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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계를 밀어 올릴 때

다정함. 그 낯설고 포슬포슬한 친절이 다가올 때

by 적적

습기 찬 창문에 입김이 맺히는 시간, 커피포트가 내뱉는 작고 따뜻한 한숨 같은 소리가 방 안에 퍼진다. 어디선가 익숙한 향기가 감지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오래전에 먹었던 카스테라, 혹은 누군가의 목덜미에 뿌려진 아주 연한 비누향. 향기의 기억은 언제나 구체적이지 않다. 다만 뭔가 따뜻했었다는 감각만이 남는다.


다정함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 정확한 윤곽 없이 느슨하게 퍼지는 감정. 그것은 때로 쿠션처럼 포슬포슬하고, 때로는 가느다란 실처럼 얇고 투명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은 무거운 방패처럼 다가와 한 인간을 지켜낸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다정함은 낯선 곳에서 불쑥 나타난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오후. 급작스레 쏟아지는 비에 주춤하던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우산의 반을 내어준다. 그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검은 우산, 말없이 기울어진 어깨, 그리고 지나치게 큰 단추가 달린 베이지색 코트만이 장면의 중심을 이룬다. 우산 아래로 스미던 그 짧은 고요. 마치 세상이 비로소 잠시 멈춘 것 같았던 순간. 거기에는 목적도 이유도 없었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고, 증명되지도 않는다. 다정함은 그런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사람들은 다정함을 오해한다. 약하고, 물렁하며, 때로는 비굴한 성질의 것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가장 단단한 용기의 형태 중 하나다.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 말없이 손을 내미는 일. 자신의 시간을 조금 떼어내 다른 사람의 시간에 끼워 넣는 일. 그것은 순수한 의지의 발현이다. 어떤 계산도 없이,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다정함은 그러한 상태에서만 진실하다.



지하철 좌석 앞에 서 있던 노인이 발끝을 조금씩 움직이며 중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시선만 창밖으로 흘렸다. 그런 순간에 누군가는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비워준다. 그것은 소음 없이 이루어진 교대식 같다. 말 없는 배려가 공간을 바꾸고, 그 순간 지하철은 더 이상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작은 공동체로 전환된다.

도서관의 한 구석, 한 권의 책을 찾지 못해 서가를 헤매는 학생 곁에 누군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다. “이 책 말씀하시는 거죠?”



낯선 목소리. 그리고 한 권의 책. 무언가가 그 순간 균열을 내며 무너진다. 그것은 고립감이다. 세상에 혼자인 듯 느끼던 감정은, 작은 다정함 하나에 조용히 꺾인다. 다정함은 외로움의 균형추를 살짝 건드리는 손이다. 거리에서 종이컵을 앞에 둔 사람에게 다가가 음료를 내밀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손. 식당에서 어깨에 걸친 외투가 미끄러지자 살짝 받쳐주는 손. 마트에서 아이가 떨어뜨린 장난감을 주워주는 손. 다정함은 대부분 손을 통해 전해진다. 말보다 빠르고, 눈빛보다 부드럽게. 그 손들은 무언가를 쥐기보다 놓는 법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어린 시절, 감기에 걸렸을 때 어머니가 이마에 올려주던 손. 그것은 약도 아니고 처방도 아니지만, 열을 내리는 데에는 무엇보다 효과적이었다. 다정함에는 어떤 온도가 있다. 그것은 체온보다 약간 높은 온도. 식어가는 감정에 스며들 수 있을 만큼 따뜻하고, 금방 식지 않을 만큼 강한. 그 온도는 공기를 데우고,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가끔은 다정함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낯선 친절 앞에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다정함이 무서운 것이라기보다 그로 인해 자신의 무심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정함은 거울이기도 하다. 자신이 얼마나 무심하게 살아왔는지를, 혹은 얼마나 무심하려 애써왔는지를 비추는 표면. 그래서 어떤 이들은 다정한 사람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괜히 짜증을 낸다. 그것은 그 다정함이 너무나도 명확한 선량함이기 때문이다.

다정함은 권유하지 않는다. 다정함은 제안하지도 않고, 유도하지도 않는다. 다만 거기 있다. 길가에 핀 민들레처럼, 누군가 눈을 돌려 바라보기를 기다리며 그저 존재한다. 사람들은 가끔 그 민들레를 짓밟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피어오른다. 다정함은 쉽게 꺾이지 않는 감정이다.



언젠가, 다정함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 믿음이 조금은 변형되었다. 다정함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사람 하나쯤은 살릴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 다정함은 전염된다. 그것은 눈빛에서 눈빛으로, 손에서 손으로, 침묵에서 침묵으로 번져간다. 마치 따뜻한 불씨처럼.



도시의 골목길에서, 아스팔트 사이로 피어난 작은 풀잎을 발견하고 멈추는 발걸음. 그것이 다정함의 본질이다. 누구도 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구석을 애써 돌보는 마음. 다정함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뉴스에 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오래 기억된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자신을 위해 우산을 기울여 준 낯선 사람의 존재. 손등을 감싸 쥐던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 엘리베이터를 열어 놓기 위해 애써 버튼을 누르던 뒷모습. 그 모든 장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다정함이 인간의 본능 깊숙한 곳에 있는 생존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말이 필요 없을 때가 있다. 다정함은 그런 순간들을 감싸는 감정이다. 언어는 종종 오해를 낳고, 문장은 경계를 만든다. 하지만 다정함은 그 모든 틈을 메우는 솜털 같은 것. 부드럽고, 가볍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잔향.

다정함. 그 낯설고 포슬포슬한 친절이 다가올 때, 세상은 잠시 흔들린다. 거칠었던 마음이 주춤하고, 경계의 벽에 작은 금이 간다. 그 금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

그 순간, 아주 조용히 깨닫게 된다. 어쩌면 지금 이 세상이 간신히 버텨지는 이유는, 누군가 아무런 이유 없이 베푸는 그 다정한 포슬포슬함 덕분이라는 것을.



문득, 다정함은 마치 기억 저편에서 부유해 온 먼지 같다. 빛줄기 속에서만 그 존재가 선명해지는,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결코 없는 적은 없던 것. 말없이 놓인 손수건처럼, 누군가 건넨 따뜻한 차 한 잔처럼. 다정함은 늘 예상 밖에서 도착한다. 이름 없는 오후의 끝자락이나,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밤의 틈에서. 낯선 이의 눈빛에서, 다문 입술 사이에서. 그것은 부드럽지만 절대 약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결코 작지 않다. 다정함은 무언가를 부수지 않고도 무릎 꿇게 만드는 감정이다.



날카로운 것을 둥글게 만들고, 거칠어진 마음을 천천히 풀어헤치는 힘. 그 앞에서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쉽게 고백하게 된다. 혼자인 줄 알았다고, 참 오래 견뎠다고. 그러자 마침내 알게 된다. 다정함은 이 세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아주 작고 단단한 징후라는 것을. 낯설고 포슬포슬한 그것이 다가올 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되살아나는 쪽에 더 가까웠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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