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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다림 Oct 22. 2021

도모대왕과 주몽, 동명의 탄생설화 비교

   백제 건국 관련 인물 중에 백제 태조(太祖) 도모왕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우선, "태양신이 내려와 잉태하였다(日神降靈)"고 하는 탄생 설화가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속일본기에는 또 다른 도모왕 기사가 있다.

  환무천황 8년(789년) 12월 14일 기사에는 환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純陀太子)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담이지만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1년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일본 천황이 68세 생일을 맞아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나 자신으로서는 환무천황의 생모(生母)가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기자회견 내용은 국내에서도 널리 보도되었는데, 이때 말한 속일본기 기록이 바로 이 부분 기록이다.


   위 기사에는 도모왕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도모왕은, 하백의 딸(河伯之女)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낳은 사람이다(感日精而所生).


   한편,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묘지명에도, 부여융의 가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하백(河伯)의 손자(혹은 자손)가 상스러움을 드러냈다(河孫效祥)'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위 속일본기 기록과 일치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보면, 백제 태조 도모왕에 해당하는 인물은, '하백의 딸(河伯之女)'이 '태양신(日神 혹은 日精)'에 감응하여 잉태했다는 내용의 탄생 설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탄생 설화를 생각하면 누구에게나 쉽게 떠 오르는 사람이 고구려 시조 주몽이다. 주몽 설화를 최초로 기록한 사서는 중국 북위(北魏)의 위수(魏收)가 편찬한 위서(魏書, 554년 편찬)다. 이 책은 삼국사기(1145년 편찬)보다 약 600년 전에 편찬되었고, 그 내용은 일반적으로 북위의 사신 이오(李敖)가 435년에 고구려를 방문하여 직접 수집한 자료에 근거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중 탄생 설화 부분만 인용하면 아래와 같고, 이는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의 내용과 같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河伯女)로서 부여왕에 의하여 방에 갇혀 있었다. 햇빛이 비추자 몸을 돌려 피하였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와 비추었다. 곧이어 잉태하였다.(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 旣而有孕)

 

   그 후 기록된 중국의 주서(周書, 618~628 편찬) 고려전(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말한다)에는 위와 같은 내용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주몽(朱蒙)인데, 하백의 딸(河伯女)이 햇빛에 감응하여 잉태하였다(感日影所孕也.)'고 한다.


  이 표현은 도모왕에 대한 환무천황 8년의 속일본기 기사 "河伯之女, 感日精而所生"과 거의 동일한 표현이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유리왕 9년 8월 조에는 왕자 무휼(無恤, 후일의 대무신왕이다)이 부여 사신에게 "우리 선조께서는 신령의 자손이다(神靈之孫)."라고 한 말이 있다. 이것은 속일본기의 도모왕 탄생 설화 중 "일신강령(日神降靈)"이라는 표현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고구려 시조 주몽의 탄생 설화는 백제 태조 도모왕 탄생 설화와 내용 및 표현이 동일하여 사실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많은 사람들은, 동명(東明)을 주몽(朱蒙)의 또 다른 명칭이라고만 알고 있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편찬 시기 1145년)보다 약 1,000년 이상 앞서 편찬된 왕충의 논형(論衡,  기원 후 80년경 편찬)이라는 책에는 동명(東明)을 부여 건국 시조라고 하면서, 주몽 설화와 거의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그리고 이후에 편찬된 중국 사서는 모두 동명을 부여 시조로, 주몽을 고구려 시조로 구분하여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논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이(北夷) 탁리국왕(橐離國王)의 시비(侍婢)가 임신하자 왕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계란처럼 큰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有氣大如鷄子, 從天而下, 我故有娠)”라고 하였다. 이후 아이를 낳아 돼지우리 안에 버렸더니 돼지들이 숨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 안에 두어 말이 그를 밟아 죽이게 하려 하였으나 말들도 숨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의심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노비로 기르게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돌보도록 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다. 왕은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이 도망쳐 남쪽으로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동명이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져 뒤쫓던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부여(夫餘)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북이(北夷)에 부여국(夫餘國)이 있게 되었다. 


  위 내용 중 탄생 설화 부분을 요약하여 도모왕의 탄생 설화와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도모왕은, 하백의 딸(河伯之女)이 일정에 감응하여(感日精) 잉태하였다.

   동명은, 탁리국왕의 시비(橐離國王侍婢)가 계란만 한 큰 기운에 감응하여(感氣大如鷄子) 잉태하였다.


   일반적으로 건국 설화는 건국 시조의 혈통의 위대성과 탁월한 능력, 건국의 당위성 등을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건국 시조 설화에서 그 혈통 부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화하는지는 각각의 건국 설화를 특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런 관점에서 위 두 탄생 설화를 비교해 보면, 어머니에 관한 묘사는 완전히 다르고, 아버지에 관한 묘사는 비슷하지만 같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도모(都慕)와 발음이 유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먼저 현대 일본식 발음을 보자.

   도모(都慕)는 '도보(とぼ )' 혹은 '츠보(つぼ)'다. 동명(東明)은 '도메(とめ)'다. 고구려 사람들은 주몽을  '鄒牟'(추모)라고 표기하였는데, 그 일본식 발음은 '쓰무(すむ)'다.

   이는 고대 발음이 아니어서 한계가 있긴 하지만 대략적으로 발음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위 발음을 보면, '도보'와 '도메', '츠보'와 '쓰무'는 각각 음운(音韻)상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모(都慕)'는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사람들이 '동명(東明)'이나 '추모(鄒牟)'라는 표기 대신 일본어로 유사하게 발음되는 다른 표기를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말식 발음을 보자.

