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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다림 Oct 22. 2021

백제 태조 도모대왕은 고구려 시조 주몽이다.

   다음으로 속일본기의 "귀수왕(貴須王)이 도모왕으로부터 16대 왕"이라고 한 내용에 관해서 보자.




  먼저 여기서 말하는 귀수왕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 중 어느 왕에 해당하는지부터 보자.


   삼국사기 백제 본기는 온조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제6대 왕을 귀수왕(貴須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름만 보면, 이 기사의 귀수왕과 삼국사기 제6대 귀수왕이 동일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나는 고대사에 있어 이름의 표기나 발음만으로 어떤 사실을 추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기사의 귀수왕은 삼국사기의 제6대 귀수왕이 아니라, 삼국사기 제14대 왕인 근구수왕(近仇首王)과 동일 인물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 속일본기의 기사 중에는 야먀토 정권이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 시에 처음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과 수교를 하고, 그 후 백제 귀수왕(貴須王)과 교류를 이어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근초고왕이 삼국사기 제13대 근초고왕과 발음 및 표기가 모두 같으므로, 이 둘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후에 나오는 귀수왕은 삼국사기의 제6대 귀수왕이 아니라, 제14대 근구수왕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하나의 단서일 뿐이지만, 다른 사료에 의하여 뒷받침이 된다면, 이것도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둘째, 위 기사는 상소문에 나타나 있듯이 국사(國史)에 근거한 것인데, 그 국사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말한다. 일본서기는 속일본기보다 앞서 편찬된 관찬(官撰) 사서로, 일본 천황의 명에 따라 편찬을 시작하여 720년(백제 멸망 후 60년 뒤)에 완성된 사서다. 여기에는 위 기사와 관련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공황후 섭정 46년(246년)에 처음으로 백제 초고왕(肖古王)이 야마토 정권과 수교를 하였다. 백제 초고왕이 신공황후 섭정 55년(255년)에 사망하자, 다음으로 아들 귀수왕(貴須王)이 즉위하였다. 귀수왕이 신공황후 섭정 64년(264년)에 사망하자, 아들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하였다. 그 후 침류왕이 사망하고 진사왕이 즉위하였다.


   위 일본서기 기록에서 백제왕 계보는, 초고왕-귀수왕-침류왕-진사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제5대 왕이 초고왕, 제6대 왕이 귀수왕으로 되어 있긴 하나, 그다음 왕인 제7대 왕은 침류왕이 아닌 사반왕으로, 제8대 왕은 진사왕이 아닌 고이왕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본서기의 위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위 일본서기 기록과 일치하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왕 계보는, 제13대 근초고왕-제14대 근구수왕-제15대 침류왕-제16대 진사왕 부분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초고왕 및 귀수왕은 각각 삼국사기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에 해당하고, 속일본기의 근초고왕과 귀수왕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위에서 본 일본서기의 연도는 그 기록 연도에 120년을 더해야 실제 연도와 일치한다는 것은 학계에서 이미 밝혀져 있는 사실이다(이를 2周甲 인상설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일본서기의 위 연도를 수정하면, 일본서기에 기록된 초고왕의 사망 연도는 375년(= 255년 + 120년)이 되고, 귀수왕의 사망 연도는 384년(= 264년 + 120년)이 된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제13대 근초고왕과 제14대 근구수왕의 사망 연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한편, 속일본기가 편찬된 때로부터 18년이 지난 815년에 일본 천황의 명으로 편찬된 씨족의 일람서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관야조신(菅野朝臣)은 백제국 도모왕의 10세손인 귀수왕으로부터 나왔다(百済国の都募王の十世孫、貴首王より出づ).


   위 관야조신(菅野朝臣)은 앞서 속일본기의 기사에서 성을 하사 받은 관야조신이므로, 이 도모왕과 귀수왕은 앞서 본 속일본기의 도모대왕 및 귀수왕과 같은 왕이다. 따라서 이 귀수왕도 삼국사기의 근구수왕과 같은 왕이다. 그리고 여기서 10세손이라는 것은 역대 왕의 대수(代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족보상의 세대(世代)수를 말하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따르면, 근구수왕은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세대상으로 9세손이다.


   요약하면, 속일본기 및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도모왕은 그로부터 시작하여 10세손이자 제16대 왕이 근구수왕이 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구수왕은 온조왕으로부터 시작하여 9세손이자 제14대 왕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가지고, 먼저 도모왕과 고구려 시조 주몽을 비교해 보자.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따르면, 주몽은 온조왕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근구수왕은 온조왕의 9세손이자, 주몽의 10세손이다. 이것은 신찬성씨록의 도모왕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면 왕 대수(代數)는 어떻게 될까?

  근구수왕은 온조왕으로부터 제14대 왕이므로, 주몽으로부터는 제15대 왕이 된다. 이것은 근구수왕이 도모왕으로부터 제16대 왕이라는 속일본기 기록과는 다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도모왕이 고구려 시조 주몽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주저한다.


