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헝클어지면 어때

동파되지 않으면 되지

by 적적

이 정도 더울 거라면 비라도 잠시 퍼부어야 되는 거 아냐?


사무실 에어컨으로 살갗이 차갑습니다.


월요일 아침이면 비가 오지 않는 한 운동장에 모여 조회를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운동장 한가득 모여 햇살 아래 서서 앞으로 나란히 와 좌우로 정렬을 외치며 지쳐가고 있을 즈음 빌런처럼 교장 선생님이 그늘가로 등장하시고 우리는 눈이 부셔 쳐다볼 수도 없는 단상 아래 관심 없는 시상자들에게 박수를.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훈화 말씀이 끝나기를 바라고 또 바랐었죠.


그 아이였어요. 작고 하얀 아이. 그래서 더 깊은 물처럼 검은 머릿결이 기억에 남던 아이가 햇살 아래서 주저앉습니다. 그대로 푹 쓰러집니다. 그늘가의 선생님이 달려들어 오시고 아이들이 아이를 부축합니다.


조회는 그런 일로는 끝날 줄 모릅니다. 그런 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운동장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 후로도 아이는 간혹 쓰러져 양호실로 사라졌습니다.

꽤 부유한 집안 막내딸로 자란 그녀가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우리 집 옆 단칸방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야 어머니는 가끔 그녀를 불러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고 다른 반이 되어서도 꽤 오랫동안 그녀는 조회 시간에 쓰러졌습니다.


어머니가 김치를 반듯하게 칼로 썰어 밥상 위에 올리십니다. 손님이 오실 때는 꼭 칼로 썰어 내주십니다. 그리고 사람 수대로 계란 노른자가 반숙이 되게 프라이를 올리시고요. 그녀와 함께하는 저녁 밥상이 너무나 만족스러웠습니다. 특히나 가지런히 썰어진 김치가 행복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녀가 사라졌습니다. 밤새 이사를 했다고 동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구가 모두 사라져 버린 텅 빈 공간을 담을 넘어 들어가 열린 문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사라진 가구들이 놓여있던 자리마다 떠나간 사람의 자국이 남아있습니다. 다시 새 장판이 깔릴 때까지 저녁마다 아무도 몰래 그 단칸방을 찾아갔습니다.


작년 7월 초 제가 사는 동네는 갑자기 인도 정비를 하느라고 보도블록을 다 뒤집어엎고 모래를 퍼내고 다시 모래를 채우고 열흘 남짓 더위 속에서 모래 먼지가 날리는 공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편의점 사장님께서


“아휴 난리도 아니죠? 가게 안으로 모래가 한가득이야 일하는 사람들이 다들 중국 사람이에요 일당도 많이 준다는데 한국사람은 열에 하나 있으려나”


음료수를 사서 나오다 커다란 사파리 작업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사람과 마주쳤습니다.


얼굴을 햇빛 가리개로 가리고 있던 사람



OO 맞지? 설마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회 시간에 쓰러져 매번 응급실에 실려 나가던.


너무 많이 변해서 서로 다른 사람이 돼버린 우리는


어머니 어머니는 잘 계시니?


돌아서 가던 그녀가 성급히 돌아와 묻습니다.

작업 중이라 핸드폰이 없어 어머님이랑 통화할 수 있을까?

그녀가 팔토시를 벗어던집니다. 손바닥이 빨간 목장갑을 벗고 그 하얀 손을 보고 나서야 그녀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새까만 팔목에 하얀 손을 이식한 것처럼 손가락 끝이 쪼글거렸습니다. 물을 제대로 잠가두지 않은 열 개의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졌습니다. 동파를 막기 위해 일부러 물방울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엄마 저예요... 잠시만요.


가로수 그늘로 가서 작업용 모자를 벗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습니다. 편의점 냉동고로 가서 꽝꽝 언 생수 한 병을 건네줍니다.

그녀가 그대로 얼굴에 가져다 대고 핸드폰으로 통화를 할 동안 그녀 시야에 놓여있었습니다.

덩치가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큰소리로 그녀를 부릅니다. 그녀가 핸드폰을 건네주며


고맙다 또 보자


눈가가 빨갛게 변한 그녀가 핸드폰을 주며 웃습니다.

그녀가 점점 작아져 가는 동안 흐르는 땀도 닦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엄마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그 수줍음 많고 낯가림도 심한 아이가 대뜸 엄마라고 부르더라 엄마가 해 준 저녁 먹고 잘 지냈다고 아직도 시금치 된장국이나 계란말이가 생각난다고 찾아뵙고 꼭 감사 인사드릴 날이 올 거라고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느냐고 묻던 어머니도 왜 묻지 않았는지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녀 기도를 해야겠다는 말씀만 하시곤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그녀가 깔아 놓고 간 보도블록에서 나는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습니다.


어제 늦은 시간에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습니다 내일 눈이 올 테니 단단히 준비하라고.


그리고 그녀에게 온 전화가 없는지.

어머니의 용건은 전하를 끊기 전 나옵니다.


첫눈 내리는 아침에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힘들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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