는 관계없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백제를 '구다라(kudara, くだら)'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아직도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읍에는 '구드래'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오늘날 구다라와 구드래가 어떤 말에서 시작된 것인지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다만 학자들이 다양하게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 대표적인 견해가, '큰 나라'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와 '대왕(大王)'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견해, 온돌을 뜻하는 '구들'에서 유래했다는 견해 등이 있다. 이들의 견해는 과연 사실일까?




   먼저 '구다라'를 '큰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를 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로서 정설(定說)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 견해는 위 말을 '구 + 다라'로 분석한다. 그리고 '구'는 '크다'의 어근(語根)으로 본다. '다라'는 땅이나 산을 뜻하는 고대어 달(達)에서 파생된 말로서 '나라(國)'라는 뜻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 견해는 일본 사람들이 백제 것이 아닌 것을 '시시하다'라고 했다는 주장과 맞물리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성을 더욱 자극하였다. 즉, '시시하다'는 말은 일본어로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고 한다. 여기서 '나이'는 '아니다'라는 뜻이고 '구다라'가 백제이니, 일본 말로 시시하다는 뜻의 '구다라나이'는 곧 백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것을 보면 일본 사람들이 당시 백제를 큰 나라로 섬기면서 선진국인 백제 물건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까? 나는 부정적으로 본다.


   첫째, '구다라'라는 말 중 '다라'가 '달'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달'은 지금 우리말에서나 고대 우리말에서 한 가지 뜻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다. 그중 중요한 것만 꼽아보더라도, ① 땅 또는 산, ② 하늘의 달(月), ③ 다리(bridge), ④ 닭 등의 뜻으로 쓰였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의미 중 '구다라'의 '다라'가 하필이면 '땅 또는 산'이라는 뜻을 가진 말에 해당한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오히려 '구다라'는 일본에서 백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것이 분명하므로, 백제라는 말에 대응시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백제의 제(濟)는 건넌다는 뜻이 있으므로, '구다라'의 '다라'는 '다리(bridge)'를 뜻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따로 이야기한다.


   둘째, '다라'가 땅의 뜻으로 쓰였다고 하더라도, 나아가 백제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이 당시 오늘날의 나라(國)에 해당하는 말을 '다라'라고 했다는 사료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나라(國)라는 뜻으로 당시에 '나라'나 '가라'라는 말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전자의 경우에는 낙랑(樂浪)과 일본의 나라(奈良, 우리말로는 나량이라고 발음한다)가 있다. 고대어에서 'ㄱ' 받침과 'ㅇ' 받침은 발음이 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유력한 견해다. 이에 따르면, 위 말은 고대에는 모두 '나라'와 유사하게 발음했을 것인데, 낙랑은 고조선의 도읍이 있었던 곳이고, 일본의 나라 지역은 고대 일본의 수도였던 지역이다. 또 일본에서는 한(韓), 한(漢), 당(唐)을 모두 '가라(から)'라고 불렀는데, 이후에 가라는 널리 외국을 부르는 말이 되었다.


  셋째, 일본말로 '크다'라는 말은 '오오(おお)'이므로, '구다라'의 '구'는 일본어가 아니다. '구'는 발음상 우리말 '크다'라는 단어의 '크'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말로 '큰 나라'라고 하지 '크 나라'라고 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백제 사람들은 '큰 나라'를 '크 나라'라고 했을까? 그렇게 보기 어렵다.


