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어디쯤이면 좋을까
오래전 써두었던 글이긴 한데.
달은 농도가 다른 바다잖아요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나자 갑자기 할 일이 모두 끝나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저문 날의 아이들처럼 갑자기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커피를 마셔야 할까요 아님. 다른 얘기
설거지해야겠구나 하고 주방 쪽으로 가려는데 그가 그릇들과 냄비 그리고 숟가락, 젓가락을 쟁반에 모아 들고 설거지 그릇에 담더니 물을 틀어 두었어요.
“저녁을 해주셨으니 설거지도 제가 할게요”
“아뇨!!”
그가 돌아서는 제 손목을 잡고 거실로 되돌아 나오며
“여기 밥 차려주고 설거지하러 온 거 아니잖아... 요”
소파에 나를 앉히고
서랍장을 뒤적이더니 작은 비닐봉지를 꺼냈어요
“다른 사람들은 페디큐어도 많이 하고 다니던데 안 좋아하는 거예요. 아님 못하는 거예요? 발등의 멍 자국만 보고 좋아하고 말이죠”
그가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며 말을 이어갔어요
“오늘 보니 발톱도 조금 기른 것 같고 지금 바르면 딱 예쁠 것 같아요”
그가 여러 개의 매니큐어와 리무버, 화장솜을 꺼내 들었어요
“오늘은 내가 바르고 싶은 곳에 바르고 싶은 색을 칠할 겁니다. 괜찮죠?
그가 작은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와 발을 씻겨 준다고 했어요.
다른 때였다면 상황을 피하려고 집으로 돌아갔을 텐데 그의 표정을 보자 그냥 다 들어주고 싶어 졌어요. 작은 비누로 풍성한 거품이 일고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들이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를 오가는 동안 그의 손의 부드러움은 간지럽다기 보단 다른 깊고 은밀하며 따스한 내부를 스치고 지나고 있었어요.
마른 수건으로 발가락을 토닥이며 말리고 마지막으로 발가락 사이는 드라이기로 말려주었어요.
그리고 하나의 뚜껑을 열고 솔을 병 끝에 부드럽게 고르더니 엄지발가락을 잡았어요 발톱 양옆의 공간을 조금 남겨두고 한두 번 붓질하고 입김으로 후우 불어주었어요. 그리고 잠시 자랑스럽게 칭찬받을 일을 한 사내아이처럼 웃었어요.
“우와 예전에 그림 그렸어요”
그의 얼굴이 환해졌고 그의 행복한 얼굴을 보는 것이 나쁘지 않았어요.
일어서려는 저를 제지하던 그가
“한 번 더 발라야 해요. 엄지만 바를 거 아니고요”
그가 다시 엄지발톱에 칠을 하자 색이 좀 더 선명해지고 더 잘 바른 기분이 들었어요
“나는 윤이 나거나 펄이 들어간 건 싫어요 이건 무광 블랙이에요 윤기 없이 검은!!
그가 광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다음 발가락들은 착한 아홉 명의 난쟁이들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산을 함께 쓰고 비 내리는 길을 걸어 그녀의 집에 바래다주었죠 뒷걸음질로 그녀의 거실에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한 뒤 우산을 잠시 접어 비를 맞으며 걸었어요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죠
“우산을 손에 들고 비를 맞는 건 뭐죠”
“기분 좋아서요 이런 비쯤 상관없다는 듯이.... 잘 자요 고마워요”
다음날은 비가 온 뒤라 무척 추웠죠 밤이 되자 바람까지 불어 손끝이 따가울 만큼 추웠어요
재난 문자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죠 11월의 마지막 밤이었죠
아파트 앞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죠 혼자 사는 남자들의 저녁은 곤혹스럽기 그지없죠
같은 걸 먹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가끔 새로운 음식을 꿈꾸기도 하니까요
지난번 인터넷에서 본 순두부 찌를 해 먹어 볼까 하고 마트에 들어서는데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어요 마스크로 입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눈이 나 이렇게 환하게 웃고 있어요 라며 나를 반겼죠 저요 저는 그녀의 눈을 보자 물속에 가라앉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렸어요
그녀가 뒤따르며 말을 건넸죠
개기일식
그가 신고 온 슬리퍼를 보며 투명 스트랩에 관해 얘기했어요
"당신 새로 산 신발 발등에 멍이 보이던데 일부러 그런 신발을 산 거죠?"
