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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다림 Oct 22. 2021

백제 태조 도모대왕은 누구인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일본의 속일본기(續日本紀)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백제 시조를 도모왕(都慕王 혹은 都募王)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 도모왕은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 기록된 사람 중 누구일까?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앞으로 일본과 중국 기록을 읽을 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편의상 한자(漢字)는 모두 한국식으로 읽는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둔다. 




   먼저 속일본기(續日本紀)부터 보자. 환무천황(桓武天皇) 9년(790년) 가을 7 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記事)가 실려 있다.

 

저희들의 본 계통은 백제국 귀수왕(貴須王)에서 나왔습니다. 귀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대 왕입니다. 무릇, 백제 태조(太祖) 도모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日神)이 내려온 분으로, 부여(扶餘)에서 나라를 열었습니다. 천제(天帝)가 녹(籙, 부절을 말한다)을 주어 모든 한(韓)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했습니다.

(本系,出自,百濟國貴須王. 貴須王者,百濟始興,第十六世王也. 夫,百濟太祖都慕大王者,日神降靈,奄扶餘而開國. 天帝授籙,摠諸韓而稱王)


    이 기사는 백제 왕실의 후손인 백제왕원신(百濟王元信) 등이 일본 환무천황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 중 일부다. 위 기사 전체의 내용은, 자신들의 가계(家系)와 일본에서의 업적 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에게 조신(朝臣)의 성(姓)을 내려 달라고 상소를 하였고, 이에 환무천황이 그들이 사는 곳의 이름을 따서 관야조신(菅野朝臣)이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는 내용이다. 

  

   위 기사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을까?


   속일본기는 환무천황의 지시로 797년(백제가 멸망한 660년으로부터 137년 후)에 완성된 사서이므로, 이 기사는 그로부터 7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내용이 포함된 상소를 올린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하다. 나아가 위에서 인용한 기사의 내용도 백제 멸망 이전부터 백제 왕실에 전승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제 시조가 도모왕이라는 것과 귀수왕이 도모왕을 시조로 하여 백제 제16대 왕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추정해도 무방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 상소문에는, 그 내용이 국사(國史)와 가첩(家牒 : 족보를 말한다)에 근거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대 신분제 사회에서, 자신이 귀족인 이유는 부모가 귀족이기 때문이고,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왕이었다는 점이다. 혈통이야말로 자신의 신분과 지위, 권력과 부귀 등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왕족과 귀족 가문에서는 이를 철저하게 기록하여 전승하는 한편, 제사 의식 등을 통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갔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사람들의 신분과 지위 등을 확실하게 하고, 적절한 처우를 위해서 별도로 왕실과 귀족들의 계보를 관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고대 사회에서 매우 다양한 제사가 행해졌고, 또 조정에서 정기적으로 호적을 조사하여 기록 및 관리를 했다.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편찬도 이러한 것의 일환이고,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왕력(王歷)도 이러한 자료가 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는 다양한 가문(家門)의 백제 왕족들과 귀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 시조와 그에 얽힌 설화의 핵심적 내용, 역대 왕 계보 정도는 널리 알려져 있었거나 쉽게 크로스 체크가 가능한 사실이어서, 어느 한 가문에서 이것을 허위로 조작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환무천황은 그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純陁太子)의 후손이다. 따라서 환무천황도 백제 시조나 백제왕들의 계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환무천황은 790년 2월 27일에 "백제왕(百濟王, 이것은 사람의 성이다) 등은 짐의 외척(外戚)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두 사람을 발탁하여 작위를 더하여 준다”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는 당시 재위하고 있던 천황의 모계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일본 조정에서도 자료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또 이 문제에 대하여는 다양한 검증을 할 것이 쉽게 예상된다. 게다가 이것이 사서에 기록된 점에 비추어 보면, 당시 일본 조정에서 이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히 허위의 내용으로 상소를 올리기는 쉽지 않다.


   셋째, 그들이 위 상소에서 '백제 시조 명칭과 귀수왕이 제16대 왕'이라는 사실을 허위로 이야기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특히 왕조 시대에 왕에게 허위 상소를 올리는 것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에 해당하여 참형에 처해질 정도로 중한 죄다. 왜냐하면, 최고 통치자인 왕이 허위 내용의 보고를 기초로 판단을 잘못하게 되면, 매우 큰 국가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도중에 체포되어 참형을 당할 뻔했던 것도 이 죄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거짓 여부가 쉽게 밝혀질 수 있는 위와 같은 내용을 허위로 기재할 이유는 없다.




   한편, 앞으로의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 속일본기의 위 기사(記事) 내용을 분석,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백제 태조(太祖) '도모왕'은 태양신이 내려와 태어났다.

째, 귀수왕은 도모왕에서부터 시작하여 제16대 왕이다.

째, 도모왕은 부여에서 나라를 열어 모든 한(韓)을 통솔할 천명(天命)을 받았다.


   앞으로 중국과 한국 사서에 등장하는 백제 건국 관련 인물들 중 위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차례로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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