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하늘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바닥은 물기로 축축하고 스치는 바람결에도 풍요로운 물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집안의 습도는 30%의 건조함으로 집안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텨내고 있습니다.
무심코 열어 본 냉동실 구석에서 언제 넣어둔 지 모를 검은 비닐봉지를 발견합니다. 비닐봉지를 손으로 만져봅니다. 딱딱하고 차갑고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비닐봉지를 꺼내 식탁 위에 둡니다.
낮은 하늘은 햇살이 쏟아지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어둡습니다.
어릴 적 목욕을 좋아했던 이유는 물이 주는 질감도 있었지만,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면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쭈글쭈글한 모양이 너무나 신기했기 때문이었죠. 쭈글쭈글해진 손가락으로 사물을 만지는 느낌을 오랜 시간 지속하고 싶어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유리잔을 만지거나 책을 잡고 있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이 다르게 전달되는 착각에 사로잡힌다는 것에 매료되었죠.
손가락을 들여다보면 수없이 쏟아지는 빗물의 배수로였고, 단 한 번도 매몰된 적 없는 지하 도시였으며, 햇살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원형의 꽃씨였죠..
식탁 위의 검은 비닐봉지는 이제 막 늦잠에서 일어난 여자처럼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습니다.
그가 비닐봉지의 매듭을 천천히 풀어갔죠. 달콤한 향이 결박된 곳을 돌아 나올 때마다 뿜어져 나왔어요. 그 향을 조금 더 음미하기 위해 입을 천천히 오물 거리듯 처음보다 느리게 매듭을 풀고 있었어요. 비닐봉지가 낮고 긴 한숨 소리를 냈었죠.
삼투압 현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족했고 신경계 이상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했던 주름은
미끄러운 표면을 잡기 위한 진화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작고 촉촉하며 순식간에 부서져 내리는 것.....
늦봄에 딸기 한알을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냉동실에 숨겨두었어요. 매년 봄마다 그랬던 것 같아요. 봄을 보내는 의식처럼 말이죠.
여름이 시작될 때까지 기억해 두었다가 초겨울이 시작될 즈음 번뜩 생각이 나요. 잊어버린 일도 기억하는 일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딸기 한알은 헤어진 연인 같다는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