"누구라도 물어보면 대답해 주려고 했는데 아무도 안 묻던데요"
그의 눈을 바라다보았어요. 그의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어요. 그의 눈을 왼손으로 가리고 오른손으로 남방 단추를 풀었죠. 그의 가늘고 아름다운 손을 이끌고 가슴을 만지게 해 주었어요
"어릴 때 화상을 입었어요. 가슴에 그날 그래서 그렇게 놀랐어요. 당신이 두 번째 만지는 거니까 그냥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고 " 그가 가린 내 손을 가만히 쥐어 내리며
"당신 가슴에 붉은 꽃 레이스 무늬가 있었군요"
그의 놀라운 말에 피-씩 웃음이 났어요
그가 가슴을 물끄러미 보더니 남방 단추를 손수 잠가 주었어요
나는 그의 손목을 쥐고 있었고요
그가 나를 다시 품 안에 품고 속삭였어요
"나중에 얘기하고 싶을 때 그 꽃밭에 다녀간 남자얘기해 줄래요?"
"그 남자에게도 꽃밭이었을까요?"
불을 켜지 않고 밤의 베란다에 서 있었어요. 나의 날개 뼈에 그의 심장 소리가 깃털을 심어주었어요 조금 따끔거리고 간지러웠어요
그녀의 날개 뼈를 더듬던 손끝을 들여다보았죠. 평평한 고원의 언덕 같은 그녀의 어깨뼈 아래 낭떠러지로 사라져 갔을 부끄러움들 숨을 길게 내쉬며 빗장뼈에 고여왔을 절망과 아쉬움이 그녀의 부드럽고 윤기 나는 살갗 위로 깃털처럼 펼쳐졌죠 어루만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그녀의 단추를 되짚어 잠가 주었죠. 그녀가 다시 한번 내 손을 잡아 가슴 위에 올려주었어요
어릴 적 작은 참새 한 마리를 주운 적이 있었죠. 길다가 주운 참새를 가만히 지켜보다 손안에 쥐어보았어요. 제 심장이 마구 뛰고 작은 참새는 제 심장처럼 온몸으로 숨을 쉬던 그 새가 떠올랐죠
그녀 날개 뼈의 낭떠러지와 빗장뼈의 골짜기 사이에서 그녀의 심장은 서로를 팽창하고 수축하며 서로를 숨 쉬고 있었어요 내 손끝에서 그녀의 화상 자국이 붉은 꽃처럼 피어나고 그녀의 가슴을 손으로 감싸 쥐고도 우린
서로를 선한 눈으로 쳐다보았죠. 그럴 수 있는 내가 참 순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자고 가시죠?"
나지막한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죠
그의 침실은 따스한 배려로 방안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암실 같았어요
영화관에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 앞을 볼 수 없었어요
침대 위로 오르자 그의 냄새가 나는 이불속에서 그의 벗은 상체가 눈앞에 드러났죠
벌어진 어깨와 부드럽고 넓은 가슴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어요 그가 남방을 벗겨주는 동안 그의 눈빛이 따스했어요
그런 눈빛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브래지어를 풀 때 그가 조금 힘겨워했지만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어요
누군가의 손에 의해 풀려난 작은 토끼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어요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살갗 위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간지러웠어요 꽃들도 피어날 때 간지럽지 않았을까 하고 웃음이 났죠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 웃는 입술에 입술을 포개었어요 그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어요 솔직히 말하면 너무 떨고 있었어요 그런 그가 귀엽다고 생각할 즈음
그의 손길이 닿는 자리마다 그의 부드럽고 조금은 촉촉한 입술이 닿았어요 어떤 곳은 혀 끝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온몸이 5월의 장미 덩굴 같았어요 몸이 풀리고 나른해졌어요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문득 돋아난다는 게 신기했어요 서툰 그의 손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어요 아직 현상되지 못한 그와 내가 그 암실에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