    주서(周書) 백제전에 백성들이 왕을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사람들이 백제왕을 코니키시(コニキシ)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길지(吉支)'와 '키시(キシ)'는 모두 왕(王)이라는 말이고, '건(鞬)'과 '코니(コニ)'는 모두 오늘날 우리말의 '큰'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크다'라는 말의 관형어(명사 등 체언을 수식하는 말)로 '큰'을 사용하는 것처럼 백제 사람들도 '크'가 아니라 '큰'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사람들도 백제어 '큰'을 '코니'라고 하였고, '구'라고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송나라의 손목이 1103년에 고려를 방문하고 지은 계림유사에 '대(大)'의 고려 발음을 '흑근(黑根)'이라고 하였다. 이는 발음이 오늘날 '큰'과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당시 백제나 일본 사람들이 '구다라' 외에 '백제'를 '대국(大國)'이라는 뜻을 가진 다른 말로 불렀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일본에서 백제 이외의 다른 큰 나라들을 가리킬 때 '구다라'라고 했다는 기록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백제를 부를 때에는 오로지 '구다라'라는 말로만 불렀고, 역으로 '구다라'라는 말은 오로지 '백제'만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구다라'라는 말이 '큰 나라'와 동의어가 아니라 '백제(百濟)'와 동의어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삼국지 동이전 한(韓)전과 왜인(倭人)전을 비교해 보면(당시는 백제와 야마토 정권이 수교하기 약 100년 전이다), 당시 백제는 마한 소국 중 한 나라였는데, 마한 소국 중 큰 나라가 만여가(萬餘家) 정도인 반면, 왜 여왕 비미호가 다스리던 야마일국(邪馬壹國)은 오만여 호(五萬餘戶) 정도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 당시 왜에는 마한 소국보다 더 큰 소국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왜의 야마일국은 당시에 이미 중국과 사이에 사신을 주고받았는데, 위(魏) 명제(明帝)가 왜 여왕 비미호에게 친위왜왕(親魏倭王)의 작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왜(倭)가 후에 백제와 수교를 한 다음 백제를 "큰 나라"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다섯째, 일본어로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는 말이 '시시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인 것은 맞다.

   그러나 발음의 동일성 외에는 이 말의 '구다라'가 백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는 아무런 자료가 없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만일 여기의 '구다라'가 백제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일본 사람들이 백제를 '큰 나라'라고 불렀다고 볼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들은 '구다라나이'라는 말을 한자(漢字)로 '下らない'라고 표기한다. 그리고 ‘구다라’에 해당하는 '下ら'의 원형은 '下る'인데, 이는 '큰 나라'라는 뜻과는 전혀 관계없고, '내리다. 항복하다. 하사되다. 낮다.'라는 뜻만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앞의 글에서 여러 차례 발음의 동일성만으로 고대 사실을 추정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우리는 발음만으로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추론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또 하나의 해프닝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구다라'를 '큰 왕(大王)'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를 보자.


   이 견해는, '구드래'라는 말을 '굳 + 어라'로 분석한다. 그리고 '굳'은 '크다'의 어근이고, '어라'는 백제에서 왕을 부르던 '어라하'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결국 '구드래'라는 말은 '대왕(大王)'이라는 뜻이고, 이 말이 일본으로 건너가 '구다라'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견해도 발음의 유사성만으로 추정한 것이어서 아이디어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앞에서 한 대부분의 비판이 이 견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게다가 아무리 고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정식의 국호가 존재하는데 이를 젖혀두고 '대왕(大王)'이라는 말로 국호를 대신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또 주서(周書) 백제전에서 백제 사람들은 왕을 '어라하(於羅瑕)' 혹은 '건길지(鞬吉支)'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앞서 본 것처럼 '건길지'가 '큰 임금' 즉 대왕(大王)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므로, '어라하'도 그 자체로 대왕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또다시 크다는 의미의 '구'라는 말을 붙였다고 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구다라'를 '구들돌'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를 보자.


