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미묘케 22화

흔들리지 않는 빛

후회가 아닌 자부심으로 남는 기록.

by 적적


누군가는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두려움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자부심으로 간직한다. 어느 날 불현듯,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 단지 상실의 서명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의 균열처럼 시작되지만 곧 삶 전체를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망설임의 여지를 지워버린 선택이며, 후회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불씨가 꺼지지 않는 벽난로처럼, 이미 일어난 감정은 시간의 저편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한때 스쳐 지나가던 시선이 영원히 머물러 있는 풍경처럼 굳어진다. 부드럽게 휘날리던 천이 돌처럼 굳어버린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연속으로 남는다. 마치 겨울 창문에 맺힌 서리가 아침 햇살에 사라져도 유리의 얼룩으로 남아 버리는 것처럼, 감정은 흔적의 형태로 삶에 새겨진다.


사람들은 흔히 가역적인 삶을 원한다. 실수는 지워지고, 사랑은 취소 가능하며, 분노는 사과로 봉합된다. 그러나 어떤 마음은 한번 생겨나면 결코 회수되지 않는다. 한 사람을 향한 애착, 한 장소를 향한 갈망, 혹은 한 계절을 향한 미련. 그것들은 모두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언젠가 이 마음을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순간조차,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것은 이별 뒤에 남은 방 안의 공기처럼, 아무도 없는 공간에까지 잔향처럼 남는다. 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도, 벽과 천장에 배어버린 냄새는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사진을 꺼내 본다. 흑백의 빛바랜 종이 위에 서 있는 얼굴. 그 얼굴은 이미 낯설지만 동시에 낯설지 않다.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껍질이 그 위에 덧씌워져 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남아 있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마음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단지 기록 없는 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사진 속 배경의 나무는 이미 베어졌을지 모르고, 벽에 걸린 달력은 오래전에 불타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얼굴 위에 맺힌 표정은 여전히 그 시간의 공기를 품은 채 남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은 곧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스스로에게 건네는 약속, 상대에게 묶여버린 시선, 혹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결정. 사람은 그것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자부심은 바로 그 감당의 순간에서 솟아난다. 무게를 견디고 있다는 사실, 흔들리지 않는 결정을 끝까지 지켜내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되돌릴 수 없다면 더 이상 도망칠 필요도 없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길만이 남는다. 그 길은 때로 좁고 미끄럽지만, 발자국이 쌓일수록 단단한 길이 되어 간다.


가끔은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 잔혹한 족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타인을 향한 마음은 더 이상 흐트러지지 않고, 떠나간 이를 향한 감정은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움은 날마다 새로운 얼굴을 하고 찾아오며, 애증은 다시 같은 자리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역성 덕분에 인간은 성장한다. 되돌릴 수 없다면, 그 위에 다시 무언가를 쌓아 올릴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은 마치 버려진 건물 위에 피어나는 담쟁이덩굴 같다. 허물어진 벽을 가리며,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러온다.



한 도시의 낡은 골목을 떠올려 보라. 오래된 간판은 색이 바래고, 벽돌 사이에는 이끼가 번졌다. 새로 지어진 건물들 사이에서 그 골목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남아 있다. 도시가 아무리 변해도 그 골목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은 바로 그 골목 같은 것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지켜내는 힘이다. 벽돌의 틈새에서 피어난 잡초, 금이 간 전봇대에 걸린 전선의 그림자, 그 모든 것이 시간을 견디며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도 흐려지지 않는 문장이 있다. 편지의 한 구절, 책 속의 한 문단, 혹은 대화 중에 스치듯 건네진 말 한마디. 그것들은 잊히지 않고 남아 사람을 묶어 둔다. 언젠가 그것을 다시 떠올릴 때, 비로소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을 지녔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진다. 어떤 감정은 사라지지 않음으로써 존엄을 획득한다. 어떤 선택은 되돌릴 수 없기에 숭고해진다. 종이 위에 적힌 잉크가 비바람에도 지워지지 않고 얼룩으로 남듯, 마음 또한 흔적을 지워내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란 결국 인간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단단히 붙잡아 두는 닻과도 같다. 바람은 불고 파도는 치지만, 닻이 박혀 있는 한 배는 전부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 마음이 없다면 삶은 끊임없이 표류할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미명 아래,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한 채 끝없이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은 그 가능성을 하나의 현실로 굳힌다. 그 현실은 더 이상 꿈이 아니며, 한 번 선택된 길은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 그것은 물속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린 바위와 같아, 어떠한 조류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을 지닌 순간,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된다.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은 실패가 아니라 성취다. 망설임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오직 현재의 빛만이 남는다. 그 빛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흔들리지 않는 빛은 새벽의 별처럼 고요히 타오른다.



누군가를 끝내 사랑해 본 경험, 어떤 진실을 거짓으로 덮지 못한 기억, 혹은 되돌릴 수 없는 한 번의 결단. 그것들은 모두 시간의 심장에 못을 박는다. 그 못은 결코 뽑히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돌이킬 수 없음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고귀한 자산이 된다. 녹슨 못이 오래된 나무에 남겨지듯, 마음 또한 그 흔적을 숨기지 않는다.

상처는 의도치 않게도 하나의 조각상이 된다.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표정, 되돌릴 수 없는 대답, 끝내 바꿀 수 없는 선택이야말로 인간을 조각해 내는 정밀한 끌이다. 그렇게 깎이고 남은 형태는 흉터일 수도, 조형물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그 안에는 살아냈다는 흔적이 새겨져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이다. 그것은 실패의 흔적을 넘어선 기념비이며, 흔들리는 감정을 넘어선 최종의 문장이다. 언젠가 불 꺼진 방 안에 홀로 앉아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순간, 지워지지 않는 마음들이 조용히 모여 앉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삶을 빛나게 하고, 그 빛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불빛이야말로 인간이 끝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증거라는 것을.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을 지닌 것이 자랑스러워질 때, 삶은 비로소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 된다. 뒤돌아보지 않는 용기, 되돌릴 수 없음을 감당하는 힘, 그리고 끝내 남아 있는 감정의 불가역성이 인간을 완성한다.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문장이고, 파괴가 아니라 건축이다.



두려움이 아니라 존엄이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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