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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귀대 전 새벽

말이 되지 못한 말들과 함께 지나간 계절.

by 적적

하루는 이삼 초 단위로 늙어간다. 봄이 온다더니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망설인다. 가로수 끝자락에서 반쯤 터진 나뭇잎이 멈춘 채 서 있다. 그런 나날들이다. 계절은 계속 도착 중이고, 나는 자꾸만 네게 미처 도착하지 못한 말을 안고 있다.



새벽 두 시, 창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났다. 울음은 아주 조용해서 거의 환청처럼 느껴졌다. 창문을 열자 찬 바람이 훅 들어왔고, 방 안은 불이 꺼진 것처럼 어두웠다. 이따금 네 생각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날 깨운다. 네가 보낸 톡이 아니어도, 너는 가끔 나를 깨우고 간다. 고요 속에서 꺼내진 어떤 기억은 잠보다 선명하다.



네가 내일 귀대한다. 그러니까 오늘은, 너의 이등병 마지막 하루다. 휴가가 끝나는 날. 내일 새벽, 부대에 들어가기 직전의 네 얼굴이 떠오른다. 네가 웃을 때 왼쪽 눈이 먼저 접힌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나는 네 얼굴을 수없이 복사해서 마음 안에 넣어두었고, 어느 밤엔 그것들이 자꾸만 깨어나 내 잠을 건드린다.



기차역 근처 작은 카페에서 너와 만났던 날이 생각난다. 나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창밖으로 흐르던 겨울 풍경을 너는 오래 바라봤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말이란 게 오히려 풍경을 가릴 때가 있다. 나는 네 손등을 바라보았고, 너는 먼 산의 윤곽을 가만히 훑었다. 네 눈동자에 비친 회색빛이 아직도 내 기억 안에 살아 있다. 그건 겨울의 빛이 아니라, 귀대 하루 전 이등병의 얼굴에만 걸리는 묘한 회색이었다.

네가 떠나고, 나는 자주 혼잣말을 했다. 주로 ‘지금쯤이면…’으로 시작하는 문장들. 지금쯤이면 점호가 끝났겠지. 지금쯤이면 PX는 문을 닫았겠지. 지금쯤이면 너는 휴대폰 없이도 내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겠지. 그런 문장들은 점점 고요해졌다. 마치 기도처럼, 아무런 대답을 바라지 않는 말들.


너는 점점 더 말이 없었다. 훈련소에서 처음 받은 공중전화 너머로 들리던 네 목소리는 낯설었다. 말이 없는 사람이 말을 하려 하니까, 그건 어떤 이명처럼 느껴졌다. 나는 수화기 너머의 침묵을 오래 붙잡고 있다가, 나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이라는 건,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 꼭 전역을 코앞에 두고 쓰는 편지처럼. 꼭 봄이 다 끝나갈 무렵에야 피는 목련처럼.



밤이 깊어질수록 나는 어린 내가 된다. 너를 만나기 전의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훨씬 단단했고, 훨씬 냉정했다. 군대라는 절대적 거리 앞에서 나는 무력해졌다. 거리와 시간은 언제나 말보다 강하다. 그걸 알게 된 계절이 있었다. 봄이었다.



봄은 잔인하게 느리다. 나는 지난봄에 네 첫 휴가를 기다리며 매일 일기를 썼다. 일기라기보단, 의식처럼 적어 내린 문장들이었다. 오늘의 하늘은 흐렸다. 오늘은 네 사진을 다섯 번 봤다. 오늘은 밥을 먹으며 울었다. 그 시절 나는 아주 작은 문장으로 하루를 살아냈다. 감정이란 것을 미세하게 조정하지 않으면 부서질 것 같았다.

우리는 긴 겨울을 지나왔다. 그 사이에 나무들은 말없이 키를 키웠고, 너는 말없이 어른이 되어갔다. 이등병이란 단어는 짧지만, 그것이 지나간 시간은 아주 길었다. 내내 너를 기다렸고, 사실은 네가 날 기다렸다는 것을, 너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기다림은 서로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자란다. 말하지 않아도, 그건 서로를 닮아간다.



내일, 너는 다시 부대로 돌아간다. 나는 너의 부재에 익숙해지지 못한 채 또 한 계절을 살아갈 것이다. 너는 아마 다시 이등병이 아닌 누군가가 되어 있을 것이고, 나는 여전히 너를 처음 보았던 눈으로 너를 떠올릴 것이다. 익숙한 것들이 가장 낯설어질 때가 있다. 다시 만났을 때, 너의 눈빛이 달라졌다면, 그건 계절 탓일 것이다. 아니면 군대의 시간 탓. 어쩌면 나의 탓.



나는 지금, 새벽을 건너고 있다. 너 없는 밤, 그러나 너로 가득한 시간. 그건 마치, 봄의 끝자락에 잠깐 들렀다 가는 이등병의 마지막 새벽 같다. 불이 꺼지기 직전의 희미한 빛,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만이 짊어질 수 있는 조용한 체념. 나는 그걸 너에게서 배웠다.



봄은 곧 여름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 계절은 늘 그런 식이다.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은 다음 계절로 미뤄진다. 네가 다음번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아마 다시 이 말을 꺼낼 것이다. 오늘 새벽, 너를 생각하며 써 내려간 이 말들. 말이 되지 못한 말들. 이름이 없는 문장들.



그러니까 너는 몰라도 된다. 내가 지금 어떤 얼굴로 이 문장을 적는지. 네가 없는 시간에, 나는 어떤 속도로 늙어가고 있는지. 그저, 내일 너는 다시 돌아간다는 것만. 그 사실만으로 나는 이 긴 새벽을 견디고 있다.

너의 벗은 몸을 가만히 바라다보다 닿아있던 나의 벗은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 안녕.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안녕.


한때 이등병이었고, 그 이등병의 연인이었으며 지금 곁의 그 혹은 그녀가 다른 사람으로 이 무료하고 지리한 행복을 아쉬워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 날엔 손끝으로 더듬어지는 그 떠나보내기엔 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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