   이 문제는 삼국사기 온조왕 건국 기사를 자세히 보면 쉽게 해결된다. 즉, 위 기사에는 주몽의 아들이자 온조왕의 형인 비류왕이 등장한다. 이를 백제 왕실에서 역대 왕 중 1명으로 보았다면, 근구수왕은 주몽으로부터 제16대 왕이 되어 도모왕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삼국사기 온조왕 건국 기사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몽의 아들로서 형 비류와 동생 온조가 남하했다. 함께 온 백성과 신하를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에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나라를 세웠다. 온조왕은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류왕은 자살하고, 그 신하와 백성은 모두 위례성에 귀부(歸附)하였다. 이에 온조왕은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치고, 원년 5월에 동명왕의 사당(東明王廟)을 세웠다. 


   위 내용을 보면, 백제는 미추홀과 위례성의 통합 사실을 매우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온조왕은 미추홀과 통합 직후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비류왕과 온조왕의 공통 선조인 주몽 즉, 동명왕의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이러한 사실과 통합 과정을 건국 기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백제의 후대 왕들은 동명왕 사당을 시조 사당으로 여러 차례 참배하였다. 그리고 비류(沸流)라는 호칭은 백제가 강한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졸본부여의 중심 국인 비류국(沸流國)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근초고왕 아버지는 '비류왕(比流王)'이라는 칭호를, 백제 20대 왕도 '비유왕(毗有王)'이라는 칭호를 각각 사용하여, 위 비류왕(沸流王)과 유사한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백제 사람들이 졸본부여 계승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귀족들과 백성들의 통합을 위하여, 비류왕을 상당히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백제 사람들은 비류왕을 자신들의 역대 왕으로 인정하면서, 백제를 실제 건국한 온조왕과는 별도로, 비류왕과 온조왕의 공통 선조인 주몽을 백제 왕족의 혈통적 시조이자 태조(太祖)로 내세웠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태조는 그 나라를 건국한 사람에게만 붙여지는 호칭은 아니고, 그 나라 건국 전의 위대한 조상에게도 붙여지는 호칭이다. 예로는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조비가 위나라 초대 황제가 된 후, 자신의 아버지 조조에게 태조(太祖)라는 묘호를 올린 것이 있다. 그 외에도 중국에 몇몇 예가 있다.



 

    다음으로 중국 사서에 기록된 부여 시조 동명과 도모왕을 비교해 보자.


   부여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의 화식열전에 최초로 그 이름이 등장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늦게 잡아도 기원전 91년경에는 편찬되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아무리 늦어도 부여는 기원전 100년 무렵에는 건국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온조왕이 기원전 18년에 건국하였으므로, 백제와 부여는 건국 시기가 최소한 80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한편, 근구수왕은 도모왕의 10세손이고, 온조왕의 9세손이므로, 도모왕은 온조왕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온조왕의 아버지가 백제 건국 시점보다 약 80년 전에 부여를 건국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컨대, 도모왕이 부여를 건국하고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한 것이 각각 15세 때라고 가정하면, 도모왕은 온조왕을 기원전 32년에 낳았어야 한다. 도모왕은 기원전 100년경에 15세이므로, 기원전 32년에는 83세( = 기원전 100년 + 15세 - 기원전 32년)가 된다. 과연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매우 비현실적이다. 뿐만 아니라 부여가 기원전 300년경부터 200년경 사이에 건국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다수 있는데, 이러한 견해를 취할 경우에는 부여 건국 시조가 도모왕이 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왕 계보를 어떻게 믿을 수 있나?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초기 왕들의 세대수는 신찬성씨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에 관해서는 후에 따로 이야기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백제 본기의 초기 왕 계보를 신뢰할 수 없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초기 왕들의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길고, 그들이 비현실적으로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하고, 그 아들인 온조왕이 기원전 18년에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삼국사기의 고구려 왕들과 백제 왕들의 재위 기간 및 생존 기간을 편년(編年)하였을 때,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시기가 실제보다 앞당겨져 편년 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런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때보다 약 68년 정도 앞선 부여 건국 시조를 도모왕으로 보고 백제 왕들의 재위 기간 및 생존 기간을 편년 하게 되면, 재위 기간 및 생존기간이 삼국사기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으로 길게 되어 오히려 신뢰성이 더 떨어지게 된다.


   결국, 삼국사기 백제왕 계보의 신뢰성 문제와 관계없이, 백제 태조 도모왕은 부여 건국 시조가 될 수 없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만 보아도, 속일본기와 신찬성씨록에 기록된 백제 태조 도모왕은 고구려 시조 주몽이 분명하고, 부여 건국 시조나 그 외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따라서 속일본기의 나머지 구절 즉, '도모왕이 부여(扶餘)에서 나라를 열었다'는 구절은, '동명이 북부여에서 나라를 열었다'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몽이 졸본부여에서 나라를 열었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특히 '천제가 녹[籙, 이는 단군신화의 천부인(天符印)과 같은 부절(符節)을 말한다]을 주어 한(韓)을 통솔하게 하였다'는 구절까지 합해 보면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삼국시대 말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켜 삼한(三韓)이라고 불렀으므로, 졸본부여에서 건국한 고구려 시조 주몽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나, 북부여 건국 시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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