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지 않기 위해 지어진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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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碑文)은 읽히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돌에 새겨진 문장은 시간에 닳아 흐릿해지고, 의미는 바람 속으로 침식된다. 오히려 읽히지 않음으로써 영원해진다. 누군가가 그것을 해독하려는 순간, 성은 무너진다. 그곳의 성주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읽히지 않기 위해 문장을 세우고, 읽히지 않기 위해 침묵을 설계했다. 어떤 건축은 허물어지기 위해 지어지고, 어떤 침묵은 말보다 더 분명하게 외친다.
비문의 성은 그런 장소였다. 언어가 사라지는 곳. 모든 문장이 무효화되는 경계. 그곳엔 형체 없는 시간들이 부유했다. 그것들은 어떤 날은 이끼로, 어떤 날은 빛의 반사로, 어떤 날은 단단한 유리처럼 존재했다. 명확하다는 착각은 그 모든 것에 금이 가게 했다. 성주가 그것을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반겼다. 금이 가는 것, 갈라지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균열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문장을 잉태한 자는 그 문장을 파괴할 책임이 있다. 말의 집에 갇히지 않기 위해선, 그 집을 스스로 불태우는 결단이 필요하다. 성주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성에 누군가 들어오려 할 때, 늘 문을 반쯤 열어두었다. 완전히 열지도, 완전히 닫지도 않은 채. 그 미세한 틈이야말로 언어가 가장 위험하게 흐르는 틈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 틈으로 들어와 비문을 읽으려 했다. 감히 소리를 내어 읽고, 감히 문장을 해석하려 했다. 그들의 입술은 곧 침묵에 삼켜졌다. 성의 돌기둥은 감정을 흡수했고, 복도의 그림자는 해석을 삼켰다. 진정한 말은 해석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한다'. 성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성주 또한.
그러나 성주도 언젠가 깨달았다. 어떤 문장들은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마치 흰 종이의 가장자리에 남겨진 미세한 연필 자국처럼, 읽히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언어의 태도였다. 그런 문장들은 성의 깊은 내부, 손도 닿지 않는 서고에 보관되었다. 봉인된 채. 고요의 겹겹 아래서.
밤이면 성의 벽이 호흡했다. 벽돌 사이로 나뭇잎이 들어오고, 빛이 틈입했다. 언어가 스스로를 발화하지 않는 공간, 해석되지 않음으로써만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밤의 침투는 명백한 반역이었다. 성주는 그 반역을 허용했다. 왜냐하면 모든 성은 언젠가 무너져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무너지지 않으면, 타인의 해석에 의해 허물어진다.
문장은 기록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 언어가 살아있는 것은 단지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은 사라진다. 비문의 성이 그것을 증명했다. 돌에 새겨진 단어들은 시간이 지나며 자음과 모음의 경계를 잃고, 문장의 골격은 이끼와 함께 붕괴했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은 곧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아직도 태동 중이라는 신호였다.
한때, 성 안에 금박으로 장식된 방이 있었다. 그곳은 꿈의 방이라 불렸다. 잠든 자의 뇌파를 받아 종이 위에 자동으로 글자를 쓰는 기계가 그 방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 기계는 매번 동일한 문장만을 써 내려갔다.
나는 비문의 성의 성주였으므로.
그 문장은 끝나지 않았다. 마침표조차 없었다. 누군가가 그것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꿈은 현실이 된다. 현실이 되는 순간, 성은 의미를 잃는다. 그래서 성주는 그 기계를 파괴하지도, 예찬하지도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내버려 둠으로써 가장 예민하게 보호했다.
비문의 성은 중심이 없었다. 중심이라는 환상이 사라진 세계.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중심이었다가, 동시에 변두리였다. 방들의 순서도 매일 달라졌다. 어제 문장이 태어났던 방이 오늘은 침묵의 폐허로 바뀌었다. 질서가 의미를 가지는 건, 그것이 깨질 때뿐이다. 그 파괴의 간격 사이에서만 진짜 문장이 자란다.
언어는 형태가 아니다. 충격이다. 문장이라는 정제된 형식은 충격의 흔적에 불과하다. 성주는 그 흔적을 수집하지 않았다. 대신 충격의 순간만을 포획하려 했다. 살아 있는 언어, 살아 있는 사유, 살아 있는 침묵. 그것들을 포획하려는 몸부림이 곧 성의 윤리였다. 비문의 윤리였다. 읽히지 않음으로써 더 많이 말하는, 그런 언어의 방식.
때때로 성의 탑에서 불이 났다. 외부의 언어가 난입했을 때였다. 불은 천천히 번졌고, 일부 방은 검게 타들어갔다. 그러나 성주는 불을 끄지 않았다. 타버림으로써만 남겨지는 의미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재가 아니라 빈 공간이었다. 불에 타 버려야만 드러나는 것들. 오히려 그것이 더 정직한 언어의 형태였다.
성의 정문 위엔 문장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세월과 이끼에 덮여 보이지 않던 그 글자가, 어느 날 비에 씻겨 드러났다.
읽지 말라. 그러나 잊지도 말라.
누군가는 그 문장을 모순이라 말했다. 하지만 모순은 가장 정직한 형태의 진실이다. 잊지 않기 위해선 읽어야 하고, 읽기 위해선 잊어야 한다. 그것은 언어의 숙명이다. 성주는 그 모순을 곧잘 사랑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 성의 탑 끝에서 사라지는 빛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문장이 아니라 기원(祈願)이었다. 해석되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 언젠가, 이 말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숨겨진 갈망. 성주도 결국 언어의 존재였고, 언어는 들리지 않음으로써 존재할 수 없다.
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문장도, 침묵도, 그 틈 사이의 겹도. 누군가 그곳에 들어가 또 다른 비문을 남길지도 모른다. 읽히지 않기 위한 문장, 읽히기를 갈망하는 문장. 그 두 개의 문장이 서로를 지워가며 완성해 가는 서사.
그리고 언젠가, 진짜 성주가 돌아오겠지. 단 한 문장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자. 해석 없이도 감전되듯 읽히는 문장, 이해 이전에 목구멍을 치고 들어오는 문장. 그 문장을 품은 이는, 침묵을 가장 뜨겁게 다룰 줄 아는 존재일 것이다. 그는 성의 폐허 속에서, 불에 탄 재의 온도를 입술로 잴 것이다. 의미가 사라진 장소에서 되려 언어를 낳을 것이다.
말이 없기에 말이 더 거세지는 그곳에서, 그는 조용히 속삭일 것이다. 피를 먹고 자란 문장, 침묵에 쪼개진 문장, 그리고 끝내는 문장이기를 거부하는 문장을. 그것은 찢긴 채 남아 있는 비문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기형적인 형식일 테지만, 오직 그런 문장만이 이 세계의 가장 밑바닥을 두드릴 수 있다. 아름다움도, 정확함도 거부한 채, 오직 ‘살아남기’ 위한 언어. 그것이 진짜 성주가 들고 올 칼날일 것이다.
그 칼은 종이를 자르지 않는다. 오히려 종이 너머를 가른다. 읽는 자의 심연을 찢는다. 그런 문장 앞에서 인간은 해석자가 아닌 희생자가 된다. 비문의 성은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문장이 스스로를 찢는 날, 성은 다시 완성된다. 해석의 신화를 완전히 소각한 자리에서, 마지막 문장으로 쓰일 것이다. 누구도 읽을 수 없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문장. 침묵의 가장자리에서.
그 문장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