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미묘케 01화

프롤로그

바다와 스카프사이에 있는 것.

by 적적



명확함을 거부할 때 살아나는 세상.


미묘하다는 것은 손끝에 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손끝에 닿았을 때조차 그것을 설명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마치 투명한 물속에 손을 담갔는데, 잡으려는 순간 물결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것처럼. 예를 들어, 한 뼘 남짓한 실크 스카프가 있다. 누군가의 손에서는 여름밤의 얇은 공기처럼 부드럽고, 다른 사람의 손에서는 오래된 서랍 속에서 꺼낸 편지의 바스러지는 촉감처럼 느껴진다. 같은 천조각이지만, 그것을 만지는 손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목에 둘러준 스카프의 기억과, 한 연인이 이별 직전 던져놓고 간 스카프의 기억은 결코 같은 촉감을 허락하지 않는다. 미묘함은 이처럼, 사물과 기억이 얽혀서만 나타나는 개인적인 감각이다.



역설적으로, 미묘한 것은 객관성을 거부한다. 객관적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평균값으로 환원하려는 세계에서, 미묘함은 평균화될 수 없다. 같은 창문 밖의 바다를 보더라도, 한 사람에게는 무겁게 내려앉는 회색의 수평선이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경계가 보인다. 파도 소리조차, 해변에서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설레는 북소리로 울리고,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는 무심하고 차가운 작별의 울림으로 변한다. 이는 바다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내면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묘함은 이렇듯 합의와 규격화를 거부하고, 그 불합의 자체를 힘으로 삼는다.


이 힘은 촉각의 은밀한 속성과 닮아 있다. 눈앞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색이나 형태는 비교적 비슷하게 인식되지만, 손끝에 남는 촉감은 그렇지 않다. 같은 대리석 테이블이라도, 여름에는 손바닥에 시원한 물결을 남기고, 겨울에는 칼날처럼 차갑게 스민다. 심지어 같은 계절, 같은 자리에서도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다면 그 차가움은 균형을 잡아주는 안정감으로 변하지만, 홀로 앉아 있다면 그 차가움이 마음속 공허와 합쳐져 무겁게 내려앉는다. 마치 같은 물이 누군가에게는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고, 다른 이에게는 폐허 속 웅덩이인 것처럼, 미묘함은 대상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의 그림자에서 태어난다.



언어는 본래 미묘한 것을 싫어한다. 언어의 임무는 흐릿한 것을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묘함은 언어를 통과하는 순간 변형된다. 오래 전의 어떤 여름밤, 창문 틈새로 스치는 바람이 있었다고 하자. 어떤 이는 그 바람을 ‘서늘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쓸쓸하다’고 말한다. 두 단어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결코 겹쳐지지 않는 감각의 심연이 있다. 서늘함 속에는 온도의 변화가, 쓸쓸함 속에는 관계의 부재가 들어 있다. 언어는 그 차이를 하나의 평면에 눌러 담고, 서로 다른 감각을 동일한 이미지로 바꿔버린다. 그래서 미묘한 것을 설명하는 말은 언제나 그림자의 테두리만 잡아내고, 중심부의 색을 놓친다.



미묘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작동한다. 한 사람의 눈짓이 있다. 연인에게는 그것이 부드러운 위로가 되고, 경쟁자에게는 은근한 도발이 된다. 같은 미소가 어떤 자리에서는 환영의 신호이지만, 다른 자리에서는 조롱의 암호가 된다. 이 이중성은 연극 무대 위에서처럼, 같은 대사가 다른 톤과 표정으로 발화될 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과 같다. 미묘함은 관계 속에서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문맥이 바뀌면 의미도 바뀌고, 의미가 바뀌면 감각의 색채 또한 변한다. 결국 그 사람을 향한 과거의 감정이 현재의 해석을 결정한다.

미묘한 것은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만 발효된다. 같은 음악을 들어도, 어떤 이에게는 눈을 감으면 그 곡이 첫 만남의 거리로 데려가고, 또 다른 이에게는 병실의 하얀 커튼을 떠올리게 한다. 이 기억들은 결코 교환되지 않는다. 심지어 누군가가 자세히 설명한다 해도, 그 감각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서로 다른 표정을 지으며, 그 차이를 확인하는 순간 사람들 사이에 작은 틈이 생긴다. 그러나 그 틈이야말로 관계를 단조로움에서 구해내는 요철이다. 모든 관계가 매끈해지는 순간, 그 관계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현대의 감각 체계는 미묘함을 빠르게 소거한다. 매뉴얼과 표준, 알고리즘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중심에 세운다. 그러나 평균적인 취향만 남는 자리에서, 미묘함은 불필요한 잡음으로 취급되어 삭제된다. 이는 마치 사진 보정 프로그램이 피부의 잡티를 지우듯, 그 사람만의 결을 함께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매끈한 이미지는 보기 편하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미묘함을 느끼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느리게 스며드는 과정을 감내할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속도가 미덕이 된 사회에서, 미묘함은 점점 ‘쓸모없는 사치’로 밀려난다.


미묘한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완전한 번역 속에서 살아남는다. 어떤 그림 앞에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 어떤 목소리를 듣고도 설명 대신 웃음만 흘리는 사람, 이들은 모두 미묘함을 붙잡으려다 놓친 사람들이다. 미묘함은 손끝에 잡히지 않지만, 부재 속에서도 존재를 주장한다. 손을 뻗으면 흩어지는 먼지처럼, 가까이 다가갈수록 형태를 바꾸지만, 바로 그 변형이 미묘한 것의 생존 방식이다.


결국 미묘한 것의 힘은 ‘다르게 말할 수 있음’에 있다. 다르게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서로의 내면에 전혀 다른 지도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다. 두 지도는 완전히 겹쳐지지 않지만, 서로의 빈틈을 비추어 새로운 길을 만든다. 미묘한 것은 바로 그 길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너무 명확하게 규정하면 증발하고, 너무 멀리 두면 감각이 닿지 않는다. 그것은 손끝과 언어 사이, 기억과 현재 사이, 오해와 이해의 경계 위에서만 살아 있다.



그래서 미묘한 것을 완전히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이 실패는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그 실패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의 차이를 더 깊이 들여다본다. 모든 차이는 새로운 이해의 시작이며, 이해는 다시 미묘함으로 돌아온다. 이 순환 속에서, 미묘한 것의 힘은 끝없이 변주되며, 만지는 사람마다 다른 말을 낳는다.



세계가 여전히 낯설고 살아 있는 감각을 잃지 않게 하는 유일한 장치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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