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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다림 Oct 22. 2021

단군조선의 도읍은 아사달이 아니라 평양이다.

 "단군조선의 최초 도읍은 지금의 평양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동안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와 다른 말을 들으면 정서적으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를 역사의 중심이 아닌 역사의 변방으로 여기는 대륙 중심의 역사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지구는 둥글다. 어디든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 곧 역사의 중심이다. 반도라고 역사의 변방이라고 할 수 없다. 알렉산더 제국도 발칸반도에서 시작하여 대제국이 되었고, 로마 제국도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하여 유럽을 제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금나라와 청나라도 만주 지역에서 시작하여 황하유역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단군조선이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대륙으로 진출하였다는 사실에만 유독 거부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한반도에도 구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들처럼. 그들은 언제나 그들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고, 결코 대륙 역사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 스스로 한반도에서 우리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그들과 우리 모두를 역사의 변방으로 내모는 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가급적 정서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사료와 이성이 가리키는 대로 역사적 사실을 추론해 나가는 것이 역사를 복원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정서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단군조선의 최초 도읍을 '아사달'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위치를 지금의 평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비정하려 한다. 그와 같이 주장을 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그중 중요한 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魏書)≫에 단군조선의 최초 도읍지를 '아사달(阿斯達)'이라 기록하고 있다. 한편, 아사달은 '阿斯(아사) +  達(달)'로 이루어진 말인데, 阿斯(아사)가 옛날에는 '아시'로도 발음되었다. 지금 우리말 방언에 '처음'이나 '시작'이라는 뜻의 '아시'라는 말이 있다. 나아가 우리말의 '아시'와 '아침'은 같은 어근(語根)에서 파생되었다. 일본어로는 지금도 아침(朝)을 '아사'라고 훈독(訓讀, 한자의 뜻으로 발음하는 것을 말한다)한다.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을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達(달)은 '땅' 혹은 '산'이라는 뜻을 가진 고대어다.

   따라서 '아사달'은 '시작의 땅' 또는 '아침의 땅'이라는 뜻으로서, 조선이라는 국호와 같은 말이다. 이는 평양이라는 말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이다.


   위와 같은 근거는 신빙성이 있을까? 


   먼저 삼국유사에 실린 ≪위서(魏書)≫의 내용을 보자. 거기에는 단군조선에 관하여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여 나라를 열고, 조선(朝鮮)이라 했다”는 단 한 줄의 기사만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군조선의 초기 도읍을 아사달이 아닌 평양 지역으로 기록하고 있는 다른 여러 사료들과 배치되므로,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다. 

   

   첫째, 위 기록에 이어 삼국유사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는 단군이 처음 도읍한 곳이 '평양성(平壤城)'이고, 그때 이미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지역 명칭인 '평양(平壤)'이라 하지 않고 행정구역 명칭인 '평양성(平壤城)'이라 한 것은, ≪고기(古記)≫의 기록 당시 행정구역 명칭이 '평양성'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평양성은 오늘날의 평양 지역을 가리키는 고구려 때의 행정구역 명칭이다.


   둘째, 제왕운기에 실려 있는 ≪단군본기≫와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려 있는 ≪단군고기≫에는 모두 단군이 처음 도읍한 곳을 '조선의 땅(朝鮮之域)'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본 것처럼 제왕운기의 위 기록은 고구려가 평양 지역으로 천도하기 전에 기록된 것인데, 당시 '조선의 땅'이라는 말은 오늘날의 '평양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당대의 중국 사서나 고구려 유민의 묘지문 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셋째, 삼국사기 동천왕 21년(247) 봄 2 월조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도읍지(仙人王儉之宅)'라고 하여 위 ≪고기≫와 ≪단군본기≫ 및 ≪단군고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흔히 이 부분을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주석으로 보는데 그렇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주석은 모두 본문보다 작은 글씨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본문의 글씨와 동일한 크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삼국사기 편찬 이전의 원사료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반면, 아사달에 대해서는, 위 ≪단군본기≫와 ≪단군고기≫에는 모두 단군이 들어가 신(神)이 된 곳이라고 할 뿐 아예 단군의 도읍지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 ≪고기≫에도 단군이 두 번째 도읍을 하였던 곳이자 마지막으로 산신이 된 곳이라고 하고 있을 뿐, 첫 번째 도읍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단군신화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료들을 무시하고, 매우 소략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는 ≪위서(魏書)≫만 옳은 것인 양 주장하다가는, 단군신화 내용 전체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의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다음으로 '아사달'을 '시작의 땅' 또는 '아침의 땅'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고대어를 표기한 한자의 현재 발음이 지금의 순우리말이나 일본어와 발음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본 상식이다. 왜냐하면, 한자(漢字) 발음은 물론이고, 우리말 단어의 발음이나 뜻이 시대에 따라 많이 변할 뿐만 아니라, 우리말에 유사한 발음이면서도 뜻이 다른 말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은 서로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하나의 아이디어 정도에 불과하지, 이것만을 근거로 곧바로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추정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아사달을 '시작의 땅' 또는 '아침의 땅'이라고 볼 수 있는 사료는 앞서 본 ≪위서(魏書)≫가 유일한데, 이것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은 앞서 보았다. 


   만일 ≪고기≫와 ≪단군본기≫ 및 ≪단군고기≫의 기록처럼 '아사달'이 '구월산'이 맞다면(아니라고 볼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지리적으로 보더라도, 구월산은 황해도 서쪽에 있어 '아침' 및 '처음'과 연결을 짓기 어렵다. 또 단군신화의 이야기 전개를 보더라도, 단군이 태백산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나라를 건국한 후, 아사달로 가서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아사달은 시작이 아니라 끝과 관련이 있다. 방향을 보더라도, 단군이 동북 방향인 태백산 즉, 묘향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남 방향에 있는 평양을 거쳐, 다시 그 서남 방향에 있는 아사달 즉, 황해도 구월산으로 옮겨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에서도 아사달을 서쪽 혹은 저녁과 관련지을 수는 있어도 동쪽 혹은 아침과 관련짓기는 어렵다. 

