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운기의 단군신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기(本紀)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는데 환웅(桓雄)이라 하였다. 환인이 환웅에게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弘益人間)?”라고 하였으므로 환웅은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귀신 3,000명을 데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분을 일러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 하였다. 손녀(孫女)에게 약을 먹여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하여 남자아이를 낳게 하니,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다. 조선의 땅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沃沮), 동북 부여(扶餘), 예(穢)와 맥(貊)에게 모두 단군의 교화(敎化)가 미쳤다.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阿斯達) 산에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으니, 죽지 않은 까닭이다. 』라고 하였다.
요(堯) 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舜) 임금 때를 지나 하(夏) 나라 때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殷) 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네. 지금의 구월산(九月山)으로 일명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라고 부르는데, 사당(祠堂)이 아직도 있다.
이와 같은 제왕운기의 단군신화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제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弘益人間) 땅으로 지목한 '삼위태백'(三危太白)'이 어디인지 알 필요가 있다.
이 '삼위태백'이란 말은 세 가지 방법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삼위와 태백을 각각 별개의 장소로 보는 방법, 둘째, 삼위가 태백을 수식하는 말로 보아 삼위의 태백으로 보는 방법, 셋째, 삼위태백을 하나의 장소로 보는 방법 등이다. 아래에서는 그중 첫 번째 방법에 따라 삼위태백이 어디인지 찾아본다.
먼저, 태백(太白)이 어디일까?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세 개를 받아 내려온 곳이 태백산 정상이므로, 이 태백이 태백산(太白山)을 말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태백산이 오늘날 백두산이라는 설이 있으나, 나는 묘향산(妙香山)으로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白頭山)'은 산 정상에 흰 눈이 쌓여 있어 흰머리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삼국사기 동이전의 고구려전에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 나오고, 고려사 열전 윤관전에도 '개마산(蓋馬山)'이 등장한다. 자세한 논증은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결론만 이야기하면, 이 '개마(蓋馬)'라는 말을 한자식으로 고친 말이 '백두(白頭)'라고 본다. 여기서 '蓋'는 오늘날 '해' 또는 '희다'는 뜻을 가진 고구려 말을 표기한 것이고, 馬는 오늘날 '머리'라는 뜻을 가진 고구려 말을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금강산을 겨울에 개골산(皆骨山)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皆' 자도 '희다'는 뜻을 가진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고구려에서 '태백산'이 아닌 '개마산'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이름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고려사 지리지와 보현사비(普賢寺碑, 고려 인종 20년, 1141년 건립)를 보면, 오늘날의 묘향산(妙香山)은 고려 초인 1042년경까지 태백산으로 불렸다가, 그 이후부터 묘향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통일신라에서는 오늘날 강원도 태백산을, 당시에도 태백산으로 부르면서 오악(五岳) 중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고, 또 묘향산은 통일신라의 영토도 아니었으므로, 통일신라가 묘향산을 태백산이라고 이름 지었을 가능성은 없다.
묘향산은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 북쪽에 있는 산으로서 인문 지리적으로 평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산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묘향산을 처음으로 태백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사실들에다가 앞에서 본 것처럼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고구려 행정지역 명칭인 평양성이 등장하고, 또 제왕운기의 단군신화가 문자로 기록된 것도 고구려 시대라는 것을 보태어 보면, 이 태백산은 고구려 사람들이 오늘날의 묘향산을 부르던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백두산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천지(天池)다. 또 백두산 정상에는 나무가 자랄 수 없으며, 춥고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은커녕 짐승들도 살기 어려운 곳이다. 특히 난방이 어려웠던 고대 사회에는 더욱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런데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 정상의 모습은 이러한 백두산과 전혀 맞지 않는다. 즉, 환웅이 내려온 태백산 정상에 천지와 같은 신비한 연못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아무런 묘사가 없고, 오히려 신단수(神檀樹)가 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나무 수(樹)는 살아 있는 나무를 뜻하고 죽어 있는 나무를 뜻하지 않는다.
한편, 묘향산(妙香山)에는 그 이름처럼 실제로 향나무가 많다고 한다. 단군신화의 단수(檀樹)를 보통 박달나무로 보지만, 나는 향나무라고 생각한다. 향나무 종류 중 '전단향(栴檀香)', '백단향(白檀香)'이 있는데, 이때 이 단(檀) 자를 쓴다.
마지막으로 백두산에는 단군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을 찾기 어려우나, 묘향산에는 단군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 많다.
다음으로, 삼위(三危)는 어디일까?
태백이 단군신화 내용 중에 있으므로, 삼위도 단군신화 내용 중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에는 이 물음에 답을 줄 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다. 반면,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그 실마리가 있다.
즉, 단군이 말년에 들어가 산신이 된 곳이 아사달산(阿斯達山)인데, 이는 당시의 구월산(九月山)이고, 일명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의 글에서 본 것처럼 이 '아사달'의 '앗', 구월산의 '구', 궁홀의 '궁', '삼위' 등이 모두 숫자 '9'와 관련된 말이다.
그러면 삼위태백(三危太白)의 삼위(三危)를 오늘날의 구월산이라고 볼 것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구월산은 단군이 들어가 신(神)이 된 곳이므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땅인 삼위태백의 삼위(三危)와는 거리가 있다. 제왕운기에서 구월산을 삼위라고 주석을 단 이유는 삼위가 숫자 '9'와 관련된 말이어서, 후대에 숫자 '9'와 관련된 구월산(九月山)과 잘못 연결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삼위는 어디를 말할까? 제왕운기의 단군신화를 다시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름이 단군이다. 조선의 땅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라, 고례, 남·북 옥저, 동·북 부여, 예와 맥에게 모두 단군의 교화가 미쳤다.(名檀君. 據朝鮮之域, 爲王. 故 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 皆檀君之燾也)
위 구절을 보면, 조선 지역을 포함하여 단군이 다스린 지역이 모두 아홉 곳이다(남북 옥저와 동북 부여를 각각 2개로 본다). 위 아홉 지역을 한꺼번에 삼위라고 칭한 것이 아닐까?
한편, 위 아홉 지역 중 시라(尸羅)는 신라의 다른 표기이고, 고례(高禮, 실제로는 '고리'라고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고구려(고구려는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라 개칭하였다. 이 고려 또한 실제로는 고리라고 발음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의 다른 표기다. 그리고 예와 맥은 앞에서 언급한 조선, 시라, 고례, 남북 옥저, 동북 부여 이외에 예맥족이 사는 지역을 통칭(統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위 지역은 대체로 오늘날 한반도와 요동, 만주를 아우르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 문장에서 '그리하여(故)'라는 접속사를 바로 앞의 문장인 '왕이 되었다'라는 말에만 연결된 것으로 보지 말고, 앞에 나오는 단군신화 내용 전체를 받는 접속사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제왕운기의 단군신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천제 환인이 환웅에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弘益人間) 땅으로 삼위태백(三危太白) 즉, 한반도와 요동, 만주 지역 등 예맥족이 사는 지역을 지목하고, 환웅을 태백산(太白山)에 내려 보냈다. 환웅이 단군을 낳고,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여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단군이 한반도와 요동, 만주 지역에 사는 모든 예맥족을 교화(敎化)하여, 마침내 천제의 뜻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이루었다.
광개토대왕이 평양을 중시하고 그곳에 9개의 사찰을 건립한 것은 수백 년간 분열해 있던 9개의 예맥족을 다시 통합하여 단군조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를 건립하고, 평양으로 천도한 것도 이와 관계있지 않을까?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세운 것도 이러한 염원을 담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