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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력하고 불안전한.

기쁨은 번개처럼, 슬픔은 파도처럼

by 적적

하루가 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어김없이 자잘한 파편들. 누군가의 한마디, 갑작스러운 오류 메시지, 창밖에서 들린 비둘기의 날갯짓 같은 것들. 고작 그런 것들에 하루가 휘청이고, 무너지고, 혹은 반짝인다.



익숙해질 줄 알았다. 기뻤다가 슬펐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아 지는 일에. 매번 첫 경험처럼 흔들린다. 사소한 인정 한 마디에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고, 애써 준비한 일이 무심하게 지나치면 괜스레 무너진다. 거기서 다시 다짐한다. 오늘만큼은 일희일비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그 결심도 저녁쯤엔 흐릿해진다. 하필 그런 날은 유난히 하늘이 맑다.



기쁨과 슬픔 사이의 진자 운동. 감정은 일정하지 않고, 기상처럼 바뀐다. 어쩌면 감정이라는 건 자아가 아닌 외부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날씨처럼 오는 것. 바람처럼 머물렀다가 지나가는 것. 그런데 왜 매번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게를 싣고, 방향을 정하려 드는가.

조금만 잘 풀리면, 세상이 나를 알아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불필요할 만큼 고양된 자존감. 하지만 같은 세상이 다음 순간에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린다. 그래서 자존감이란 건 감정의 종속물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사실 그것 없이 하루를 온전히 지나기가 더 어렵다.



감정은 소음처럼 따라다닌다. 의식하지 않으면 배경이 되고, 그 위에 하루를 쌓는다. 하지만 문득 고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다가, 오래된 노래의 한 구절에서, 혹은 멈춰 선 신호등 앞에서. 그 잠깐의 고요는 세계를 낯설게 한다. 모든 것이 유예되고, 흐름이 멈춘다. 그 속에서 감정이 또렷이 들린다. 비로소 자신

이 얼마나 일희일비하며 살았는지 자각하게 된다.



누구는 말한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중심을 잡아야 해."하지만 중심은 애초에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기준으로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감정이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 마음이 들뜨는 것도, 그 사람의 방식으로 세상을 겪는 일이다. 애써 감정을 부정하지 말자. 단지, 그에 휩쓸리지 않을 방법을 익혀야 한다.



어떤 날은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유는 모른다.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도, 마음이 맑다. 그런 날은 외출하는 길목에서 잡초의 초록이 유난히 예뻐 보이고, 마트에서 고른 딸기 한 알이 놀랍도록 달다. ‘행복하다’라는 말은 그런 날 쓰는 말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설명할 수 없는 평온. 그냥 좋은 날. 그것으로 충분한 날.



반면 어떤 날은 이유 없이 가라앉는다. 침묵이 무겁고, 웃음소리가 멀게 느껴진다. 감정을 설명하려다 실패하고, 그 실패에 다시 마음이 무너진다.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않기로 한다. 슬픔은 논리가 아니라 현상이다. 현상에는 굳이 원인을 묻지 않아도 된다. 그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다시 견딜 수 있는 감정의 밀도로 돌아와 있다.



시간은 감정의 흐름을 통과시킨다. 시간을 믿기로 한다. 모든 감정은 지나간다. 지나간 감정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반면, 지나가기 전에 끌어안으려 하면 감정이 나를 집어삼킨다. 그래서 감정은 흘려보내야 한다. 눈에 담되, 손으로 쥐지 말아야 한다. 감정은 물처럼, 빛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다녀가야 한다.



문득, SNS 피드에서 누군가의 삶이 눈부시게 보인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풍경, 성취. 비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런 마음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래도 이 감정도 진짜다. 부러움. 질투. 위축. 그 감정들을 도려내지 말고, 그저 행인처럼 바라본다. '저 사람은 저렇구나' 하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구나' 하고. 거기서 다시 중심을 찾는다. 나를 기준으로 움직이는 중심.



그런 중심은 변덕스럽고 부정확하다. 누군가의 기준이 아닌, 스스로의 중심. 오늘 하루, 무너지더라도 내일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감각. 감정은 진실의 거울이 아니며, 감정의 굴곡이 나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믿음. 그래서 조금은 느슨하게, 조금은 너그럽게, 그렇게 하루를 지난다.



매일 기뻐하고, 매일 슬퍼한다. 때로는 두 감정이 동시에 머문다. 기뻐하는 동시에 무너진다. 웃으면서 울기도 한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 일희일비한다는 것은 결국, 살아 있다는 증거다. 감각이 있고, 반응하고, 상처받고, 치유된다는 것. 그러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감정의 파도 속에서 휘청이더라도, 다시 중심으로 돌아오는 법을 알면 되는 것이다.



차라리 잠시라도 기뻐하고, 깊이 슬퍼하자. 균형을 흉내 내다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채 흐릿하게 지나가는 하루보다,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벼랑 끝에 선 듯 떨리고, 뜻밖의 빛에 눈이 부셔 눈물 나는 쪽이 낫다. 기쁨이란 건 어차피 오래 머무르지 않고, 슬픔 또한 잠시 후엔 낯설어질 터, 그렇다면 피하지 말자. 감정의 진폭이 클수록 삶은 살아 있었다는 흔적을 더 분명히 남긴다. 세상은 무던함을 덕목처럼 말하지만, 그 무던함이 때로는 무감각의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흔들릴 수 있다는 건 아직도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본다는 뜻이고, 무너질 수 있다는 건 아직도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애써 무뎌지지 말고, 차라리 아프자. 환하게 웃고, 천천히 울자. 감정을 감정답게 겪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견디는 힘보다 더 깊은 인간의 품격일지 모른다.

오늘은 어떤 기분으로 잠들까. 그것조차 알 수 없는 채 하루가 기울어간다. 여전히 마음은 요동치고, 세상은 조용하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난다.


그렇게, 또 일희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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