   이 견해는,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전설의 바위 이름에서 '구드래'라는 말이 나왔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 가 '구다라'가 되었다는 견해다. 삼국유사 권 제2 돌석암의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사비의 절벽에 바위 하나가 있어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백제 왕이 왕흥사에 가서 예불하려고 할 때는 먼저 이 돌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을 하니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돌석(㷝石, 구들 돌)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거의 같은 내용의 전설을 싣고 그 바위 이름을 자온대(自溫臺)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견해는 사료적 근거가 있기는 하나, 그 인과관계가 거꾸로 되었다. 즉, 거꾸로 '구다라'나 '구드래'라는 이름에서 '구들돌' 바위의 전설이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래에서 보듯이 '구다라'와 '구드래'는 '백제'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백제'라는 말의 뜻과 '구들돌(= 온돌)'이라는 말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지명에 얽힌 전설들은, 사실은 그 전설 때문에 지명이 그와 같이 붙여진 것이 아니라, 어떤 지명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그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사후에 지명에 맞게 전설이 붙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설악산의 울산(蔚山)바위는 '울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다가 설악산에 눌러 않게 되어 울산바위라고 했다'는 전설이라든지, 노량진(鷺梁津)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의미라든지 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아무리 고대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정식의 국호를 두고 다른 나라의 국호를 '구들돌'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면 '구다라'를 '백제'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구다라'가 만일 백제와 같은 말이라면, '구'를 '백(百)'에 '다라'를 '제(濟)'에 각각 대응시켜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까지 우리말에서 '구'가 '백(百)'의 뜻으로 쓰인 사례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구다라'가 일본에서 백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것이 분명한 이상, '다라'가 '제(濟)'에 해당하는 것이 맞다면, '구' 또한 '백(百)'에 해당하는 말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오늘날 '다라' 혹은 '달'은 전라도 방언으로 모두 다리(bridge)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므로 '다라'와 '달'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말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다리(bridge)'라는 말은 물이나 계곡 등을 건널 수 있도록 이어 주는 시설물을 말한다. 그런데 옛날에는 '도선과 같은 배를 타고 물의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곳'도 '다리'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늘날 남아 있는 지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컨대, 서울 동작구에 있는 노량진(鷺梁津)을 '노들나루'라고도 했다. 이 말은 각각 '노 + 량 + 진'과 '노 + 들 + 나루'로 대응시켜 볼 수 있다.

   여기서 '노(鷺)'는 '큰 강'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을, 한자의 음을 빌어 표기한 것이다. '큰 강'을 뜻하는 우리말로 '로/리'가 있었다. 예컨대, 한강을 아리수 또는 욱리하라고 하였고, 은하수를 미리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 '로'가 두음법칙 때문에 '노'로 된 것이다.

   다음으로 '량(梁)'은 '다리 량'자인데, 이는 '들'에 대응하는 말이다. 따라서 '다리'를 '들'로도 발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津)이 '나루'에 해당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요약하면, '노량진'과 '노들나루'라는 말은, '강을 건널 수 있는 나루'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루라고 하여 모두 강을 건너기 위한 곳은 아니므로, 위 말에서 '들'과 '나루'가 중복된 말이라고 할 수 없다.


   또 다른 예는, 남해군과 하동군을 잇는 남해대교가 놓여 있는 곳의 마을 이름 노량(露梁)에서도 볼 수 있다. 그곳 양쪽 마을 이름이 모두 노량인데, '노들'이라고도 불렸다 한다. 남해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그곳에서 도선으로 바다를 건넜다. 위와 같은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앞서 본 노량진의 경우와 같다. 다만, 여기서 '노'라는 말은 '바다의 좁은 해협이 마치 큰 강과 같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울둘목이라고도 불리는 명량(鳴梁)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명(鳴) 자와 '울' 자는 '울다'는 말에 해당하고, 량(梁)과 '둘'은 '다리'라는 말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우리나라 고대 지명은 물론 현대 지명에도 유달리 ‘달/들/돌’ 등의 지명이 많다. 이는 우리나라에 산과 하천이 많기 때문이다. 즉, 산을 넘는 고개와 하천을 건너는 곳은 교통의 요지여서 자연히 사람들이 모이고 쉽게 마을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고개나 하천을 '건너는 곳'이란 말이 모두 ‘달/들/돌’이니 자연 이런 말이 붙은 지명이 많을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고개 부근이나 하천을 건너는 곳이 모두 길 목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통로 상의 병목 구간으로서, 얼핏 가느다란 닭의 목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닭의 옛 말 ‘달/돌’에서 위와 같은 뜻들이 파생되었을까?