   동쪽과 관련 지으려는 생각은 혹시, 무의식적으로 중국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은 아닐까?   




   오히려 아사달의 '아사'를 '아홉'의 뜻으로 보고, '아사달'을 구지(九地) 혹은 구산(九山)의 뜻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송나라 손목이 고려 숙종 8년(1103년)에 고려를 방문하고, 고려말들을 기록한 계림유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구(九)는 아호(鴉好)"라 하고, "구십(九十)은 아순(鴉順)"이라 한다.


   여기서 아순은 '아호 + 순’인데, 이때 'ㅗ'가 탈락하고 'ㅎ'이 사이시옷으로 변해서 '앗순'으로 발음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 우리말에서 '다섯' 뒤에 '되'라는 말이 오면, '섯' 중 '엇'이 탈락하고 초성의 'ㅅ'이 사이시옷이 되어 '닷되'가 되고, '여섯' 뒤에 '세'라는 말이 오면, 마찬가지로 '엿세'가 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고대어에서 '아호'이라는 말 뒤에 '달'이라는 말이 왔을 때, '앗달'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斯'자는 삼국시대 이두 표기 시 흔히 사이시옷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보면, 阿斯達(아사달)은 사실은 '앗달'이라는 발음을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達(달)'은 '山' 혹은 '땅(地)'을 나타내는 고대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지금도 '양달' 혹은 '응달'이라는 말에 남아 있다. 


   결국, 阿斯達은 '앗달'이라는 발음을 표기한 것으로서 그 뜻은 '구지(九地)' 혹은 '구산(九山)'의 뜻을 가진 말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둘째,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적 근거가 있다. 즉, 아사달을, 삼국유사 ≪고기≫에서는 '궁홀(弓忽)'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하고, 제왕운기에서는 '구월산(九月山)' 또는 궁홀, 혹은 '삼위(三危)'라 하며,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구월산이라 하고 있다.


   아사달이 구월산이 된 이유를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은 후대로 오면서 고유 지명을 한자(漢字)식 지명으로 변경하기 시작한다. 특히 통일신라(내가 이렇게 부르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편의상 옛날부터 부르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할 뿐이다) 경덕왕 때 많은 고유 지명을 한자식으로 변경하였다. 그런데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사달산'이라고 불리던 산 이름을 한자식으로 고치면서, 阿斯達山을 '앗 + 달 + 산'으로 보고 '앗' 부분은 구(九)로 제대로 고쳤는데, '달'은 뒤에 산(山)이라는 말이 따로 있으므로 그 뜻이 '산'이나 '땅'일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월(月)이라는 뜻으로 오해하여, 구월산(九月山)이 된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아사달은 弓忽(궁홀)로도 표기되었다. 고대어에서 주몽, 중모, 추모가 모두 같은 말인 것처럼, 'ㅇ' 받침이 있는 한자와 없는 한자가 서로 넘나들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따르면, 궁홀은 구홀과 유사하게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구홀 중 홀은 고구려 말로 성(城)이나 산(山)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궁홀은 원래 구홀(九忽)로서(우리말에서 외갓집이나 역전앞처럼 한자말과 순우리말을 섞어서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경우는 허다하다), 구산(九山)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는 앞서 본 아사달과 같은 뜻의 다른 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아사달'을 한자식 지명으로 고칠 때,  아사달의 별칭으로 ‘구홀산’이 있어서, 발음이 유사한 '구월산'으로 더 쉽게 고쳐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또 고구려어로 삼(三)이 密(밀)인데, 이 글자는 현대 중국어로는 '미'라고 읽고, 일본어로는 '미쯔'로 읽는다. 고구려어로 3을 '미'라고 했다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금미달(今彌達)의 '미'자가 혹 3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다. 나아가 삼위(三危)는 혹 '삼미'라고 읽고, 3x3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삼칠일처럼 말이다. 


   이와 같이 위 사료에서 '아사달'의 별칭으로 언급한 궁홀, 구월산, 삼위, 금미달 등이 모두 구(九)와 통하는 말들이다. 


   셋째, 앞에서 본 것처럼 지리적으로나 단군신화의 이야기 전개 및 방향을 보면, 아사달은 '끝'이나 '서쪽' 혹은 '저녁' 등과 관련되어 있는데, 오행상으로 이들은 모두 숫자 '9'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단군신화에는 유난히 3과 관련된 숫자가 많이 등장한다. 삼위태백의 3 / 천부인 세 개의 3 / 무리 혹은 귀신 삼천의 3 / 삼칠일의 3 / 환인, 환웅, 단군의 3 / 풍백, 우사, 운사의 3 / 인간의 삼백육십여 가지의 3  등이 있다. 또 조선, 시라, 고례, 남북 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은 모두 9인데, 이를 다시 분석해 보면, 조선, 시라, 고례의 3 / 남북 옥저, 동북부여, 예맥의 3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은 후대에 고구려가 3경 제도를 시행한 것, 한(韓)이 삼(三)한으로 구분된 것, 마한이 54(=9x6)국이 된 것, 진한이 6국에서 출발하여 12국이 된 것, 변한이 12국으로 이루어진 것, 가야의 구지봉에 모인 9간, 부여의 관직이 6축의 6으로 구성된 것,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한 것, 신라의 황룡사 9층 탑 등도 모두 이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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