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식회(詩食會)에 초대합니다.
길고 길었었던 머리카락 이민하.
로드무비
이민하
맨 처음의 당신과 마지막의 당신
사이에 내가 있다
우리는 걷는다 팔짱을 끼고
새벽의 공장에서 자정의 극장까지
맨 처음의 당신은 사진 속에 누웠다가도
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온다
마지막의 당신은 복면을 쓰고 지나가지만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맨 처음의 당신을 소개한다
우리는 걷는다 팔짱을 끼고
맨 처음의 당신은 앞모습만 보이고
마지막의 당신은 뒤통수만 보이고
서로 자리를 바꾸어도
얼굴은 따로따로
거울가게 앞에서 문득 멈추면 걸음은 모두 포개지고
당신의 얼굴과 나의 얼굴
서로 자리를 바꾸어도
걸음은 따로따로
당신의 팔인지 나의 팔인지 넝쿨처럼
옆구리를 찌르며 허공을 엮으며
우리는 걷는다 팔짱을 끼고
거리의 풍문에서 숲 속의 비문까지
보폭이 다른 기억들을 끌며
맨 처음의 나와 마지막의 나
사이에 당신이 있다
맨 처음의 나는 당신을 납치하고
마지막의 나는 당신의 인질이 되어
죽어서도 나란히
우리는 걷는다 팔짱을 끼고
오른팔과 왼팔이 엇갈린 채로
빈집 같은 갈비뼈를 껴안고 거미줄을 껴안고
[출처] 미기후 문학과 지성사 2021
시식평
나는 늘 어느 사이에 놓여있었던 것 같아. 그렇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건 그리고 그렇게 일순간 비가 그치는 동안 그녀는 그 억센 빗줄기를 맞고 벨을 누른 거였어.
근처에 왔다가 비를 맞았다고 마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현관 앞에 서 있었거든. 건네준 수건으로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릿결을 닦으며 겉옷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놓은 뒤. 밝은 목소리로 춥다고 배가 고프다고 말했어.
집안엔 몸을 데울 음식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싱크대 안쪽에 인스턴트 크림수프가 떠올랐지.
찬물에 남아 있던 분말을 다 쏟아 넣고 뭉치지 않도록 조심히 젖는 동안 그녀가 소파에 착한 아이처럼 앉아있었어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랬었는데 한 번도 마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나는 수프를 끓이는 데만 열중했고 그녀는 그저 산만해진 머리카락을 말리고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었지.
눋지 않도록 엉기지 않도록 천천히 젓는 일을 떨리는 손이 서늘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었지
너무 많은 양의 수프를 그릇에 담아내고 후추를 뿌리고 동굴 속에서 잠을 자는 용처럼 밖으로 나온 적이 없던 파슬리 가루를 조금 뿌려 식탁에 내려놓았지.
처음으로 꺼내 보는 스푼을 옆에 가지런히 두고.
그녀가 사막을 건너온 사람처럼 아주 작은 분홍빛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더니 바닥이 드러나도록 수프를 먹기 시작했어.
그때 이 시를 읽고 있었고 다 읽을 즈음 그녀가 젖은 외투를 입고 돌아가 버렸지.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설거지해 둔 그릇들과 빗 사이에 그녀의 머리카락뿐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