   삼국시대에도 '달'이라는 말이 '다리(bridge)'라는 뜻으로 쓰인 예가 있다. 


   신라 6부 중 량부(梁部), 사량부(沙梁部), 점량부(漸梁部)의 량(梁)은 앞서 본 것처럼 '다리'(bridge)라는 뜻을 가진 한자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이를 '돌'과 '달'의 중간 정도의 음으로 발음하였다(아래에서는 편의상 '달'로만 표시한다). 이것을 보면, 위 3개의 부는 '물을 건너는 곳'에 있었던 마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물을 건너는 곳은 교통의 요지이자 상하수(上下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큰 마을이 형성되는 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위 3개 부 이름의 '량(梁)' 자가 후에 모두 '닭 부리 탁(啄)' 또는 '닭 부리 훼(喙)' 자로 바뀌어 '啄部' 혹은 '喙部' 등으로 표기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음은 여전히 '달'로 발음했다는 것이다. 후대이긴 하지만, 송나라 사신 일행 손목이 1103년에 고려를 방문하고 지은 계림유사에, 고려 사람들이 '닭(雞)'을 '啄'으로 표시하고 '달(達)'로 발음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다리(bridge)'와 '닭'에 해당하는 말이 당시에는 모두 같은 발음인 '달'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같은 발음인데도 왜 한자를 위와 같이 바꾸었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알영과 김알지에 대한 전설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후 알영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 월성(月城)의 북쪽 천(川)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으므로 그 천을 발천(撥川)이라고 하였다 한다. 발천은 월성(月城) 옆에 있는 계림(鷄林)을 거쳐 경주의 남천(南川)과 합류한다. 월성은 신라왕의 궁궐이었고, 계림은 경주 김 씨의 시조 김알지와 닭의 전설이 얽혀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월성(月城)은 혹은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이 성의 이름이 처음부터 월성(月城)이었던 것이 아니라 원래는 '달' 성(城)이었는데, 후대에 '달'이라는 말을 한자로 바꾸면서, 월(月)성 혹은 재(在)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재'라는 말은 '새재(鳥嶺)'와 같이 순우리말로 언덕처럼 높은 땅을 말하는데, '달(達)'도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따라서 원래 '달'성(城)이라고 불렀던 성을 후에 한자로 고치면서 '땅의 모양이 하늘의 달과 같다'는 의미로 월(月) 성이라고 하거나 혹은  '땅이 언덕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여 재(在)성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앞의 신라 6촌 이름에서 보았듯이 원래 월성의 '달'도 '다리'라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곳이 량부(梁部)였을까? 아니면 월성을 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하였고, 새롭다는 말이 '사(沙)'였다고 하니, 이곳이 사량부(沙梁部)였을까? 신라 김 씨 왕의 출현과 관련하여 한 번 깊이 있게 연구해 볼 일이다.




   결국, '구다라'의 '다라'는 '건너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 '달'에서 파생된 말로서 백제(百濟)의 '건널 제(濟)' 자와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여기에 일본에서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더해 보면, '구다라'와 '백제(百濟)'는 모두 같은 뜻 즉, 백가제해(百家濟海)라는 뜻을 가진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구다라' 혹은 '구드래'에서부터 후대에 발음이 유사한 '구들돌'의 전설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백가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건국하였다가, '구드래나루'를 통하여 수많은 백제의 왕족과 귀족들,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끌려 감으로써 백제가 멸망하고 말았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백제'와 '구다라'라는 국호는 백제의 건국과 멸망의 역사를 모두 담은, 가히 백제인의 혼이 서린 이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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