   일반적으로 고대어에서 'ㅇ' 받침이 있는 글자와 없는 글자는 서로 넘나들 수 있다고 본다. 이는 고구려 시조를 주몽(朱蒙), 추모(鄒牟), 중모(中牟)로 각각 다르게 표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복모음 'ㅕ'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고구려나 백제에서 '동명(東明)'을 오늘날과 달리 '도머' 혹은 '도메'와 유사하게 발음했을 가능성이 있고, 거꾸로 '도모(都慕)'를 '동몽'과 유사하게 발음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도모'가 '추모'보다는 '동명'과 발음이 더 유사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발음의 유사성만을 근거로 곧바로 도모가 고구려 시조보다 부여 시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국 사서와 달리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기록은 주몽과 동명을 모두 고구려 시조의 다른 호칭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부여 시조는 발음이 전혀 다른 부루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삼국사기 기록이 맞다면, 오히려 위와 같은 발음의 유사성은 도모왕이 부여 시조가 아니라 고구려 시조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사서는 동명을 부여 시조로, 주몽을 고구려 시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는 주몽과 동명은 같은 사람으로서 고구려 시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속일본기가 기록하고 있는 백제 태조 도모왕의 탄생설화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탄생 설화와는 완전히 일치하고, 중국 사서에 부여 시조로 기록된 동명의 탄생 설화와는 유사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일본 발음상으로는 도모와 주몽, 동명이 모두 비슷하지만, 한국 고대어 발음으로는 도모와 동명의 발음이 더욱 비슷하다.


   어떻게 하여 위와 같은 일이 생겼을까?

   

   거의 모든 학자들과 연구자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명은 부여 시조이고, 주몽은 고구려 시조로서, 둘은 서로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부여족이었던 고구려와 백제가 후대에 부여 시조 설화를 자신들의 시조 설화로 차용 및 변형하였다. 특히 백제는 부여 시조 동명을 그들의 시조로 모셨다. 고구려에서는 그들의 시조 주몽에게 부여 시조의 이름을 따서 동명성왕이라는 시호를 올렸거나, 혹은 후대의 국내 사서 편찬자들이 착오로 주몽과 동명을 동일 인물로 보고 그와 같은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과연 이러한 설명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까? 위와 같은 변형 과정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다. 

  

   그런데 위와 같은 설명에 대하여 우선 드는 의문은, 백제 사람들이 남긴 삼국사기 백제 본기를 비롯한 국내 기록에는 왜 백제 태조 혹은 시조가 '부여 시조 동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 시조 주몽(온조왕 본기의 본문)' 혹은 '북부여왕 해부루(온조왕 본기의 분주)'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을까 하는 것이다. 혹 일각에서는 후대에 이를 조작했다는 견해가 있긴 하나, 이는 아무런 사료적 근거가 없는 막연한 추측에 불과한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게다가 백제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고, 고구려도 백제 개로왕을 죽이는 등 백제와 고구려는 오랫동안 서로 사이가 극도로 나빴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방의 시조 탄생 설화를 표절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는 예전에 남북한의 관계가 나빴을 때, 북한에 월북한 사람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백제 태조 도모왕 탄생 설화와 고구려 시조 주몽의 탄생 설화가 이렇게 같을 수 있을까? 아무리 같은 종족이라 하더라도, 각각 서로 다른 나라에서 이렇게까지 똑같은 내용으로 시조 탄생설화가 변화 발전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사례가 백제와 고구려를 제외하고 있는가?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백제 태조 도모왕과 고구려 시조 주몽은 같은 사람이고, 그 탄생 설화의 핵심적 내용 즉, "하백의 딸이 태양의 기운에 감응하여 잉태하였다"는 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지기 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경우뿐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있다.

   동명성왕 14년(기원전 24년) 기사에, 주몽의 어머니가 동부여에서 사망하자 '신묘(神廟)'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중국의 주서(周書, 628년 - 636년 편찬) 고려전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즉 거기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주몽을 등고신(登高神)이라 부르고, 그 어머니를 부여신(夫餘神)이라 부르는데, 그들을 모시는 각각의 신묘(神廟)가 있고, 관청을 두어 이를 수호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에다가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더해 보면, 위와 같은 일이 생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주몽이 살아 있을 때 이미, 고구려 건국의 당위성과 시조의 위대성 등을 선전하기 위하여 건국 시조 주몽에 대한 설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주몽의 어머니 사후에는 그녀의 신묘(神廟)를 지어 받들어 모시면서 신격화하게 되었다. 또 매년 동맹(東盟)이라는 국가적 행사를 통하여 시조 주몽의 탄생 및 건국 과정을 신화화(神話化)하여 재현하였다. 그러다가 주몽이 죽고, 왕통이 유리왕과 온조왕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거의 동일한 시조 설화를 갖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매우 악화하면서 서로 같은 시조 이름을 쓰기 꺼려했다. 그래서 같은 시조인데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추모왕이라는 호칭을, 백제는 동명왕(일본으로 간 백제 사람들은 후에 일본식으로 도모왕)이라는 호칭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마치 프랑스와 독일이 같은 사람을 샤를 대제(Charlemagne)와 카를 대제(Karl der Große)로 다르게 부르는 것처럼.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즉, 왕충의 논형에 기록된 부여 건국 시조 동명 설화는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물음이 여전히 남게 된다. 여기서는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하기 어려우므로, 결론만 이야기하면, 나는, 위 동명 설화는 고구려 시조 주몽 설화의 초기 버전이 부여 시조 이야기로 와전되어 기록된 것이라고 본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일 다른 기회에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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