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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려거든, 퇴고하라

말은 식어야, 마음이 닿는다

by 적적

물 한 그릇이 끓어오른다. 거품은 문장이다. 처음에는 거칠다. 활자들은 끓는 물 위를 부유하다가 이내 서로를 밀쳐낸다. 지나치게 맹렬하거나, 지나치게 맥없는 구절들이 포말처럼 생겼다 사라진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못하고, 표면을 어지럽히는 생각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문장의 발끝들. 그때, 국자를 든 손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다시 식힌다. 뜨겁던 말들이 미지근한 공기 속에서 한 번 식어가는 순간. 이것이 바로 토렴이다.

끓인 국을 식은 밥 위에 얹기 전, 국물의 온도를 낮춰 밥알을 해치지 않게 만드는 그 마음. 그 신중함. 글은 처음에 뜨겁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생의 온도이자 말의 충동이다. 어떤 문장들은 무거운 감정에 짓눌려 있다. 어떤 문장들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높인다. 공들여 쓴 문장일수록 덜 익은 채로 타올라 있다. 그렇기에, 글은 잠시 식어야 한다. 너무 뜨거워 한 입에 넣지 못했던 단어들을 다시 천천히 만져보는 일. 혀가 닿기 전, 마음이 닿아야 한다.


문장에는 그 문장을 쓴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다. 슬픔에 겨운 저녁이면 마침표조차 우울해진다. 들뜬 오후엔 쉼표가 지나치게 많아진다. 그래서 글은 다시 읽히기 전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야 쓴 사람도 낯선 독자가 된다. 말들이 익어 있는지, 덜 삶아진 채 딱딱하게 남아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거리. 그 거리만큼의 시간, 그 시간만큼의 무관심이 필요하다.


퇴고는, 거리를 만드는 일이다. 너무 가까이 두면 글은 얼굴을 감춘다.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방어막을 친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자기 최면이 말을 흐릿하게 만든다. 반면 너무 멀어져 버리면, 글의 체온이 식어버린다. 냉정함은 필요하지만, 냉소는 금물이다. 적당한 온도에서, 적당한 거리에서, 국물을 다시 덥히는 마음으로. 그 마음이 바로 퇴고다.



글을 고치는 일은 글을 처음 쓰는 것보다 어렵다. 초고는 충동의 영역에 있다. 그것은 감정과 기억의 덩어리를 내던지는 일이다. 하지만 퇴고는 해체와 재조립이다. 버리는 일이다. 때로는 지워야 한다. 애써 만든 문장, 공들여 고른 단어, 나만 아는 은유. 그것을 버리는 일은 모래 위에 쌓은 성을 허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래야 물이 흐른다. 문장이 스스로 숨 쉬기 시작한다.



토렴은 시간을 요한다. 끓는 것을 멈추고, 식은 것을 다시 따뜻하게 만들기까지. 퇴고도 그렇다. 좋은 글은 여러 번의 온도차를 겪는다. 처음에는 뜨거운 직진이었다가, 다음에는 조심스러운 곡선이 된다. 단어 하나를 고치기 위해 수십 분을 망설이는 일. 쉼표 하나를 두기 위해 수백 번의 호흡을 세는 일. 그 모든 망설임이 글의 결을 만든다. 그 결이 곧, 말의 진실이다.



좋은 글은 “쓴 사람을 지우고, 읽는 사람을 남기는 일”이라고. 퇴고는 바로 그 지움의 미학이다. 너무 많았던 감정을 덜어내고, 지나치게 꾸민 표현을 걷어내며, 문장 사이를 맑게 만드는 작업. 그것은 결국 문장 안에서 나를 밀어내는 일이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지워진 듯 남아 있는 기척. 그것이 퇴고 이후의 글에 남는다. 이름 없이 남은 마음의 결.


토렴 하는 손길은 다정하다. 글을 다루는 마음도 그래야 한다. 때로는 너무 짜서, 때로는 너무 맹숭맹숭해서, 전체를 다시 맞추는 감각. 그 감각은 오직 ‘먹어보아야’ 알 수 있다. 읽고, 되읽고, 다시 읽고. 마침내 단어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 어색하게 겹쳐 있던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튀던 문장 하나가 문단 속에 스며드는 순간. 그것이 글의 맛이다. 그리고 퇴고는, 그 맛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불조절이다.



사람의 말도, 사람의 마음도, 처음엔 모두 덜 익었다. 퇴고는 그것을 익히는 일이다. 너무 서둘지 않고, 너무 미루지도 않고. 적당한 타이밍에 손을 대는 일. 삶도 마찬가지다. 기억 하나, 생각 하나, 감정 하나. 그 모두가 시간이 지나야 자기 자리를 찾는다. 토렴은 단지 음식의 기술이 아니다. 삶의 태도이며, 글의 자세다. 가장 뜨거운 것을 가장 부드럽게 담아내는 기술. 말로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되, 데이지 않게.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퇴고는 물을 다시 끓이지 않는다. 다만 그 물을 다시 한번 식히고, 다시 한번 덥힌다. 너무 과하지 않게, 너무 덜하지 않게. 적당히 데운 말들은 낯선 이의 혀끝에서야 비로소 제 맛을 낸다. 그렇게 한 그릇의 글이 완성된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너무 서두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마침내 국물과 밥이 만나듯, 말과 마음이 하나로 스며드는 순간.

문장은 다시 살아난다. 이미 쓴 글이지만, 다시 태어난다. 그것이 퇴고다. 그것이 토렴이다.

그리고 그 모든 온도의 변화를 견디는 일이야말로, 진짜 글쓰기다.



문장은 끝났지만, 말은 아직 그릇 안에서 증기를 낸다. 다 식었다고 생각한 구절에서 마지막 온기가 피어오르고, 지워낸 쉼표 틈에서 미세한 숨소리가 스민다. 퇴고는 종결이 아니다. 오히려 시작을 허락하는 일이다. 단단한 문장 하나를 쥐고 나올 수 있을 때까지, 무수한 단어들을 떠내고 식히고 다시 데우는 그 반복 속에서, 비로소 말은 체온을 갖는다. 너무 서둘러 닿은 문장은 차갑고, 너무 오래 묵힌 말은 눅눅하다.


그 미묘한 온도의 경계, 그 찰나의 순간. 토렴은 그 시간을 기다리는 예술이다.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을 믿고, 말보다 앞선 마음의 움직임을 붙드는 일. 글을 오래 들여다보면, 문장은 결국 말을 삼킨다. 소리를 죽이고, 남은 건 결 만이다. 그 결이 손끝에 닿았을 때, 퇴고는 끝난다. 그 끝에서 시작되는 건, 읽는 이의 마음에 놓인 조용한 불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오래 타오르는 어떤 문장. 마침표 이후에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런 문장이 세상에 남는다.



토렴 하는 마음으로 쓰인 문장은, 그렇게 식은 듯 뜨겁게, 말보다 길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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